한국 전쟁(韓國戰爭,6·25 전쟁, Korean War)은 1950년 6월 25일 발발하여 이후 3년 동안 계속된 전쟁으로 수많은 군인 및 민간인이 사상하였고,
대부분의 산업 시설들이 파괴되는 등 양측 모두가 큰 피해를 입었으며, 그 결과로 남·북 간의 적대적 감정이 커지는 결과를 낳게 되었다.
1953년 7월 27일에 체결된 정전협정으로 인하여 군사분계선을 사이에 두고 양측은 전쟁을 중단하였다.
현재까지 서류상으로 정전 상태지만, 정전 이후에도 쌍방 간에 크고 작은 분쟁이 발생하고 있다.
1945년 2월 11일 일본군을 저지 하기위한 목적으로 미,영,러가 얄타회담 개최.
러시아(당시 소련)는 이회담에서 미국을 돕는 조건으로 권리 회복을 약속받는다. (참고 : 얄타에서 생긴 일)
1945년 8월 9일, 대일선전을 포고한 소련군은 만주와 한반도를 향하여 밀어닥치기 시작했으며, 마침내 8월 10일, 일본은 연합국측의 무조건 항복 권유를 수락하기에 이르렀다. 이때 미국은 한반도에 38도선을 설정하여 그 이북지역은 러시아군이, 그 이남지역은 미군이 진주하여 각각 일본군의 항복과 무장해제를 담당. 이때부터 정치적 구도가 38도선을 기점으로 북은 러시아의 공산화가 남은 미국의 민주화의 구도 형상이 발생
러시아는 1945년 10월 14일에는 김일성을 등장시키고, 이듬해 2월 8일에는 이른바 북조선 임시인민위원회를 구성하도록 하여 소위 ‘확보된 지역에서의 사회주의 구축작업에 들어갔다. 뒤늦게 미국 정부는 공산주의 국가인 소련을 견제 하기위해 1945년 9월 7일에는 맥아더 미 극동군 총사령관이 남한에 대한 군정을 선포.
북한쪽은 북조선임시인민위원회의 권력을 장악한 김일성이 각도 인민위원회에 이어 1946년 11월에 실시한 시, 군, 면 단위별 각급 지방 인민위원회의 위원들을 선출했다. 그리고 1947년 2월 중순 ‘임시’가 아닌 정식 ‘북조선인민위원회’를 구성하게 된다. 남한쪽은 유엔 한국임시위원단의 감시 하에 1948년 5월 10일 남한만의 단독 총선거를 실시하였으며, 선거결과 1948년 5월 제헌의회가 구성됐다. 초대의장에 이승만, 부의장에는 신익희, 김동원 의원이 선출됐다. 제헌의회는 7월 12일 헌법을 제정한 후 7월 20일 이승만과 이시영을 각기 정·부통령으로 선출하게 된다. (민주주의 국가 수립)
1948년 말경부터 북한에서는 군사력 증강작업에 착수하였으며 북한은 소련제 탱크와 기계화 부대를 중점적으로 편성하기 시작. 이때 부터 러시아와 중국을 연합으로한 북의 남친 소문이 한반도 전역으로 퍼짐, 그러나 광복이후 제대로된 정부 수립이 미비한 상태였고 당시 미국은 소극적으로 대응하다가, 1950년 6월 25일 일요일 새벽 북한군이 감행한 전면기습 공격에 맞닥뜨리게 되면서 1953년 7월 27일부로 정전이 될때까지 한반도는 3년 1개월 2일간이나 지속되면서 형용 불가능한 참화를 초래한 동족상잔의 전쟁이 발발하게 된다.
(참고: 한국전쟁의 원인)
소련이 불참한 가운데 열리고 있는
유엔 안전보장이사회 (UN Security Council)
대한민국 정부는 전쟁이 일어나자 주미 한국대사 장면과 서기관 한표욱에게 긴급 훈령을 내려 미국 국무부에 사태의 긴급성을 알렸고, 6월 26일 주미한국대사 장면은 백악관으로 미국 대통령 트루먼을 방문, 미군의 한국 파병을 요청하였다. 미국은 유엔 안보리를 열어 한국 문제를 건의했다. 이에 따라 UN 안전보장이사회는 현지시각 6월 25일 14시에 소집되었고, 미국의 제안을 받아들여 "조선인민군의 즉각적인 전투 행위 중지와 38도선 이북으로의 철수"를 요청하는 결의안을 9대 0으로 가결하였다.같은 날 주미한국대사 장면은 미국 상, 하원의원들을 찾아다니며 한국에 파병해줄 것을 호소하였다.
6월 27일 11시, 백악관에서 열린 제2차 안보회의에서 미 해‧공군의 참전을 결정되었고 지상군 참전에 관한 최종 판단은 맥아더 원수에게 맡겨졌다. 이러한 조치에 따라 6월 29일에 맥아더는 한국으로 날아와 한강방어선을 직접 시찰하고 난 후 지상군 투입의 당위성을 6월 30일 03시, 트루먼 대통령에게 건의하였고 대통령의 허가가 나자마자 미군의 본격적인 개입이 이루어지게 되었다. 이때 일본에 주둔하고 있던 미 제24사단에게 출동 명령이 하달되고 그 선발대로 선정된 스미스 특수임무부대(Task Force Smiths)가 7월 1일 부산에 상륙하게 됨으로써 전쟁은 북한군과 한‧미 연합군간의 전쟁으로 성격이 바뀌게 되었다.
항목 | 대한민국 | 조선민주주의 인민공화국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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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갑차 | 27대 | 54대 |
전차 | 0대 | 242대 |
곡사포 | 105mm-m 388문 사정거리 6500m | 122mm 172문 76.2mm곡사포 176문 76.2mm자주포 242문 사정거리 평균 10,000m |
대전차포 | 120mm 590문 | 45mm 540문 |
박격포 | 60mm 576문 81mm 384문 | 61mm 1142문 82mm 950문 120mm 226문 |
군용기 | 훈련기 포함 22대 | 전투기 포함 170대 |
육군병력 | 9만 4947명 | 19만 1680명 |
해군병력 | 7715명 | 4700명 |
공군병력 | 1897명 | 2000명 |
총병력 | 10만 4559명 | 19만 8380명 |
전투경험 | 전투참여 전무, 문맹다수 (신병 다수) | 중국 팔로군 출신 한인 중 일부 국공내전 참전 경험 |
UN군 (한국군; 59만<정규군 18만, 국민방위군 41만>, 미군; 48만, 영군; 5.6만 등 약 120만명).
공산군 (인민군; 26만, 중공군; 75만, 소련군; 2.6만 등 약 100만명)
UN군 사상자 (한국; 190만<민간인포함>, 미군; 13.7만, 영군; 4,900명 등).
공산군 사상자 (인민군; 332만<민간인포함>, 중공군; 37만, 소련; 800명 등)
중공과 북괴에서 노획한 필름을 정리해서 제작한 것이다.
■ 한국전쟁 Colour 현장 비디오 사진 [Youtube 동영상 6편]
■ 한국전쟁 걸작사진전 [B급호러 Movie]
■ Remembering the Korean War, 60 years ago [The Big Picture]
■ LIFE紙가 공개한 한국전 당시의 서울의 생생한 모습 [고성혁의 역사추적]
■ 한국전쟁 미군 기록사진 [울프독]
■ 다시보는 6.25 한국 동란 60년전 [1] [2]
■ 한국전쟁관련 사진 600여 장 - Picasa
■ Photos of Korean War - 한 미군병사의 사진들
■ 1950년 북한지역의 모습들
■ 6.25 전쟁과 일상들 <1> <2> <3> <4> <5> 6.25 당시 희귀사진 8장
■ 6.25 동란 이후와 현재의 서울 풍경
■ 6.25 전쟁때 희귀 전단 [삐라 모음]
■ 미군을 잔인하게 묘사한 북한의 정치 선전화
■ 60년대 판문점의 모습들
■ 한국전쟁, 그 당시 명동을 보다 [임응식 사진전]
■ 퓨리처 상 수상 '맥스 데스포' 기자의 극적인 사진 [N.A.R.A. 울프독]
● 美軍의 6.25 (동영상) - 한국전의 발발에서 부터 휴전까지의 역사적 자료를 담은 매우 귀중한 영상
● 미군정 시절의 사진들
-. 친일경찰의 대명사 노덕술과 이승만, 장택상.. 그리고 '자랑스런 울산인' (고문왕 노덕술의 생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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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46년 대구의 '10월 항쟁'
1946년 10월1일 대구시민들이 ‘쌀이 아니면 죽음을 달라’며 기아행진을 하고 있다 10월사건으로 희생된 시신들 |
“쌀이 아니면 죽음을 달라”…대구의 잊혀진 계절 1946년 10월 영남일보 위클리포유 20131011 1946년 10월 미(美)군정하 대구는 ‘조선의 모스크바’로 불릴 만큼 ‘반골의 도시’였다. 4·19혁명을 촉발한 계기도 대구 2·28의거였다. 당시 대구는 ‘민주주의의 성지’였다. 1946년에 벌어진 ‘10월사건’은 광복 후 대구에서 일어난 가장 참혹한 사건이었다. 하지만 이 사건은 2010년 진실·화해를위한과거사정리위원회(이하 진화위)가 ‘사건’으로 명명하기 전까지 ‘폭동’으로 폄훼됐다. 진화위는 10월사건을 ‘식량난이 심각한 상태에서 미군정이 친일관리를 고용하고 토지개혁을 지연하며 식량공출정책을 강압적으로 시행하자 불만을 가진 민간인과 일부 좌익세력이 경찰과 행정당국에 맞서 발생한 사건’이라고 못 박았다. 美군정에 ‘식량난’ 항의 대구역 행진이 시발점… 제주·여순사건과 달리 평화공원·기념관은 커녕 명예회복 움직임도 없어 10월1일에 발생한 항쟁은 12월 중순까지 전국으로 번졌다. 당시 자료에 따르면 대구·경북인구 310여만명 중 70여만명이 파업과 시위에 참여했다고 나온다. 1946년 7월2일자 영남일보는 당시 상황에 대해 ‘배고파 못 살겠소’ ‘기아시민 간청 쇄도’라는 제목으로 대구의 식량난이 얼마만큼 심각했는지 생생하게 보도하고 있다. “갑-쌀은 주지 않고 교통은 전부 막아 놓았으니 매일 지방을 돌아다니며 양식을 구해 먹는 사람들이 어떻게 살 도리가 있나.” “을-나는 사흘 굶어서 일할 기운도 없소. 집에 식구들이 늘어져 누운 것을 보고 왔는데 그동안 죽었는지 살았는지 모르겠소.” “병-배가 고파서 늘어져 누웠으면 호열자(콜레라)에 걸렸다고 와서 잡아가고, 쌀은 주지 않으니 세상에 이런 일이 어디 있어.” 쌀을 달라고 수천명의 군중이 아침부터 대구부청과 경북도청으로 몰려와서 오후가 되도록 돌아가지 않고 어떻게든지 목숨을 구하도록 해 달라고 부르짖는 그 전경은 눈 뜨고 볼 수 없거니와, 관계당국에서는 미군정 관장에 문의했으나 별다른 대책을 얻지 못하였으며, 다만 대구부가 가지고 있는 쌀과 잡곡, 합해 600석을 배급하기로 했다. 이 600석의 쌀은 천시민의 하루분 식량에 불과하다. 그야말로 붉은 화로에 떨어지는 눈방울로 30만 시민은 문자 그대로 생사의 기로에서 방황하고 있다. - 영남일보 46년 7월2일자 -. “우리 할아버지·아버지는 빨갱이가 아닙니다” 유족의 슬픔 -. “광주가 5월이라면 대구는 10월이다, 그런데 왜 10월은 사건인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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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도연맹이란 좌익으로 활동하다가 체포되거나 전향한 사람들을 모아 정부가 조직한 단체이다. 이 단체는 전국적인 조직망을 가지고 있었고 정부의 후원도 있어서 소속 연맹원들이 많았었다. 대한민국 첫 손가락에 꼽히는 극우 반공검사였던 오제두가 제안하였으며 대표적 친일파였던 CIC 특무대장 김창룡이 학살의 주도적인 역할을 했다. 보도연맹 학살은 국군특무대와 헌병대 그리고 서북청년단 등 우익 민간폭력집단에 의해 주로 진행되었다. 동시다발적이고 조직적인 학살에 많게는 50만명 이상의 민간인이 살해되었다. 정부는 체제의 우월성을 과시하기 위해, 또한 좌익 출신 전향자나 남로당을 감시하고 와해시킬 목적으로 전향자들을 보도연맹에 가입시켰다. 문제는 지역별 할당제가 있어 무리하게 숫자를 확보하게되는데, 고무신, 쌀, 비료 등을 주고 할당 채워 가입시킨 양민, 학생들이 절대 다수를 차지하였다는 점이다. 하지만 전쟁이 터져 도망가면서 후방의 안전을 도모한다는 명분하에 이 사람들을 모조리 처형한 대학살 사건이다. 대한민국 정부의 민간인 학살이 국제적으로 비난의 대상이 되었고 심지어 미국까지 민간인을 죽이지 말라고 경고하기에 이르자 그제서야 이승만이 보도연맹 학살 중지 명령을 내렸지만, 이미 수 십 만명이 떼죽음을 당한 상황. 지금도 얼마나, 어디서, 어떻게 죽었는지 아무도 모른다. 머나먼 과거사 청산 진실 화해를 위한 과거사 정리위원회가 보도연맹사건 같은 학살사건의 증거 등을 어렵게 모아서 오늘날 여러가지 진상규명을 밝혀내었으나, 문제는 여전히 남아있다. 그 이유는 모범적인 과거사 청산 모델로 인정받는 남아공의 진실과 화해위원회(TRC)를 모델로 하여 진상조사를 통한 과거사 청산을 진행해온 이전의 참여정부에서 보수주의 정부인 이명박 정부가 바뀌어 들어서면서 정부가 국가범죄 희생자들에 대한 피해보상은 물론이고 최소한의 유가족들에게 사과마저 제대로 하지 않기 때문이다.-. 한국 전쟁 당시 뒤통수 갑.JPG / 이승만 악마같은 색히 (미국이 기밀 해제한 보도연맹 양민학살 사진) -. 보도연맹의 정체를 증언한다. ← 국방부 관점에서의 기록 -. “과거사법 개정하라” 시위 나선 보도연맹 피해자 유족들 (2015.01.03) |
■ 제주 4 · 3 사건 토벌대(진압군)의 학살 4.3사건 유해 발굴현장 - 2018 |
-. 나무위키의 4.3사건 <-- 가장 자세히 기술되어 있다. -. 4.3사건의 도화선 3.1 발포사건 ('19금'으로 분류된 역사, 그럼에도 말해야 한다 - Ohmynews) -. 누가 그들을 폭도로 몰았나 (사진 기록으로 짚어보는 제주4·3의 역사…) - 한겨레 2018.03.19 -. 끝나지 않은 그날의 역사, 4.3사건 - 정치데이트 기획기사. 4.3 70주년 "제주에 봄이 오고 있다" - 제주도민일보 2018.4.3 / <문재인대통령 4.3희생자 추념사>
평안도 출신 월남자들이 모인 영락교회는 서북청년단의 가장 중요한 근거지였다.... -. 기독교, 4.3 학살에 참여한 역사 반성해야 (CBS노컷뉴스 2018.04.03) 제주 4.3사건과 여순반란사건에 대해 제주 4.3 사건이란 1948년 4월 3일날 제주도에서 남노당(남조선 노동당)이 주도하여 일으킨 폭동? 이다. 사건의 발단은 1948년 유엔에서 선거 가능지역에서 총선을 결정하고 남한에서만 5.10 총선거를 실시하게 된다. 이것에 반발하여 남한에 거주하던 좌익계열 일부가 제주도에 침투하여 주민들을 선동하여 폭동을 일으키게 된다. 여기서 정부는 공산당으로 몰아 제주 주민들을 무차별 공격? 하게 되고 수많은 민간인 사상자가 발생한다. 이에 반발하여 제주 주민들과 극히 소수의 좌익계열이 연합하여 소동을 일으켰고, 이를 진압하기 위해서 정부에서는 공산당이라면 치를 떠는 서북청년단을 파견하여 무차별 진압을 감행한다. 이 과정에서 소동은 더욱 증폭되게 되고 도저히 진압할 수 없는 사태에 이르자, 정부는 제주도 주변 가장 가까운 군부대 파견을 결정하게되고 바로 여수 순천에 있던 부대를 제주도에 파병하려 하였으나, 여수 순천 부대내의 좌익세력과, 또 여수 순천의 지역적 특성상 제주도가 고향인 장정들이 많았다. 즉 이말은 자신의 부모 형제와 싸우로 가는 격이 됨으로 이에 반발하여 10.29일날 반란?? 을 이르켜 여수와 순천 전라남도 일부지역을 장악 했던 사건이다. 이사건을 여수 순천 10,29 사건 이라고도 한다 |
■ 여순 반란사건 진압군에 의해 여수서국민학교 교정으로 끌려 나온 시민들. 가운데 선을 경계로 한 쪽은 다 처형되고 다른 쪽은 살아 남는다. -. 이 방송에 대한 월간조선의 비평과 그에 대한 MBC 제작진의 반박 |
1948년 10월 19일 밤, 제주도로 반란 진압의 출동 명령을 받고 승선 대기 중이던 14연대 일부 좌익분자들은 장교들을 죽이고 반란을 일으켰다. 사병들과 인간 관계가 좋았던 연대 인사계 지창수 상사가 주도해서 반란의 불길을 일으켰으나 곧 뒤에 숨어있던 좌익 장교 김지회 중위가 전면에 나서 반란을 지휘했다. 두 명의 장교와 좌익 부사관들 40여명이 일으킨 반란 사건은 300여 명이 사살되고 2,000여명이 투항하여 일단 진압되었다. 두목 김지회와 홍순석등의 좌익 장교들과 하사관들은 700명의 잔당을 이끌고 지리산으로 도주했다. 김지회와 홍순석이 지휘하는 반란 부대는 지리산으로 잠적 후 추적하는 군경들과 싸우며 도망다녔다. 두 장교 출신 수괴들은 6개월 뒤에 토벌대에 포착되어 사살당했다. 그러나 14연대 반란병들중에서 주도적인 위치에 있던 몇몇 하사관들은 공비 부대의 간부들로 변신해서 휴전의 시점을 지나서까지 긴 세월동안 반란군 공비 부대를 이끌며 군과 민간에 막대한 피해를 주었다. 반란을 주도한 연대 하사관 그룹에는 지창수와, 이영회, 송관일, 김흥복등이 있었다. 주동자 지 창수만 반란 직후 행불이 되고 나머지는 모두 공비 두목으로 변신하여 대활약을 하였다. 그들은 반란으로 준 피해를 준 것보다도 공비 활동으로 몇 배나 더 큰 피해를 대한민국에게 주었다. 반란군 출신 공비 두목들은 모두 군경의 손에 의해서 최후를 맞았지만 군사 훈련을 받은 그들의 전투 지휘력은 공비들 중에서도 단연 뛰어났다. 비록 후퇴하지 못하고 지리산으로 들어온 북한의 정예 4사단이나 6사단의 북한 정규군 잔당들도 있었지만 이들은 이들 반란군 출신처럼 끝까지 버티어 내지 못하고 일찌감치 토멸되었다. 한때 1만 명의 공비들이 우글거리던 지리산 공비들도 여러 번의 군의 대규모 토벌 작전과 경찰의 추격전으로 휴전 무렵에는 1,000여 명이 남아 있었다.[일설에는 600명] 그리고 3년 뒤인 1956년에는 단지 60여 명만이 산야를 떠돌며 목숨을 이어갈뿐이었다. 1963년 11월 최후의 공비이자 여자였던 정순덕이 체포됨으로서 남한의 공비 준동은 끝을 맺었다. -. 최강 공비 이영회의 최후 <1>, <2>, <3>, <4>, <5> 지리산 최강 공비부대장으로서 군경민에게 최대 경계인물이었던 여순 14연대 반란병 출신 이영회의 최후를 자세히 기술한 글이다. 군경의 토벌에 밀린 이영회는 지리산에서 먼 경남 의령 경찰서를 기습하고 돌아가던 길에 겹겹히 쳐진 경찰 토벌대 매복선에 걸려 비참한 최후를 당한다. 죽을때 그는 살해한 의령경찰서장 박영동씨의 점퍼와 시계를 차고 있었다. 아울러서 전투 경찰사 최초로 그의 실제 나이, 출생지, 그리고 그가 여순 14연대 반란 사건의 주모자 지창수와 같은 일본군 지원병 출신임도 밝힌다. 토벌의 가혹한 서슬을 피해 살아남은 애인 이영순의 일화도 소개한다. [Bemil] -. 지리산계곡의 까마귀 (여순반란사건의 주모자 김지회와 비운의 여인 조경순 이야기) -. 여순사건의 어느 교장 '송욱' -. 여순 14연대 반란 사건 - 라이프지 사진첩 / 이경모사진집 (격동기의 현장) / -. 여순사건으로 본 박정희의 역활. 박정희대통령도 그 당시에 여수연대에 중위로 있었다. 박정희는 여순사건 배후로 지목되서 김창용에게 체포되지만 군대내 좌익군인 명단(자신이 포섭한 군인들 포함)을 남김없이 불고 자신은 같은 만주군맥의 선배인 백선엽에게 구걸해서 겨우 살아남았다.. 이 여수 순천 반란 사건은 죽었다 다시 살아난 부활급 존재 박정희를 만들고 우리 해병대 창설 배경이 되었다. |
-. 북한인권시민연합
아! 6.25 (Posted by Koreanwar60) 국방부 6.25전쟁 60주년 기념 사업단 아! 6.25 전시회 현장의 생생한 모습 웹툰 6.25 이야기 - 환쟁이의 블로그 | ||||||||||||||||||||||||||||||||||||||||||||||||||||||||||||||||||||||
1부 남침과 낙동강 방어 01. 비극을 알리는 신호 '폭풍' 02. 준비된 도발 03. 3일만에 능욕당한 서울 04. 대한민국을 구한 춘천대첩 05. 수뇌부의 무능 그리고 한강교 06. 서울에서 지체한 북한군 07. 위기에서 빛난 해군의 용전분투 08. 맨주먹으로 막아낸 하늘 09. 침략자의 실책 10. 예상보다 빨랐던 미국의 참전 11. 스미스부대의 붕괴 12. 어둠속에서 빛을 발한 승전보 13. 미 제24사단의 굴욕 14. 제17연대의 복수전 (화령장전투) 15. 그냥 내어준 호남평야 16. 누가 빠른가? 17. 동해안의 지연전 18. 맥아더의 의지 19. 최후의 선택 낙동강 20. 북한군의 기도 21. 북한군의 8월공세 22. 기회로 승화시킨 위기 23. 포항에서의 일진일퇴 24. 피로 지킨 다부동 25. 그해 9월의 마지막 혈전 26. 부산을 향한 마지막 발악 북한군 최대 남침선 1, 2, 3 대 대통령 이승만(李承晩 1875.3. 26.~1965.7.19.) 호는 우남(雩南), 본관은 전주. 황해남도 평산군 출신. 대한제국 시대에는 협성회 회보와 독립신문 주필, 교육계몽운동 등으로는 독립협회 활동 등을 하였다. 대한제국 말기 도미. 프린스턴대학교 대학원에서 국제정치학 박사학위를 받고 이후 하와이에서 한인학원과 한인학교 등을 운영하였다. 일제 강점기에는 독립운동 방법을 놓고 의견이 갈라섰을 때 그는 국내의 사정을 외국에 알리고 양해를 구하는 외교독립론을 주장하였다. 특히 1919년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초대 대통령이었으나 국제 연맹에 위임통치를 건의 한 것을 계기로, 임시의정원에 의해 탄핵·파면되었다. 주로 미국에서 외교 중심의 독립운동을 벌였다. 일제 강점기 중반에는 스위스 등을 상대로 조선의 독립을 호소하는 한편 일본의 미국 침략을 경고하였으며 태평양 전쟁 이후 미군 OSS와 임시정부 간의 연결을 주선하였다. 일제 강점기 말기에는 미국 체신청에서 발행한 태극기 모양 우표 발행에 크게 기여했으며, 항일 단파 라디오 방송 연설 등에도 참여하였다. 1945년 해방 후 조선인민공화국의 주석에 추대되었으나, 귀국 후 거절하였다. 1945년 12월부터는 김구·조소앙·김성수 등과 함께 신탁통치 반대운동을 주관하였으며 정부수립 방법으로는 남한단독정부 수립을 지지,추진하였다. 대한민국 초대 대한민국의 국회의장, 대한민국의 초대·2·3대 대통령을 역임하였다. 철저한 친미·반공주의자로 공산주의를 분쇄하는 데 앞장서 대한민국 건국의 기초를 다졌으며, 공공연히 북진발언을 하기도 했다. 6·25전쟁중 1952년 부산의 국회에서 재선이 어렵게 되자 헌법을 대통령직선제로 개정하여(이른바 발췌개헌) 제2대 대통령에 재선되었다. 1953년 미국의 전쟁처리 방식에 반발, 국제연합(UN)군의 동의 없이 반공포로를 석방함으로써 세계를 놀라게 하기도 했다. 1954년의 사사오입 개헌(초대 대통령에 한해서 중임 제한 철폐)으로 1960년 4대 정·부통령 선거에 연임하였다. 그러나 3.15 부정선거(이기붕을 부통령으로 당선시킴)를 계기로 일어난 4·19 혁명 직후 부정선거의 책임을 지고 대통령직에 하야하고, 미국 하와이로 망명하였다. 망명생활 중 사망했으며 유해는 국립묘지에 안장되었다. (참고: 자유당 최후의 국무회의 비록) [백년전쟁 Part 1] 두 얼굴의 이승만 ▶ [Live] 1:1 토론 - 백년전쟁과 이승만의 진실 2013.06.24 ▶ [KBS 대한민국을 움직인 사람들] 초대대통령 이승만(YouTube) ▶ 뉴라이트의 대표주자 [시대정신]이 『백년전쟁』에 대한 반박 영상 [생명의 길] 제1부 - 이승만시대 제 1편 "인격살인은 국사가 아니다" 이승만前대통령 재평가 논란 - 뉴라이트 Vs 한국일보 서화숙기자 ● 국적 일본? 이승만 대통령 징집카드 국적논란 [Etorrent] |
북한군은 "선제 타격 전략"으로 불리는 전쟁 개시 작전계획에 따라, 1950년 6월 25일 새벽 4시에 인민군은 242대의 전차를 앞세우고 38선을 넘어 옹진 · 개성 · 동두천 · 춘천 · 인악(仁岳) 등지의 육로와, 동해안을 돌아 삼척(三陟) · 임원진(臨院津) 등지에 상륙하여 일제히 공격해 왔다. 북한군 3경비여단과 6사단 소속의 14연대를 동원해 옹진반도에 배치된 한국군 17연대를 공격하였고, 북한군 6사단과 1사단은 한국군 제1사단을(개성 문산 지구), 북한군 4사단과 3사단은 한국군 제7사단을(의정부 지구), 북한군 2사단과 12사단은 한국군 6사단을(춘천 지구), 북한군 5사단은 12사이드카연대를 배속받아 한국군 8사단(강릉 지구)을 밀어붙였다. 단 한 대의 전차도 없는 무방비 상태에서 공격을 당한 한국군은 전반적으로 북한군에게 밀려 후퇴하였다. 한국군은 즉각 주말 외출 중인 장병들을 전원 귀대시키고 후방 사단들로부터 5개 연대를 일선에 급파하였으나 26일에 옹진반도의 한국군 17연대는 할 수 없이 철수했고, 치열한 공방전(攻防戰) 끝에 의정부가 적의 수중에 들어갔으며, 27일 저녁에는 서울 동북방 미아리 고지를 방어하는 한국군 제5사단 및 제7사단의 진중에 적이 침투하여 피차 적을 분간할 수 없는 육박전이 벌어졌다.이 혼란 중에 적 전차부대의 일부는 이미 서울 시내에 침입했으며, 정부는 대전으로 후퇴했다. 28일 새벽 3시 한강 인도교가 예정시간보다 앞서 폭파되고, 한강 이북의 한국군은 총퇴각을 감행해, 북한군 전투기가 상공을 나는 가운데 도하작전(渡河作戰)을 전개하여 전원 철수하니 28일에는 수도 서울이 적에게 완전 함락되었다. 육군본부는 수원으로 후퇴하고 도강한 한국군 부대들은 통합재편되어 한강 남안에 방어선을 구축했다. ■ 다시쓰는 6.25전쟁 [유용원의 군사세계 김병륜기자] 전쟁이 시작된 것은 새벽 4시였지만 이것이 전쟁이라는 것을 우리가 제대로 인식한 것은 6시간이 지난 오전 10시였다. 실제로나 심리적인 측면에서나 그야말로 북한군의 완전한 기습이었다. ■ 참담하고도 무모했던 반격작전 [1] [2] [3] (채병덕 총참모장 2, 7사단장에 역습을 명령. 1950.6.26) 전반적인 전황을 고려하지 못한(후방에 충분한 기동 예비전력이 확보되지 않는 등) 채병덕 총참모장의 반격작전은 전선에 크나큰 파국을 불러 일으키고 결국 6월 28일, 개전 3일 만에 수도 서울이 함락되는 결과로 이어지고 말았습니다. -. 의정부전투의 축차투입 명령자는 이형근 2사단장 이형근 2사단장의 6.25 첫날 밤 상황인식 -. 이형근 장군은 정말 6.25 첫날 한강 방어를 주장했을까? -. 6.25 전쟁 첫날 이형근 장군의 호언장담 -. 북한군이 서울에서 3일간 지체한 사연은 한강다리 때문에 멈추었나? <상> <중> <하> -. 6.25 초기, 전투 없이 내어준 최후저항선 축석령 -. 포병학교 57밀리 대전차포 소대의 초전 3일 - 포병학교 교관 조주태 중위 <내가 달려온 세월 80년> ○ 육군본부의 대응
■ 미스테리 속에 숨어있는 그시절의 자화상<상> <하> 1950년 6월 24일 0시를 기해 내려진 비상경계령 해제의 연유는? - 군번 제1호로 유명한 이형근(李亨根) 예비역대장은 1993년 출간한 회고록에서 이른바 ‘6·25전쟁 초기의 10대 미스터리’라는 제목의 글을 남겼다. 이형근(당시 2사단장-대전에 위치) 회고록 6.25 첫날 기록의 허구 -. 6.25 전쟁 관련 이상한점들... 장병의 절반이 휴가나 외출... -. 한국전쟁 발발 직후 일어난 일들...(오늘의 유머)
6월 28일, 서울에 나타난 이전부터 38선 부근에서의 소규모 충돌이 많았기 때문에 대한민국 국민들은 많이 놀라지 않았으나, 잠시 뒤 군용차가 거리를 질주하고 "3군 장병들은 빨리 원대로 복귀하라"는 마이크 소리가 요란해지면서 조금씩 동요하기 시작했지만 무슨 일인지 알 길은 없었다. 오전 7시가 넘어서야 방송은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군이 침공해 왔다는 소식만 간단히 전하고 "장병들은 누구를 막론하고 빨리 원대복귀하라"는 공지방송만 반복하고 있었다. 1950년 6월 26일 밤 10시 반경 이승만은 도쿄에 있는 미국 극동군 사령관 맥아더에게 전화를 걸어 도움을 요청하였다. 이승만은 라디오 연설로 서울시민은 정부를 믿고 동요하지 말라는 방송을 통해, 서울 시민들이 서울 안에 그대로 머무르도록 독려한 반면 그 자신은 방송 진행 중에 각료들과 함께 6월 27일 새벽 2시에 서울 시민들을 버리고 대전행 특별 열차를 타고 대전으로 피신하였다. 6월 27일 새벽 4시에 열린 비상 국무회의에서 정부의 수원 천도가 정식으로 의결되었다. 이날 아침 6시에 서울중앙방송은 수원 천도 소식을 전했으나, 이를 취소하라는 압력으로 취소 방송이 있었다. 이승만은 대전에서 사흘을 머무른 뒤, 7월 1일 새벽에 열차편으로 대전을 떠나 이리에 도착하였다. 7월 2일에는 다시 목포에 도착하였고, 배편으로 부산으로 옮긴 뒤 7월 9일 대구로 옮겨갔다. 서울 시민들이 전혀 모르고 있던 상황에서 인민군들이 미아리 고개까지 쳐들어 오자 그 때서야 서울 시민들은 대피하기 시작했다. (위키피디아)
■ 한강인도교 폭파사건 -. 한강교 조기 폭파 명령자는 국무총리 겸 국방장관 신성모 -. 한강철교는 알고있다(August) <1> <2> <3> <4> <5> <6> <7> <8>
첫번째 : 이승만의 한강다리 폭파 관련해서 자주 올라오는 이 사진은 사실은 '대동강철교' 사진이다. 두번째, 세번째 : 한강대교(인도교) 사진으로 당시 한강에서 유일하게 걸어서 건널 수 있는 다리였다. 네번째 : B-29의 한강 철교 폭격 모습이며 우측에 이미 끊어진 한강인도교가 보인다. 우측 위의 사진은 1952년 폭파된 한강철교의 재개통식에 참석한 이승만 북한군의 추격을 우려한 이승만 정부는 남쪽으로 피신하며 한강에 단 하나뿐인 인도교였던 한강 인도교를 아무런 예고도 없이 폭파, 50대 이상의 차량이 강에 빠지고 강을 건너 남으로 피난하던 최소 500명의 피난민들이 일거에 폭사하는 대 참사를 저지르고 만다. 또한 이 일로 서울에 살고 있던 약 144만 명 중 겨우 서울을 빠져나간 40만 명 이외 100만 명 이상의 시민들이 북한군의 통치 체제 아래 심각한 고통을 겪도록 방치되었다. 이는 정부의 무책임함에 대해 큰 불신을 불러일으켰을 뿐만 아니라 3개월 뒤인 서울 수복 이후 서울로 다시 돌아온 사람들과 현지에 남아 고통을 당했던 이들 사이에 심각한 갈등을 불러일으키는 불씨가 되기도 했다.(more) 한국전쟁 발발 사흘만인 1950년 6월28일 새벽, 유일하게 한강을 걸어서 건널 수 있는 다리인 인도교(현 한강대교)가 폭파됐다. 다리를 건너던 4천여명 중 800여명이 그 자리에서 숨졌다. '서울 사수(死守)'를 약속한 이승만 대통령과 정부가 6월27일 새벽 대전으로 떠난 뒤였다. 서울을 지키던 채병덕 참모총장이 인민군의 남하를 늦추겠다며 다리 폭파를 결정했고 한강 인도교와 철교에 TNT를 설치하게 했다. 뒤늦게 김백일 참모부장이 폭파를 미루라고 지시했지만 이는 현장에 전달되지 못했다. 인도교 폭파는 국민의 생명을 해친 것은 물론이고 작전으로도 실패했다. 6∼8시간 후 한강 북쪽에 도착한 인민군은 폭약 불발로 완전히 파괴되지 않은 경부선 철교와 경인선 철교를 이용해 한강을 건넜기 때문. 한강 이북에서 인민군과 전투를 하고 있던 국군 3개 사단은 인도교 폭파 소식에 당황해 무너졌고, 무기와 장비를 고스란히 인민군에 내줬다. 일본 육상자위대 간부학교의 육군전사연구보급회는 "한국군 주력부대는 조기에 퇴로를 차단당한 탓에 믿을 수 없을 만큼 빨리 무너졌다"고 분석했다. 정부는 비판이 대두하자 9월21일 폭파를 실행한 최창식 공병감을 '적전비행(敵前非行)죄'로 처형했다. 하지만 최 공병감은 1964년 재심에서 무죄를 선고받았다. 정부는 서울 수복 후 인도교 폭파를 사과하기는커녕 피하지 못한 이들을 '부역자'로 몰아 처벌했다. 법원은 2013년 5월 납북자 가족들이 국가를 상대로 낸 소송에서 한강 인도교 폭파를 고의나 과실에 의한 위법행위로 볼 수 없다고 판단했다. 위령비는 세워지지 않았고, 민간단체가 2007년부터 진혼제를 열고 있을 뿐이다. (출처 : <역사속 오늘> 한강 인도교 폭파, 인민군은 막지 못한 채…) ■ 1950년 6월 북한군의 전면 공세 이후 대통령 이승만이 서울을 버리던 무렵의 신문 1면들 (경향신문 20140526. 세월호의 악마들, 대한민국의 악마들)
1950년 6월27일치 <동아일보>와 <경향신문>, 28일치<조선일보> 1면 조선일보 “김일성 장군 만세” 1950년 6월28일 호외 / 조선일보의 흑역사 -. 1950년 춘천 전투 참전 중대장의 수기 <1> <2> <3> <4> [울프독] -. 백두산함의 대한해협 해전 (1950.6.25) -. 어둠을 밝힌 용전분투, 대한해협전투 (웹툰) -. 홍천 말고개에서 6사단의 북 전차 섬멸전 [울프독]
-. 전쟁 초기 부하들 곁을 세 번 떠난 연대장 - 결국은 지뢰사고로 전사 -. 시흥지구 전투사령관 김홍일 소장 -. 대한민국을 수호한 혈전, 춘천전투 <1> <2> <3> ○ 스미스 부대(Task Force Smith), 미군의 패배 경부철도로 투입되는 스미스 부대 지휘관이었던 찰스 스미스 중령의 이름을 따서 '스미스 부대 (Task Force Smith)'로 잘 알려져 있는 미 육군 제 24사단 21연대는 한국에 투입된 최초의 미군으로, 한강 방어선을 돌파해 물밀듯이 내려오고 있는 북한군의 진격을 저지하는 중요한 임무를 맡았다. 7월 1일 부산항에 도착 후, 최초의 전투는 7월 5일 오산 북쪽의 고개인 죽미령에서 벌어진 '오산 전투'였는데, 긴급 파견된 부대였던 스미스 부대는 규모부터 불과 1개 대대의 소수였을 뿐 아니라, 북한군의 T-34 중전차와 같은 기갑부대의 공격을 막아낼 만한 중화기도 충분치 않았다. 그러나 미국은 스미스 부대가 '한반도의 미국 지상군' 이라는 정치적 위세를 발휘해 북한군의 대처가 자못 소극적이기를 바랬던 점도 기대했었다. 하지만 예상은 빗나갔고 스미스 부대는 용감히 싸웠으나 약 10일 정도의 시간을 벌었을 뿐 결국 북한군 10개 정예사단의 전면 공격에 무참히 유린되고 말았다. 미국 극동군은 스미스 부대의 패전을 만회하기 위해 딘 소장이 이끄는 미 육군 24사단을 대전에 투입, 추가로 북한군의 남진을 저지할 계획을 세운다. 그러나 제 24사단은 사단의 편제를 갖추었음에도 불구하고 역시 T-34 중전차의 돌파 공격을 제대로 막아낼 능력이 없었다. 수적으로도 열세였던 미 육군 24사단은 스미스 부대와 별다른 차이도 없이 처참하게 패배했으며, 사단장인 딘 소장은 무질서한 패주 과정에서 북한군에게 포로로 잡혀, 미군은 장성급 사관이 포로가 되는 큰 치욕마저 겪게 된다. (more) -. 북 소대장이 겪은 오산 죽미령 전투 <1>, <2>, <3>, <4>, <5>, <6>, <7>, <8> 1950년 7월 5일 북한 침략 열흘 뒤에 오산 죽미령에서 남진하는 북한군과 일본에서 급파된 미군사이에 전투가 있었다. 미군과 북한군의 최초 전투인 이 전투에서 미군은 대패하였다. 그 이유가 있었다. 미군이 훈련도 제대로 안 된 두 개 보병 중대와 한개 포대 500명의 병력을 배치한 방어선에 북한군 1개 전차 연대의 전차 30여량이 돌격해왔고 이어서 다섯배가 넘는 3,000여명의 북한군 최강 4사단 18연대가 공격해왔었던 것이 그 대패의 이유였다. 이 전투는 엄밀히 말하면 해서는 안되는 전투였었다. 그러나 미군은 다급한 상황에서 어쩔 수없이 실행했다가 큰 피해를 입은 전투였다. 이 전투에서 105 전차 사단 유경수는 자기 식의 전차만의 돌격을 했지만 미군들은 붕괴되지 않았었다. 그러나 결국은 무질서하게 패주하게 되었던 이유들이 있었다. 과소 병력의 투입의 문제에 대전차 대책이 거의 없었다. 2.36인치 로켓포는 효과가 전혀 없었으며 76mm는 불량탄이라 포탄이 없는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후방 포병과 전방 보병과의 전화선이 절단되어서 결정적인 때 포병들은 침묵했었다. [전화선을 이중으로 깔았어야 하는데 --] 4.2 inch 관측병은 지근탄에 맞아 정신이 나가 아무 역할을 하지 못했다. -. 무비유환(無備有患)의 대표적 전투, 오산전투 (1950.7) ○ 피로 피를 씻었던 낙동강 전투, 정체되는 북한군의 진격 자유 대한민국의 최후의 보루, 부산 교두보 작전. 파란색 선이 일명 '낙동강 방어선'입니다 한국군과 미군이 혼란에 빠져 있는 사이, 북한군은 남진을 계속했으며 최후의 보루인 부산으로 가는 마지막 지리적 장애물인 낙동강에 이르렀다. 한국 정부는 7월 2일에는 이미 목포에 도착해 있었으며, 배편으로 부산으로 이동, 부산을 임시 수도로 정했다. 당시 내무부 장관이었던 조병옥 장관(과거 故 노무현 전 대통령의 탄핵을 주도했던 조순형 의원의 부친)은 정부가 부산으로 이동했음에도 대구에 남아 방어전을 진두지휘, 대구를 지켜내는 데 큰 기여를 한다. 이러한 대구와 더불어 낙동강은 더 이상 물러날 수 없는 마지막 방어선이었으며, 한국군은 수많은 자원병과 학생으로 구성된 학도병들까지 전선에 투입, 북한의 정예 사단병력에 맞서 엄청난 양의 피를 흘리며 인천 상륙작전이 이루어지기 전까지 낙동강 방어선을 거의 3개월 간이나 지켜낸다. (more)
국군이 낙동강 전선으로 퇴각하던 암울한 시기, 1950.7.17일과 7.20일 양일간 경북 상주군 화령장 인근 상곡리와 동관리에서 아군 17연대가 적 15사단을 격파한 대첩.
-. 전멸한 북 싸이카부대 -. 포항의 학도병들 (웹툰) - 영화 '포화속으로'의 무대 ● 노근리, 미군의 양민학살 - 1950년 7월에 충북 영동군 황간면 노근리 철교 밑에서 미군이 한국인 양민 300여 명을 학살한 사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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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천 상륙작전과 부산 교두보 전투의 연계를 보여주는 지도
소집된 국민방위군 한국전쟁중 1951년 1월 1·4 후퇴때 제2국민병으로 편성된 국민방위군 고위 장교들이 국고금과 군수물자를 부정처분하여 착복함으로써 12월~2월 사이에 국민방위군으로 징집된 이들 가운데 아사자, 동사자가 약 9만에서 12만여 명에 이르렀던 사건을 말한다. 신성모 1951년 봄이 돼서야 이 사건이 국회(당시 부산)에서 폭로되어 드러남으로써, 이 사건으로 신성모(申性模) 국방부 장관이 물러났다. 국민방위군 사건이 진상규명되는 과정에서 국방장관 신성모를 비롯한 이승만 정권에 의해 진상규명이 방해받는 것을 지켜보았던 부통령 이시영(李始榮)은 제1공화국 정부에 크게 실망감을 느껴 이에 반발하여 사표를 제출하였다. 또한 야당 내에서 이승만에게 호의적이었던 한민당과 민국당계 인사 조병옥, 윤보선, 김성수 등이 이승만 정권에 등을 돌리게 된다. 참고 : 국민방위군사건(나무위키) "인간을, 포로도 아닌 동포를, 이렇게 처참하게 학대할 수 있을까 싶었다. 6.25전쟁의 죄악사에서 으뜸가는 인간 말살 행위였다. 이승만 정권과 그 지배적 인간들, 그 체제 그 이념의 적나라한 증거였다. 얼마나 많은 아버지가, 형제와 오빠가, 아들이 죽어갔는지... 단테의 연옥과 불교의 지옥도 그럴 수 없었다. 단테나 석가나 예수가 한국의 1951년 겨울의 참상을 보았더라면 그들의 지옥을 차라리 천국이라고 수정했을지도 모를 일이었다." - 故 리영희 ● 더민주 박정, '국민방위군 사건' 진상규명 특별법 발의[2016.09.05] 박정 더불어민주당 의원은 이날 오전 국회 정론관에서 기자회견을 열고 '국민방위군 사건 진상규명 및 명예회복에 관한 특별법을 대표발의했다고 밝혔다. 국민방위군은 6 ·25전쟁 개전 이후 중국 인민해방군의 개입으로 전황이 어려워지자 조직된 군사조직으로, 관련기록에 따르면 약 68만명이 편성된 것으로 알려졌다. 그러나 일부 지휘부의 부정 ·부패로 보급이 원활이 진행되지 않아 수만~수십만에 이르는 사상자를 내 한국 현대사의 아킬레스건으로 꼽혀왔다. 당시 국민적 분노가 커지자 이승만 정부는 사령관이자 국방부장관의 사위인 김윤근 등 5명을 사형에 처했지만, 관련 피해자 규모나 전후관계는 미궁속에 빠져있는 상황이다. 한국전쟁 일자별 전선 |
○ 인천 상륙작전 (1950.9.15), 그리고 서울 수복 인천에 상륙하는 미 해병들 북한군이 낙동강에서 강력한 저항에 맞부딪혀 고전하고 있을 때, 맥아더 장군이 이끄는 유엔군이 인천에 상륙하게 된다. 이 상륙 작전은 세계 최대의 조수간만의 차를 자랑하는 인천항에 이루어지게 되는 것으로 대병력을 큰 위험에 노출시킨다 하여 입안 단계에서부터 많은 반대에 부딪혔으나, 이 점이 오히려 적의 허를 찌르는 것이라는 맥아더 장군의 주장이 결국 관철되어 이루어질 수 있었다. 상륙 전에는 미국 전함 미주리호가 동해안의 삼척을 16인치 주포로 포격하였고, 서해안 최적의 상륙지점으로 알려진 군산에도 강력한 함포사격을 가해 북한군의 주의를 분산시켰다. 낙동강 전선에서 한창 전투가 벌어지고 있던 9월 15일, 206척의 함대와 약 7만 명의 병력이 동원된 상륙함대가 인천에 쇄도, 최초로 상륙한 미 제 5 해병연대가 2시간 만에 월미도를 점령하는 데 성공한다. 초전에 성공적으로 북한군을 제압한 유엔군은 곧이어 한국군 제 17연대, 미 육군 제 7사단, 제 1 해병사단을 주축으로 한 주 침공부대를 양륙시켜 북한군 제 18사단의 방어를 분쇄하고 인천을 장악하는 데 성공한다. 인천 상륙작전의 성공으로 낙동강 방어선과 전라도 등 한반도의 남쪽 지역으로 깊숙히 진격해 있던 북한군에게 큰 위기가 찾아오게 된다. 전투가 큰 진척이 없는 상태에서 길게 늘어진 보급선의 측면에 날카로운 칼날이 들이대어진 셈이기 때문이다. 주력 침공부대인 북한군의 정예병력은 이처럼 보급이 끊긴 채 앞뒤로 포위 섬멸될 수 있는 위기를 맞았고, 결국 북쪽으로 퇴각을 시작하게 된다. 인천을 점령한 유엔군은 경인가도를 내달려 서울에 도착, 북한군 수비부대와의 치열한 시가전을 뚫고 결국 9월 28일 서울 탈환에 성공합니다. (9.28 서울 수복) 인천 상륙작전이 개시된 지 약 2주일 만의 일이었다. 유엔군은 달아나는 북한군을 계속 추격했으며, 오히려 10월 1일에는 38도선을 넘어 북쪽으로 진격해 올라가게 되었다. (10.1 국군의 날)
-. 한국 해병대 최초로 펼쳐진 단독 상륙작전, 통영상륙작전 이야기 (1950.8.17) 북한군들은 모두 상륙 지점 반대편 동굴로 도망가서 숨어있어서 초기 저항은 거의 없었다. 해병 17명이 단지 부상만을 입었을 뿐이었다. 굴에 숨어있던 북한군들은 화염방사 전차에 의해서 모두 소살되었다. 북한은 이 월미도 전투를 무지하게 뻥튀기해서 선전하고 영화도 만들었지만 실상은 보시는바와 같이 그들의 저항은 꼴불견이었다. 월미도는 일본인의 유원지였기때문에 이렇게 일본식 가옥들이 보이고 간조가 되어 수영을 못하게 될경우에 사용할 수있는 수영장도 있었다. 이 수영장은 포로 수용소로 활용되었었다.
□ 인천상륙작전에서 적의 퇴로를 차단한 것은 실패라고 알고있습니다, 인천에서 서울까지 무려 13일 이상 진격하면서, 낙동강에 있던 적의 주력이 퇴각한 이후에 서울 인천을 방어한 북한 18사단도 퇴각한 것으로 알고있는데, 그 퇴각한 주력이 다시 중공군과 같이 밀고 내려온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일명1.4후퇴. ▣ USMC(United States Marins Corps) in the Korean War (인천상륙작전 당시 미해병 사진) -. 9ㆍ28 서울수복과 전선 절도 사건, 6.25 동란 중 발생한 “경찰관 의 銅線 절도 사건 ○ 서울 수복, 그리고 북진 1950년 9월 28일, 수도 서울은 인천을 점령한 미군은 북진을 시작했다. 해병대 2대대 6중대 1소대는 27일 새벽 서울 중앙청에 태극기를 걸었으며, 28일에는 서울 전역이 수복됐다. 29일 중앙청에는 ‘환도식’이 거행됐다. 당시 유엔군총사령부는 38선 이북으로의 진격을 하지 말라는 명령을 하달했다. 그러나 이승만은 육군참모총장 정일권을 시켜 북진을 하게 했다. 10월 1일 제3사단 23연대가 강원도 양양에서 38선을 넘어 북진했다. 이후 56년 이 날이 ‘국군의 날’로 제정됐다. 같은 날 맥아더는 북한에게 ‘무조건 항복’을 요구했다. 북진에 대해 중국 외상 저우언라이는 “중국 인민은 이웃 나라가 제국주의 국가로부터 침략을 받을 경우 가만있지 않겠다”는 경고를 했다. 그러나 미국은 이를 무시했고, 2일 맥아더는 미 8군사령관 월튼 워커를 시켜 북진을 진행했다. 저우언라이는 미군의 북진이 신생 중국에 위협이 될 것이라 판단, 스탈린에게 전문을 보내 참전 의사를 밝혔다. 그러나 스탈린은 여전히 미국과의 직접대결을 피하고 있었고, 이 때문에 저우언라이가 두 번이나 모스크바를 방문하게 됐다. 그러나 스탈린의 의사는 변하지 않았다. 스탈린이 국제프롤레타리아의 세계적 차원의 혁명을 주창하는 공산주의자라기보다는, 소련 제국주의의 이익에 복무하는 현실주의자임을 드러내는 대목이었다. 한편 북진은 계속됐다. 10월 10일 미군과 남한군은 원산을 점령했고, 19일 평양을 점령했다. 김일성은 9일부터 철수를 시작하여 12일에는 평양에서 주력을 모두 후퇴시킨 상황이었다. 당시 이승만은 김병연을 평안남도 지사로 임명하고 대한청년단 지부를 세우는 등 독자적인 움직임을 시도했다. 그러나 이것이 미군정과 미리 협의된 행동은 아니었다. 미군정 내부에서도 미 8군과 맥아더 직속부대인 10군단 사이에 통치 방식의 차이가 노출됐다. 15일 트루먼은 서태평양 웨이크 섬에서 맥아더와 북진 상황에 대한 회담을 나눴다. 이때까지만 해도 맥아더는 중국의 참전을 낮게 파악하고 있었다. 이런 혼란에도 불구하고 진격은 계속되어 25일 남한군 6사단 7연대가 압록강변의 자강도 초산군을 점령하기에 이른다. 30일에는 평양역 앞에서 이승만이 대규모 군중연설을 하기도 했다. 이러는 동안 함경도 지역의 두만강 인근도 미군, 남한군의 수중에 떨어진다. (more) ■ 38선 돌파 최고 명품 전투 -화천 지촌리 전투 <1>, <2>, <3>, <4>, <5>, <6>
-. 15연대 대전차포 소대의 영변 북방 대전차전 - 1950.10.20 1950년 6월 25일 남한을 침공했던 김일성 집단들이 유엔군의 신속한 개입과 국군의 반격에 쫓기어 38선을 넘어 도주했을 때 이들에게 큰 피해를 입었던 국민 감정은 이 침략 집단에 대한 복수의 적개심으로 가득했다. 말하자면 침략자 김일성 일당을 멸망시키고 북한 전역을 수복하자는 복수심에 불탄 국민들은 북진 통일을 외쳤다.반격에 나선 국군에게 내린 국민들의 작전 명령은 북진 통일이었으며 작전의 종결은 압록강 도착이었다. 이에 각 사단이 경쟁을 벌였는데 압록강까지 진격하여 민족이 내린 작전 명령을 그대로 달성한 부대는 두개 부대였다. 하나는 평안도 쪽에서 진격한 6사단 7연대다. 다른 하나는 함경도 쪽에서 진격한 3사단 22연대다. 6사단 7연대는 전 연대가 노획한 북한군 차량으로 쾌속 진격하여 10월 26일 평북 초산군의 압록강가에 도달하였다. 3사단 22연대는 미군 7사단에 배속되어 북진, 비교적 손 쉽게 함남 혜산진에 도달하였다. 혜산진은 초산보다 더 상류였다. 민족의 작전 명령을 달성한 두개 부대는 이를 무상의 영예로 삼아 부대명을 진격했었던 압록강 지역의 이름을 따서 명명하였다. 초산 부대[6사단 7연대]와 혜산진 연대[3사단 22연대]라는 독립 부대명이 그것들이다. 그러나 민족의 작전 명령을 수행하여 압록강으로 진격한 부대가 국군에만 있던 것은 아니었다. 대다수 국민들에게 잘 알려져 있지 않고 경찰 자체에서도 잘 모르지만 미 7사단에 배속되어 압록강 상류 혜산진까지 진격했던 전투 경찰대가 있었다. 그 비화를 소개한다. 국군이 북한군에게 밀려 낙동강까지 내려 왔을 때 같이 후퇴한 경찰들은 군부대보다도 훨씬 심한 고생을 했다. 혜산진에서 바라본 압록강 노획된 김일성 승용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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흥남 철수 당시 피난민을 태운 메러디스 빅토리호 50. 전쟁 이전 상태로의 회귀 51. 통한의 1.4후퇴 (1951.1.4) 그리고 그 앞에서 부동자세로 경청하고 있는 대한민국 육군참모총장 정일권 소장과 그의 참모들. 오른쪽에서 두번째는 강문봉. ▲유재흥(1921 충남 공주 ~ 2011.11.26) 앉아 있는 者 -. 정전협상 당시 남한측 옵저버로 참석하였으나 일본군 육사 출신이라 '한국어' 를 제대로 못알아듣는 바람에 통역을 데려감. -. 전시작전통제권 환수논의당시 성조기를 들고 앞장서서 반대운동주도 -. 당시 현리전투에서 북한군에게 포로가 되어 북송. 북한에 협력하기를 거부하고 죽도록 고생하다가 1994 년 전쟁종전 후 40 년 만에 남한으로 탈출한 조창호 소위가 유재흥에게 면담을 요구했으나 끝까지 면담거부.
한창 날리던 때와 말년의 유재흥 ..."대한민국 ‘군번 3번’인 유재흥 장군은 2대에 걸친 ‘부자 친일 장교’다. 그의 부친 유승렬씨는 일본 육사(26기)를 졸업한 뒤 태평양전쟁에 참전해 육군 대좌(대령)를 지냈다. 아버지 뒤를 이어 일본 육사(55기)를 나온 유 장군은 1943년 보병 대위 시절 이광수·최남선 등과 함께 일본 메이지대학에서 조선인 학병 지원을 촉구하는 연설을 했다. 이들 부자의 이름은 <친일인명사전>에 나란히 올라 있다.".... (경향신문 2011.11.29) |
○ 중국의 참전과 1.4 후퇴 대동강 철교를 건너는 피란민들. 1950.12.4. 이 사진으로 맥스 데스포는 퓰리처상을 수상 북진이 시작되자 중국은 발 빠르게 움직였다. 10월 8일 중국은 참전을 결정하고, 19일에는 압록강을 넘어 들어왔다. 맥아더가 트루먼에게 중국 참전 가능성이 낮다고 보고한 지 불과 4일 뒤였다. 25일 미군, 남한군은 최초로 중국군 포로를 잡았다. 이후 중국군의 대규모 공세가 시작됐다. 소련의 태도도 변했다. 북한에 대한 군사고문, 물자지원 이상의 것을 자제하고 있던 소련은 중국군이 생각보다 높은 성과를 거두자, 64항공군단을 창설해 본격적으로 전쟁에 발을 담그기 시작했다. 홍인표의 연구에 따르면, 64항공군단은 미군과의 공중전으로 1098대, 고사포로 211대를 격추시켰다. 반면 소련 측의 전투기 피해는 335대에 불과했다. 미군의 제공권 장악에 변화가 생긴 것이다. 당시 중국의 전략은 ‘인해전술’로 알려져 있다. 그러나 사실 당시 미군, 남한군의 총 전력이 42만이었던데 비해 중공, 북한군의 총 전력은 33만에 불과했다. 장비면에서도 미군 쪽이 우세했다. 그러나 중국은 ‘인해전술’로 보일 수 있는 허장성세를 적절히 구사하면서 장기간 전쟁으로 지친 미군과 남한군의 사기를 저하시켰다. 마오쩌둥도 자신의 아들 마오안잉을 전선에 투입할 정도로 열의를 보였다.(마오안잉은 11월 25일 미군의 공습으로 사망) 중국군의 다수가 국공내전에서 잔뼈가 굵은 것은 물론, 대장정, 국공합작을 통한 대일제 독립투쟁, 중국 혁명이라는 장기간의 게릴라 경험도 이점이 됐다. 11월 1일의 평안북도의 운산전투가 결정적이었다. 미군과 남한군은 중국군의 3중포위에 걸려 괴멸에 가까운 타격을 입었다. 11월 26일 개마고원에서 벌어진 장진호 전투에서도 3중포위 작전에 미군이 수천 명에 달하는 사상자를 내고 후퇴했다. 이러한 패배 끝에 서서히 미군은 후퇴하기 시작했다. 12월 1일부터 후퇴가 본격화됐고, 12월 6일에는 평양이 점령당했다. 9일에는 흥남에서 장진호에서 탈출한 미군이 물러났다. 이미 중국, 북한군이 원산을 점령하고 있었기에 이들은 배를 타고 남한으로 이동했다. 이 과정에서 배에 탑승하지 못한 피난민들로 인한 아비규환이 연출되기도 했다. 연말까지 38선 이북을 거의 수복한 중국, 북한군은 새해(1951년)들어 재차 남진했다. 제2차 남진이 시작되기 전인 50년 12월 24일, 정부는 대피령을 내렸고, 1월 3일 정부는 다시 부산으로 이동했다. 4일, 중국, 북한군은 사실상 서울에 무혈 입성했다. 7일에는 수원이 함락됐다. ■ 중국측 기록으로 본 2연대의 온정리 전투 (1950.10.25~10.29) ■ 중공군의 첫 대패 - 수동의 터널전투 (전투초반 중공군 1개사단이 장진호 입구에서 미 해병 연대에게 대패한 전투) ■ 장진호전투(1950.11.27~12.13, 미해병 1사단 3여천명 사망) 패배로만 볼 수 없다.<上> <下> 장진호 전투(長津湖戰鬪)는 한국전쟁 중인 1950년 겨울, 미국 1 해병사단이 함경남도 개마고원의 장진호에서 북한의 임시수도인 강계를 점령하려다 오히려 장진호 근처의 산 속 곳곳에 숨어있는 중국군 제9병단(7개 사단 병력, 12만 명 규모)에 포위되어 전멸 위기를 겪었다가, 간신히 성공한 후퇴 작전이다. 미군의 전사에 "역사상 가장 고전했던 전투"로 기록되어있다. (위키백과) -. 장진호전투 그래픽과 함께 간략한 소개 -. 장진호전투를 아십니까? -. 장지호전투 사진들 ■ 크리스마스의 기적 - 흥남철수작전 (1950.12.12~12.24) ■ 중공군에게 포로가 될 때를 위해 준비한 뇌물 - 고근홍 8사단 10연대장 ■ 울프독의 양주 해피밸리전투 <1> <2> <3> <4> <5> <6> <7> 1951년 1월 3일 밤 서울 북방 양주군 삼하리에서 서울 시민들의 1.4 후퇴를 엄호하고 철수하다가 중공군의 기습을 당해 부대대장 이하 157명이 전사한 영국 얼스터 대대의 비극적 이야기다. '고양 전투', 또는 '해피 밸리' 전투로 불리는 이 전투는 영국에서도 많이 알려져 있지않고 미국 전사에도 거의 언급이 되어 있지 않으며 이들이 목숨 바쳐 싸웠던 한국에서는 더더욱 서글플 정도로 알려져 있지 않았었다.
○ 잊혀진 전투 - 영국군의 해피 밸리 전투<上> <中> <下> ○ 한국 참전 영국군 추모비의 슬픈 유랑 ○ 반격 중국군의 참전으로 전황이 어렵게 되자 맥아더는 원자폭탄 사용을 고려했다. 50년 12월 30일, 맥아더는 워싱턴에 중국 본토 폭격을 요청했다. 그러나 워싱턴의 합참의 반응은 미적지근했다. 1월 10일 맥아더는 합참을 재촉했다. 트루먼은 13일 친서를 보내 한반도 이상의 확전만은 절대 불가하다는 뜻을 전했다. 물론 동시에 재반격 준비도 진행되고 있었다. 교통사고로 사망한 미 8군사령관 워커의 후임으로 매튜 리지웨이가 선임됐다. 1월 22일 미군의 반격이 시작됐다. 물자가 부족한 중국, 북한군의 남진은 오래 지속되지 못했고, 2월 들어 전세가 역전됐다. 3월 2일 미군은 한강을 도하했고, 14일에는 서울이 수복됐다. 서울 수복 이후에도 양대 진영은 소규모 교전을 벌였다. 그러나 이승만의 뜻에도 불구하고 북진은 이뤄지지 않았다. 미군은 이미 휴전 쪽으로 가닥을 잡고 있었다. (more) ● 거창 양민 학살사건 - 거창 양민 학살 사건은 국군에 의한 학살이라는 점에서 충격이 크다. 51년 2월 11일 11사단 9연대 제3대대는 경남 거창군 신원면에서 700명이 넘는 민간인을 학살했다. 이들 중 359명은 14세 이하의 어린이들이었다. ● 학살의 현장, 은비녀 60여 개가 발견됐다. (아산 설화산, 참혹한 학살의 현장)
■ UN군의 진격, 지평리 일대를 장악하다! (1951.2.13~15) 3군단은 1950년 10월에 창설되어 주로 후방작전을 담당했으나 중공군의 참전이후 최전선에 투입되어 중동부 방어선을 담당하게된다. 사건은 강원도 현리에서 벌어지는데, 현리는 국군 3군단이 방어하는 거점이었으며 좌측에는 미군 10군단, 우측에는 국군 1군단이 방어전선을 구성하고 있었다. 이때 중공군은 현리에 주둔중인 3군단을 목표로 공격작전을 수립하고 공격을 감행한다.
하지만 포위당했다는 공포에 휩싸인 군단장은 소식을 듣자마자 경비행기를 타고 1등으로 도주해버렸고 지휘관을 잃은 부대는 고위 장교들부터 차례로 겁에질려 계급장을 떼버리고 뿔뿔히 흩어져 도망쳐 버린다. 군단의 지휘체계는 순식간에 공중분해되고 병사들은 아무런 지휘를 받지 못한 상태로 처절하게 패주했다. 중공군의 추격으로 70킬로미터 이상 밀려나고나서 미군이 급히 구원부대를 파견해 겨우 정신을 차린 국군은 병력의 절반이상 장비의 대부분을 잃게되었고 역사상 최악의 패전으로 기록됨 이 사건은 미군 지휘관들이 한국군 장교의 작전지휘능력을 철저하게 불신하게된 계기였다. 당시 밴 플리트 미8군사령관은 한국군의 제1군단을 제외한 모든 군단 사령부를 해체하고 일체의 작전지휘권을 미군 장성들에게만 부여하였다. 1군단 또한 육군본부를 지휘선상에서 제외하고 미군 사령부에서 직접적인 지휘를 받도록 하여서, 이 시점부터 모든 한국군의 작전지휘권이 상실되었다. 3군단은 1951년 5월26일 해체되었다. ■ 3군단 최후의 날과 유재흥 <1> <2> <3> <4> ■ 7사단을 돌파하여 현리 오마치를 점령한 중공군 20군 60사단 178연대 ■ 3군단을 현리 포위망에 빠트린 미10군단장 알몬드의 고집 ● 현리 패전의 한 요인 - 인사의 난맥 ★ 대한민국을 패망시킬뻔한 희대의 매국노 유재흥 前 국방부 장관 별세… (2014.11.28) 대한민국 국군의 작전권이 미군에게 넘어가게 만든 장본인이라는게 중론이지만 댓글 중에 오마치고개의 당시상황과 유재흥의 행동이 사실과 다르다는 내용도 있다. ■ 횡성 참패 후 8사단의 정비와 '현리'로의 반격 (1951.5.) <---- 페이스북에 떠도는 유재흥 이야기 (클리앙) | |||||||||||||||||||||||||||||||||||||||||||||||||||||||||||||||||||||
휴전회담 기간 중 주요 전투지역 4부 전선의 교착과 휴전 82. 시작된 줄다리기 83. 뜨거운 감자, 개성 84. 고지 쟁탈전의 시작 85. 무적해병의 신화 86. 희생을 필요로 한 고지전투 87. 피로 얼룩져간 능선 88. 너무나 혹독한 댓가 89. 또 다시 재현된 악몽 90. 피로 얻은 승리 그리고 교훈 91. 파로호를 장악하다 92. 전설로 남게 된 백마고지 93. 전혀 새로운 난제 94. 해방구가 되어버린 포로수용소 95. 휴전반대로 얻고자 한 것 96. 중공군의 마지막 공세(7차 대공세) 97. 멈추어진 전쟁 98. 전쟁이 남긴 것 99. 세계에 영향을 끼친 전쟁 00. 끝나지 않은 전쟁 1950년부터 1953년간의 한국전쟁의 경과 한국전쟁 정전협정서 원본 정전협정서에 유엔군 , 북한군, 중국군 서명이 있고 한국군 서명은 없다. 북한은 신의주까지 밀렸어도 작전권을 중국군에게 넘기지 않았다. |
■ 귀신잡는 해병신화 '도솔산 전투' ■ 도솔산 전투(웹툰) <1> <2> <3> <4> <5> <6> 도솔산전투의 24개 목표와 펀치볼
■ 18연대 1대대장의 7.13 금성전투 ■ 7.13 금성 전투 1연대의 와해 ■ 7.13 금성전투 수도사단 1연대 지휘소 피습
■ 비무장지대엔 지하만리장성이 있다 (흔적의 역사 - 경향)
○ 휴전으로 가는 길 맥아더는 이승만과 마찬가지로 북진을 생각하고 있었다. 이는 트루먼의 의중에 반한 것이다. 맥아더는 트루먼의 승인 없이 3월 24일 북진 명령을 내렸다. 외교관들과의 모임에서는 트루먼의 휴전 의지를 비판하는 의견을 거침없이 쏟아냈다. 둘의 관계는 점차 악화돼 갔다. 4월 11일 결국 트루먼은 맥아더를 극동군사령관 겸 유엔군사령관에서 해임했다. 16일 맥아더는 도쿄를 떠나 19일 미 상하양원합동회의에 참석했다. 여기서 했던 연설에서 “노병은 죽지 않는다. 다만 사라져 갈 뿐이다.”라는 유명한 표현이 나왔다. 맥아더의 후임에는 미 8군사령관 리지웨이가 선임됐다. 당시 이승만은 미국에 남한군의 재무장을 요청한 상황이었다. 그러나 리지웨이는 남한군의 지휘계통이 엉망이고, 훈련이 잘 돼있지 않다는 이유로 반대의견을 워싱턴의 육군부에 제출했다. 미군 수뇌부도 이에 동의했다. 미군은 남한군의 재무장을 돕지 않았고, 51년 12월 대구에 참모학교, 52년 1월 진해에 육군사관학교를 창설하는 것으로 대신했다. 이 무렵 김일성도 더 이상 전쟁을 밀고나갈 수 없다는 점을 깨달았다. 마오쩌둥의 의중도 마찬가지였다. 마오쩌둥은 51년 6월 스탈린에게 정전 의사를 표명했다. 스탈린 역시 6월 13일 중국 외교관과의 회담을 통해 정전에 동의했다. 23일 트루먼은 조지 캐넌을 시켜 유엔 주재 소련 대사 야콥 말리크와 비밀리에 협상했고, 양측은 전쟁 종결을 합의했다. 전쟁을 계속하기 원하는 사람은 이승만 뿐이었다. 휴전회담으로 사용된 내봉장 7월 10일부터 정전 본 협상이 시작됐다. 장소는 개성이었다. 협상테이블에 앉은 양측은 38선으로의 복귀, 외국군 철수 등의 문제를 논의했다. 리지웨이는 휴전회담을 진행하는 한편 상대의 통신, 보급망에 대한 폭격을 계속했다. 결국 협상 장소는 개성에서 판문점으로 옮겨졌다. 10월 25일부터 판문점 회담이 시작됐다. 계속된 폭격을 견디지 못한 김일성은 11월 유엔에 직접 조기 정전을 소호했다. 소련은 급하게 정전하기보다는 느긋하게 최대한 이익을 취하려는 입장이었기에 북한 주재 소련 대사 레베데프를 통해 김일성의 움직임을 견제했다. 당시 휴전회담의 큰 쟁점 중 하나는 포로송환이었다. 미군은 포로의 의사에 따른 자유송환, 북측은 의무적으로 돌려보내는 자동송환을 주장했다. 52년 5월까지 휴전회담은 대부분 합의점을 찾았지만 포로교환 문제만큼은 계속 실마리가 풀리지 않았다. 미군은 북한을 압박하기 위해 다시 폭격을 시작했다. 압록강변의 수풍댐을 비롯하여, 10개의 수력발전소가 폭파됐다. 7월 11, 12일에는 대규모 폭격으로 인해 수천 명의 사상자가 발생했다. 8월에는 평양까지 폭격의 대상에 포함됐다. 11월의 수소폭탄 실험 성공은 북한에게 더욱 압박으로 다가왔다. 53년 3월 5일 스탈린이 사망하자 소련도 북한의 휴전 의지를 지지했다. 북한은 소련을 통해 유엔에 휴전 의지를 표명했고, 7월 27일 판문점에서 휴전 협정이 조인되면서 한국전쟁은 매듭지어졌다. (more)
정전협정서에 서명하고 있는 유엔군 대표 클라크 대장, 북한 대표 김일성, 중공군 대표 팽덕회, 정전협정서 휴전회담 기간 중 양측은 1회의 예비회담을 비롯하여 159회의 본회담, 179회의 분과위원회 회담, 188회의 참모장교 회담, 238회의 연락장교 회담 등 총 765회의 회담을 갖고 휴전 회담 개시 2년 만인 1953년 7월 27일 정전협정을 체결했습. 6·25전쟁의 정전회담은 세계 역사상 가장 긴 휴전회담이었는데. 그 결과 전투는 일단 멈추었으나 전쟁은 끝나지 않은 상태가 되어 버렸다.(more) ■ 1953년 7월 27일! 정전협정이 체결되다. & 사진으로 보는 휴전회담 ■ 그 뒤에 숨어있는 비극의 역사 <1> <2> <3> <4> <5> <6> - 남한측의 휴전반대와 반공포로석방 ■ 승일교 등 경기북부지역의 전쟁 흔적들..(흔적의 역사. 경향) | |||||||||||||||||||||||||||||||||||||||||||||||||||||||||||||||||||||
※ 6.25전쟁 연표 I (1950.6.25~9.15) ※ 6.25전쟁 연표 II (1950.9.16~12.31) ※ 6.25전쟁 연표 III (1951.1.1~6.30) ※ 6.25전쟁 연표 IV (1951.7.1~12.31) ※ 6.25전쟁 연표 V (1952.1.1~12.31) ※ 전쟁직전 남.북 전쟁 지휘부 ※ 전쟁직전 육군의 편성 및 배치 ※ 전쟁 발발시 남.북 전력비교 <I> <II> ※ 6.25전쟁 포로사건 일지 1편 (1950~51년) ※ 6.25전쟁 포로사건 일지 2편 (1952년) ● 한국전쟁기간 활약한 사단들 |
● 1949년 6월 육본에서의 38선 분쟁 대응방침 논쟁 ● 이응준, 김홍일 등 노장들을 격분케 한 신성모 국방의 망언 -. 1950년 부산 제1조병창의 생산실적과 노획병기 재생정비실적 -. 메뚜기로 시작한 도전의 역사 (한국 공군의 창설 과정) -. 영화 '원한의 도곡리 다리 (The Bridges At Toko-Ri) 1954'에 얽힌 이야기
● 중공군에 대한 공포감
공산군이 섬멸(살상,포획,투항)한 한국군,유엔군의 숫자가 109만여명이고 공산군과 유엔군의 피해비율이 1:1.4라고 주장 (항미원조전사)하는 것은 전혀 타당성이 없다. 다만 위 통계는 공산측이 공개한 유일하고도 명확한 공식적인 견해라고 볼 수 있다는 점에서 주목할만한 가치가 있다고 하겠다. | |||||||||||||||||||||||||||||||||||||||||||||||||||||||||||||||||||||
국별 유엔군 파병 및 전사자 규모
도올 김용옥 [역사를 말한다] - 한국전쟁, 동아시아 30년 전쟁 전편 감상할 수 있는 곳 : [도올 김용옥] 역사를 말한다(강의9부작)한국 현대사의 핵심이라 할 수 있는 내용 관련된 연대표 : http://yellow.kr/mhistory3.jsp 관련된 정리글 : http://yellow.pe.kr/110176959347 “동아시아 30년전쟁”이란, 일본의 제국주의가 동아시아에 뿌려놓은 죄악이 결실을 맺어가는 총체적 결말상황을 의미하는 것으로서, 중국의 국공내전으로부터 시작하여 그 내전의 바톤을 이은 한국의 내전, 그리고 그 내전의 확대, 그 확대로 야기된 중미전쟁(抗美援朝戰爭), 그리고 미소대립, 인도차이나 전쟁, 그리고 또다시 미국의 개입으로 확대되어 나타난 월남전, 그리고 닉슨독트린, 그리고 미군의 월남철수에 이르기까지 1945년부터 75년까지 30년간, 미국이라는 초유의 강대국이 일본제국주의의 바톤을 이어 아시아에서 겪어야 했던 제국주의의 다양한 군사적 체험을 총괄하여 일컫는 것이다. 한국전쟁은 동아시아 30년전쟁의 핵이었다. - 도올 『논술과 철학강의』1권 41~42쪽 中 - |
□ 6.25전쟁 당시 한국을 도와준 나라는 몇 개국일까? -. "6ㆍ25전쟁 때 한국 도운 나라 총 63개국" - 국방부, ‘6.25전쟁지원국 현황 연구포럼’ 최종 결과 공개 (국방일보 20120511) 기네스북에서 인증한 6.25 참전지원국 67개국 중 4개국(포르투갈, 스페인, 아일랜드, 이라크)을 제외한 63개국으로 확정 -. 국방부가 6.25전쟁 당시 지원국 숫자를 조작했다? (20140608) 국방부 6.25사업TF팀의 불명확한 기준에 대해, 지원의지를 표명했으나 불발된 3개국(브라질, 니카라과, 볼리비아)은 지원국에 포함시키고, UN결의에 찬성했으나 지원한 근거가 없다는 이유로 4개국(포르투갈, 스페인, 아일랜드, 이라크)은 제외시킨다는 것은 상식적으로 맞지 않다는 것이다.
(마라톤의 영웅 아베베의 참전과 1966년 한국육상대회) | |||||||||||||||||||||||||||||||||||||||||||||||||||||||||||||||||||||
6.25전쟁 중 일어난 일들 YTN의 한국전쟁 60주년관련 기사 ① 전쟁터로 간 소녀 해병 "우리 친구가 야 우리 지원하자 하니까 아무 생각 없이 진짜 그럼 나도 지원할까 해서 지원했지 그래서 그냥 어머니는 기절하시고..." ② 중국-타이완 한국전에서 격돌 육군정보부대 인천18지구대 서울-차이니즈 지대 ③ 타이완으로 간 중국포로 한국전쟁에서 중공군으로 참전했다 포로가 된 2만 여 명 가운데 만4,000여 명이 타이완행을 선택했다. ④ 미군 실종자 가족 '생사만이라도' 6.25 전쟁에 참가했다가 행방이 묘연해진 사람은 미국 전역에 8,000명이 넘는다. 60년이 흐른 지금, 실종자의 부모는 대부분 숨졌고 형제 자매들도 이제 나이가 많이 들었다. ⑤ 미국, '잊혀진 전쟁'을 알리다 미국에서 6.25 전쟁은 흔히 잊혀진 전쟁으로 불린다. 하지만 이 전쟁을 잊을 수 없는 사람들은 오랜 시간, 자신이 겪은 전쟁의 참상을 알리고 있다. ⑥ 호주군, 가평을 기억한다 가평 504 고지는 1951년 1차 춘계공세 당시 중공군이 서울로 가는 길목이었다. 호주군 700여 명은 10배에 달하는 중공군을 맞아 사흘에 걸쳐 백병전을 벌였고, 이에 미군은 강력한 수비벽을 만들어 서울이 적에 넘어가는 것을 막았다. 호주에는 '가평'이란 이름의 길이 있을 정도로 중요한 전투였다. 중국, 호주 총리의 6·25 기념식 참가도 문제 삼나 ■ 오마이뉴스 연재 [전쟁포로] [전쟁포로 1] 인천상륙작전 시작... 나는 인민군이 되었다 [전쟁포로 2] 아비규환 후퇴... 북으로 행군 [전쟁포로 3] 총은 고장, 반역은 개죽음... 행군은 계속됐다 [전쟁포로 4] '들키면 죽음'... 나는 인민군에서 탈영했다 [전쟁포로 5] 5명의 의용군과 함께 남으로 향하다 [전쟁포로 6] 귀순증 한 장이 내 생명줄이 되다 [전쟁포로 7] 전쟁통에 만난 처녀와의 하룻밤, 뭉클했다 |
-. 너희들은 포위되었다! -. 어느 중국군(광복군) 출신 사단장의 부패 - 채원개(蔡元凱) 제2사단장 | |||||||||||||||||||||||||||||||||||||||||||||||||||||||||||||||||||||
6.25전쟁 중 사용되었던 무기들 |
-. 6.25 한국전에 등장했던 전차들 [슈트름게슈쯔의 밀리터리와 병기] -. 6.25 전쟁의 수호신 M26 '퍼싱' 중전차 -. 6.25의 또 다른 영웅, M46 "패튼" -. 6.25 전쟁의 영웅, M1 개런드 -. 한국군 최초의 전차, M36 "잭슨" -. 한국군과 미군의 주력 기관총, M1919A4 -. 공포의 폭격기, 하늘의 제왕 B-29 -. 하늘의 구급차, 벨 H-13 "수" 헬리콥터 [上] [下] -. 서울수복의 상륙 돌격 장갑차(LVT-3C) -. 한국전의 미스테리 크롬웰 전차. -. 6.25 한국전에 개입했던 중국 공산군의 전차 -. 북한군의 주력 분대기관총-DP -. UN군의 제공권을 뒤흔들어 놓은 미그 15 -. 자유를 향한 북한 조종사의 비행 - 노금석 상위 미그15 몰고 귀순 (1953.9.21) -. 아군을 위협한 'KS-12 대공포' -. 너무 위험했던 무기 국산 수류탄
한국전쟁 초기, 대한민국 국군 보병의 기본 화기와 조선인민군 보병의 기본 화기 |
6.25 그 후의 이야기들 | |||
1960년 3월 15일 정부통령 선거가 있었고, 개표 과정에서 이기붕의 부통령 당선을 위한 개표조작이 벌어졌다. 이에 대한 항의가 전국적으로 진행된 가운데 경남 마산에서는 조직적 저항으로 발전한 마산 3·15 의거가 발생했다. 그러나 관계자 처벌은 이루어지지 않았고, 사태는 확대되었다. 전국적으로 확대되던 시위는 4월 19일, 서울 지역 대학생들이 총궐기하고 수많은 중고생들과 시민들이 동참한 시위와 이에 대한 경찰의 유혈 진압으로 절정에 이르렀다. 사태는 동료들의 희생에 분노한 초등학생들이 집회를 여는 지경에 이르렀고, 계엄령은 서울과 전국적으로 확대되었으나 군부는 무력진압을 사실상 거부하고 중립적 입장을 견지하였다. 이에 이승만은 자유당 당직을 사퇴하고 대통령직에만 전념하겠다 하였다. 주한 미국대사였던 매카나기의 방문을 받은 이승만은 이 모든 사태가 장면과 교회세력의 지시라고 설명했지만 메카나기 대사는 3.15부정 선거와 이를 저지르고도 숨긴 각료들 특히 경찰의 탓이라고 이야기하였고, 즉각적인 개혁을 강력히 촉구했다. 이어 이승만 대통령은 하야할것을 결정하게 되었으며, 4월 23일 시위진압경찰의 발포로 시민들의 사망소식이 전달되자 애도의 뜻을 발표한다. 4월 24일에는 유혈사태에 대한 책임을 지고, 자유당 총재직을 사임하였다. 한편 이승만은 4·19 의거 부상자들이 수용된 병원을 찾아 부상자들을 위문하였다. 1960년 4월 26일 이승만은 대국민 담화문을 통해 자진 퇴임을 선언하였다. 이승만은 1960년 5월 29일 하와이로 망명하였다. 그는 처음에 한국을 떠날 때 영구 망명을 생각하진 않았다. 다만 한 달 정도 잠시 피하는 걸로만 생각했었다. 그러나 허정 과도내각과 제2공화국 장면 정권은 이승만의 귀국을 허락하지 않았다. 하와이에서 망명생활중이던 이승만은 향수병에 걸렸다. 한국에 돌아오고 싶어 1962년 3월 17일자 비행기표까지 끊어놓고, 3월 16일 '사과 성명'을 발표하기도 했었다. 그러나 3월 17일 박정희는 특별지시를 통해 입국을 거부, 이승만의 귀국을 막았다. 3월 18일자 신문들도 사설을 통해 이승만의 귀국을 반대했다. 이승만은 실어증에 걸려서 고생했다. 영어에 유창했던 이승만은 실어증 이후 프란체스카 도너의 간호를 받으며 약간의 한글과 한문으로 대화할 수 있었다. 거주지를 정하지 못해 수시로 거처를 옮겨다니던 이승만과 프란체스카 도너는 하와이 한국인 교포단체의 유지인 최백렬(崔伯烈), 오중정(吳重政), 윌버트 최 등의 도움으로 한 빌라에 머무르다가 이승만의 병세가 악화되면서 하와이의 요양원으로 옮겨졌다. 1960년부터 심장병이 있던 그는 트리폴리 육군 병원에 자주 진료하였다. 한편 그는 미국 하와이 망명 이후 교민들의 성금과 후원금으로 생계를 유지했다. 자신에게 오는 후원금을 거의 쓰지 않고 아꼈는데, 그는 이 돈을 모으는 이유를 귀국비용을 마련해야 한다고 이인수에게 말했다. 이후 이승만은 망명생활중 병세가 악화되면서 망명지 하와이에서 살다가, 1965년 7월 19일 한국 시간 19시 35분에 하와이 호놀룰루 요양원에서 병으로 별세하였다. 이때 이승만의 나이는 91세였다. 바로 미국에서 데스마스크를 만든 뒤 유해는 비행기편으로 하와이 호놀룰루를 출발, 1965년 7월 22일 경기도 김포비행장을 통해 입국하였으며, 7월 27일 서울특별시 정동 교회에서 영결식을 마치고, 가족장으로 서울 시가행진 후 국립묘지에 안장되었다. (출처 : 위키백과) |
<6.25전쟁 이후 60년, 북한의 도발은 계속됐다> 6.25전쟁의 포화가 잠시 멈추고 정전협정이 체결된 1953년 7월 27일부터 1994년 4월 말까지 북한이 정전협정을 위반한 건수는 42만 5천271건에 이른다. 그 중 북한이 사과한 건수는 7건에 지나지 않는다. 지난 60여 년 동안, 적화통일을 위한 북한의 야욕은 끊임없이 한국을 괴롭혔다. '대남도발'이란 단어는 우리에게 너무도 익숙한 말이 되었다. 익숙해졌기 때문일까, 북한의 대남도발을 바라보는 우리의 안보의식이 예전만 못한 것이 사실이다. NLL침범이나 군사분계선에서의 사소한 도발은 가볍게 여겨질 정도이고, 젊은 세대는 북한의 진정한 위협을 느끼지 못하고 있다. 오히려 한국정부를 불신하거나, 북한보다는 미국에 더 적대심을 갖는 사람들도 있다. '북한은 원래 그렇다'는 안일한 생각이 오늘날 안보의식 부재를 불러왔다. 이는 곧 대한민국의 위기를 초래할 것이다. (more) -. 북한의 대남 도발사 - 세습왕조 불변의 원칙 ‘남침야욕’ 1958년 2월 16일에 대한항공의 전신인 대한국민항공사의 여객기가 경기도 평택시 상공에서 북한의 공작원에 의해 납치된 사건이며, 대한민국 역사상 최초의 항공기 납치 사건이다. 이 날 부산발 서울행 대한국민항공사 소속 창랑호(당시 기종 : 더글러스 DC-3, 등록부호:HL106) 여객기는 기장 윌리스 P. 홉스와 부기장 멕클레렌 미 공군 중령이 조종을 하였으며, 승객 30명과 승무원 3명 및 미군 군사고문단원 중령 1명 등 34명을 태우고 오전 11시 30분 이륙한 후, 경기도 평택군 (현 평택시) 상공에서 납치되어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평양직할시에 있는 평양 순안 국제공항에 강제 착륙 당하였다.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은 언론기관을 통하여 "대한국민항공사가 '의거월북' (자신의 의지로 군사분계선을 넘음) 했다"고 거짓 발표하였다. 탑승자 중에는 미국인 기장/부기장 외에도 미 군사고문단원(중령) 1명과 독일인 부부 등 외국인 승객 3명과 유봉순 국회의원, 공군 정훈감 김기완 대령 등 고위 인사도 포함되어 있었다. 한편, 대한민국 경찰은 같은달 20일 북한공작원인 김택선을 포함한 3명이 범인으로 발표하고 25일에는 기덕영등 3명을 사건의 공작과 배후공작의 혐의로 체포하였다. 대한민국 정부는 2월 22일 국회에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의 만행을 규탄하는 결의를 행하고, UN군에 참가한 16개국에 대해 협력을 요구하는 메시지를 보낸다. 이를 받은 UN군은 2월 24일의 군사정전위원회에 수석대표가 승객과 승무원, 기체의 조속한 송환을 북한에 요구하여, 악화된 세계여론에 굴복한 북한은 1958년 3월 6일 납치범 6명과 그들 가족 2명을 제외한 26명을 남측으로 송환하였다. 이 과정에서 납치범들은 승객으로 있던 사람 중에서 군사고문단원인 미군 중령 1명을 사살했다. 북한 측은 창랑호에 탑승한 모든 인원에 대해 세뇌를 실시했으며 이에 협조적이지 않은 일부 탑승자들에게 고문을 하였다. 북한은 송환하지 않은 8명은 망명했다고 발표했으며, 승객과 승무원은 돌려보냈으나 기체는 끝내 돌려보내지 않았다. 당시 적자에 허덕이면서 보유 항공기 수가 3대에 불과했던 대한민국 국민항공은 창랑호를 돌려받지 못해 운영상 큰 타격을 입었다. 한편 이 사건을 계기로 해서 정부는 무기를 소지한 탑승객 단속과 여객기 운항에 대한 공중감시를 강화하게 되었다. -. 창랑호 납북사건 [엔하위키 미러] -. 우리 국적기 하이재킹 사건(1)--창랑호 납북사건
1960년 4월, 한국에서 이승만 정권의 독재에 항거해 시민들이 들고 일어나 대한민국 제1공화국을 종식시킨 민주주의 시민혁명. 이승만의 자유당 정권이 저지른 3.15 부정선거에 시민들이 항거하여 대대적으로 일어난 이 시위는 전국으로 확산되었으며, 한반도 역사상 최초로 공화국에서 독재정권을 무너뜨린 혁명이다. "민주주의의 나무는 국민들의 피를 먹고 자란다." - 『사상계』 1960년 5월호 4.19 당일의 모습을 담은 영상 4.19혁명의 한계와 의의 지도자가 중심이 되어 이루어진 조직적인 혁명이 아니었고 민중에 의해 자발적으로 이루어졌기 때문에 혁명 결과 권력은 야당인 민주당에게로 돌아갔고 반공보수가 아직까지 당내의 정책이었던 민주당은 시민들의 요구사항에 부응하지 못하였다. 무엇보다 장면 내각 때 경찰 내 발포 책임자에게 무죄 선고를 하자 시민들은 크게 실망하게 된다. 한편 경찰에 대한 민중의 반감은 극에 달한 데다 자유당 정권 내내 억압되었던 시민들의 요구가 한꺼번에 폭발하자 시위로 시작하여 시위로 끝나는 하루가 이어지기도 했고 경찰서 등 관공서 건물에 대한 파손이 이어지기도 했다. 이는 곧 대한민국 헌법의 4차 개정의 빌미가 되었고 법률불소급의 원칙을 무시한 이 개정은 그 이후로 줄곧 "소급입법개헌" 이라고도 불리고 있다. 그래도 시간이 지나면서 시국이 안정되고 국민들 사이에서 민주화가 될 것이라는 희망이 생겼다고 하는데 정치권은 민주당 신파인 장면 총리와 구파인 윤보선 대통령 사이에 치킨게임으로 여전히 혼란스러웠고 그틈을 타서 1961년 5월 16일 박정희는 군사 쿠데타를 일으키고 시민들의 피로 일군 4.19를 1년만에 뒤집게 된다(5.16 군사정변). 장면은 수녀원으로 도망가서 나오지 않았고 윤보선은 이를 기민하게 대처하지 못하여 쿠데타는 성공하게 되었다. 정권을 잡은 이들은 자신들의 정당성을 강조하기 위해 자신들이 일으킨 쿠데타는 5.16 혁명이라 치켜세우고 4.19 혁명을 깎아내리기 위해 4.19 의거라고 정의하였다. 그래서 4.19 혁명은 '미완의 혁명' 이라고도 한다. 이 때문에 정치학자들 사이에서는 4.19를 혁명으로 부를 수 있는가에 대해서 몇 번 이의가 제기된 적이 있었다. 물론 여기서 말하는 이의는 4.19 자체를 부정하는 의미에서의 이의제기가 아니라 어디까지나 '혁명' 의 성격과 정의에 관한 학문적인 논쟁의 일종으로 봐야 할 것이다. 그래도 4.19는 독재정권을 뒤집은 사건이며, 한국 시민들에게 민주주의 정신을 똑바로 심어주었다. 현행 대한민국 헌법 전문(前文)에도 4.19 정신을 이어받는다는 문구가 있다. | ||
박정희(朴正熙, 1917.11.14 ~ 1979.10.26)는 대한민국의 정치인이다. 본관은 고령(高靈)이며 대한민국의 제18대 대통령인 박근혜의 아버지이다. 2005년 공개된 병적기록표에서 창씨개명을 한 것이 밝혀졌으며, 창씨는 다카기 마사오(高木正雄)이다. 젊은 시절 박정희는 대구사범학교 출신으로 3년간 교사로 근무했고, 만주국 육군군관학교 졸업후 일본 육군사관학교에 편입하여 졸업하고, 만주국 육군 제8단에서 일본이 제2차 세계 대전에서 패망할 때까지 만주국의 장교로 근무하였다. 1945년 8월 해방 이후 광복군 제3지대 제1대대 제2중대장를 지내다 1946년 7월 귀국하였다. 귀국 이후 대한민국 국군 장교로 지내며 남조선로동당에 입당하였다가 김창룡이 주도한 숙군에서 여수·순천 사건 연루 혐의로 체포되어 사형을 언도받았다. 이후 육군본부 정보국장이었던 일본 육군사관학교 출신의 백선엽의 구명과 여순사건과 관련한 남로당 조직에 대하여 자백함으로써 사형을 면하게 되었다. 이후 강제 예편된 박정희는 한국 전쟁이 나자 대한민국 국군 장교로 참전하였다. 1961년 5월 16일 5·16 군사쿠데타를 주도하였고, 국가재건최고회의 부의장과 의장, 그리고 1963년 12월부터 1979년 10월 26일까지 대한민국의 제5·6·7·8·9대 대통령을 역임하였다. 3선 개헌 및 유신헌법 등의 장기집권을 반대하던 야당 및 학생운동 세력 등 민주화 세력과 끊임없이 충돌하였다. 1979년 10월 김영삼 의원 제명 파동으로 부마항쟁이 일어났고 1979년 10월 26일 연회를 하던 도중 중앙정보부장 김재규의 권총에 살해당했다. 박정희의 대통령 직무 수행에 대한 평가는 긍정과 부정의 양면으로 다양하게 나뉘고 있다. 경제적인 측면에서 전쟁과 가난으로 피폐해진 대한민국을 국가 주도의 경제개발을 통해 한강의 기적을 이뤘다는 평가, 새마을운동을 통해 농촌 발전에 성공했다는 긍정적 평가가 있다. 반대 측에서는 박정희 시대의 경제정책이 개발 위주의 획일화된 정책으로 보고 있다. 각종 여론조사에서는 존경하는 대통령을 비롯한 대통령 선호도와 공적 평가 등에 대해 상위를 차지하고 있다. 하지만 이는 일종의 스톡홀름 신드롬에 지나지 않는다는 반론도 있다. 실제로 김영삼 정부 때 온갖 사건 사고와 IMF 경제위기가 단순히 김영삼 정부의 실정으로 매도하는 것은 역사의식의 부재에서 나오는 것에 지나지 않고 경제라는 것은 공로자, 수혜자, 책임자가 꼭 일치하는 것만은 아니다. 특히 전두환 정부의 강압적인 경제정책이 이후 자유화 국면에서 폭발하여 극심한 물가상승을 이루게 한 것에서 단적으로 드러난다. 5·16 군사정변, 10월 유신을 통한 헌정 파괴, 노동 운동 및 야당 탄압, 군사독재 등 민주주의를 후퇴시켰다는 부정적인 평가가 존재한다. 한일협정을 강행한 것과 월남전 파병에 대한 평가가 양립하고 있다. 핵개발을 추진하였다. (출처 : 위키백과) ■ 박정희 대통령과 한미동맹의 역사
만주군관학교 시절의 박정희
'박정희'대통령 묘소(墓所). 생전의 부인 '육영수'여사와 함께 국립현충원에 안장(安葬)되어 있다. 1979. 10. 26. '김재규'의 총탄에 서거하여 11월 3일 국장으로 이곳에 안장되었으나 그에대한 역사적 평가는 엇갈리고 있다. 영부인 육영수(陸英修) 여사는 ’74. 8.15. 광복절 기념행사 도중 북한의 지령을 받은 조총련계 '문세광'의 흉탄에 서거하여 8.19. 국민장으로 안장되었다. (more) [백년전쟁 스페셜 에디션] 프레이저 보고서 1부 '박정희의 경제 신화'를 파헤친다. 한국 경제의 고속성장을 가능하게 했던 핵심 요인은 무엇일까? 학자들은 '수출주도형 공업화' 전략에 있었다고 말한다. 그럼 누가 이 전략을 수립하고 이끌었을까? 청산하지 못한 친일의 역사 ● 반세기만의 인혁당 무죄 판결 [2015.06.07 오마이뉴스] 결과적으로 대구의 기백을 죽인 박정희 정권의 인혁당 용공조작 사건 사실 대구는 해방 후 '동양의 모스크바'로 불릴 만큼 진보적 도시였다. 물론 1946년 미군정이 실시한 국민여론조사에 따르면 당시 국민 중 약 70%가 사회주의를 지지하고 있었다지만, 특히 대구는 1946년 10월항쟁에서 드러나듯 체제저항적인 반골 기질이 두드러졌던 고장이었다. 대구지역 고등학생들이 들고 일어나 두 달 뒤 이승만 대통령을 권좌에서 끌어내린 4.19 혁명의 전초였던 2.28 민주항쟁은 또 어떠한가. 2.28 대구가 없었으면 3.15 마산이 없었고 3.15 마산이 없었으면 4.19도 없었다. 그처럼 대구는 진보의 메카요 민주주의의 성지였다. 그런 대구가 지금은 보수의 본산이 되었다. 심지어 2.28시위에 앞장섰던 경북고 출신들이 박정희 정권 시절 장기집권을 뒷받침했던 정관계의 핵심 브레인 역할을 했다는 사실은 역사의 아이러니였다. 1974.08.19 고 육영수여사의 영구차를 배웅하는 박정희 10·26 사건(十二六事件) 또는 박정희 암살사건(朴正煕暗殺事件)은 1979년 10월 26일에 대한민국의 중앙정보부 부장 김재규가 박선호, 박흥주 등과 함께 대통령 박정희와 경호실장 차지철을 살해한 사건이다. 십이륙이라고 부르기도 한다. 1979년 10월 26일, 박정희는 KBS 당진 송신소 개소식과 삽교천 방조제 준공식에 참석한 후 궁정동 안가(염동진의 아지트가 있던 자리)에서 경호실장 차지철, 비서실장 김계원, 중앙정보부장 김재규와 함께 연회를 가졌다. 연회 중에 박정희는 김재규의 총에 가슴과 머리를 맞았고 곧 수도육군병원으로 이송되었으나 이송 중 세상을 떠났다. 당시 박정희의 나이는 만 62세였다. (출처 : 위키백과) 유신이 맹위를 떨치던 1979년 5월 3일 신민당 전당대회에서 김영삼이 총재로 당선된 후 신민당은 선명야당이란 기치를 내걸고 정권타도를 위해 박정권에대해 아주 강력하게 대항 했다.그와중에 김영삼총재는 미국에 대해 "미국은 독재를 자행히는 한국에 대해 원조를 중단해야 한다.미국은 한국에 원조를 하는나라이니 그것은 내정간섭이 아니다"이렇게 말했다.이에 격노한 박정희 대통령의 명에 따라 9월 8일 김영삼에 대한 총재직 정지 가처분 결정, 10월 4일 김영삼의 의원직 박탈 등 일련의 사건이 발생함으로써 유신체제에 대한 야당과 국민의 불만이 크게 고조 되었다.이에 부산과 마산에서 강력한 시위가 벌어지는데 이것이 바로 "부마 민주항쟁"이다.그리하여 10월20일 이지역에 위수령이 발동되어 겨우 잠잠해 진다. 이시기에 대통령 경호실장인 차지철과 중앙 정보부장 김재규는 서로의 충성심 경쟁으로 혈안이 돼있을 때였다.김재규는 부마사태나 정치적인 일련의 사건을 온건하게 처리하려 하였고 차지철은 강경파로써 모든문제를 군사작전하둣이 처리 하려하여 두사람이 대립하게 되니 계급으로도 중장으로 장군출신인 김재규는 소령출신인 차지철이 정말 미운 상대였다. (이것은 김계원 당시 동석했던 대통령 비서실장의 말이다) 게다가 차지철 실장은 자기를 거의 부통령 수준의 예우를 하게하고 중앙 정보부에서 올라오는 정보보고를 자기가 심사하여 자기 휘하의 정보팀으로 다시 재조사하여 보고를하는 일련의 월권행위를 자행하여 정보부장을 곤경에 빠트리는일을 서슴치 않아 대통령이 정보부장을 문책하게 하는일이 잦았다.그래서 김재규 정보부장은 차지철 경호실장을 죽이려고 결심을 한다,운명의 10.26일 당일 궁정동 만찬에서 흥분한 김재규는 우발적으로(전두환 합수본부장 발표에의한 표현)박정희 대통령과 차지철 경호실장을 사살한다. 이것이 10.26사건의 전말다. (출처 : 네이버 지식인) 부산 등지에서 일어난 부마민주화 운동으로 인해 박정희의 죽음을 가져왔으며 대신 김재규가 아니었으면 부산 마산은 지옥이었을 겁니다. 비록 김재규의 사리사욕으로 박정희를 죽였지만... “죽기 전날, 박근혜 위해 기도하라고 말했다” 김재규 전 중앙정보부장 유족이 10·26 이후 처음으로 입을 열었다. (시사IN. 2013.10.13) 1979년 10월26일 김재규가 박정희를 살해한 뒤 가장 바빴던 인물은 당시 보안사령관이었던 전두환이다. 박정희 사망 소식을 제일 먼저 접한 그는 하나회 소속 정치군인들을 소집해 대책 마련에 들어갔다. 법적 수사권한이 없었음에도 불구하고 계엄 상황임을 앞세워 합동수사본부장 자리를 꿰찬 그는 기민하게 움직였다. 무주공산이 된 권력을 장악하기 위한 음모는 착착 진행됐다. 문영심이 쓴 김재규 평전 <바람 없는 천지에 꽃이 피겠나>는 1979년 10월26일에 벌어진 박정희 암살 사건을 재조명한다. 그동안 우리는 김재규의 거사를 폄훼하거나 원망하는 데 급급했다. 그는 자신이 왜 박정희를 쏘았는지 이야기할 기회조차 갖지 못했다. 김재규 평전 <바람 없는 천지에 꽃이 피겠나>는 10·26이 의거라고 규정한다. 대한민국 국민의 생명을 보호하기 위해 박정희를 죽일 수 밖에 없었다. 김재규 보통군법회의 비공개 재판정 진술 및 최후진술 (1979_12_8) |
■ 해군 56함 피격 침몰사건 (1967.1.19) 1967년 1월에 대한민국 강원도 거진 동쪽 해상에서 명태잡이 어선을 보호하던 대한민국 해군 초계호위함 PCE-56 당포함(650톤 급)이 북한 해안포의 공격으로 침몰된 사건이다. 승조원 79명 중 39명이 사망하였다. 당시 70여 척의 명태잡이 어선들이 어로저지선을 지그재그로 넘어 들며 조업을 하고있었다. 강원도 금강산이 보이는 어로저지선 인근 해상이었다. 이 어선들을 남하하던 북한 경비정으로 부터 보호를 하던중 해안 동굴속에 숨어있던 북의 해안포가 갑작스런 조준사격으로 56함은 침몰하였다. 해군은 그날 북한이 56함을 향해 286발을 쏘았다고 밝혔다. 시퍼런 대낮 어로보호 경비함이 격침된 대참사가 일어나자 나라가 발칵 뒤집혔다. 불과 닷새 전인 1월14일 밤 해군함정과 민간여객선이 충돌, 여객선 한일호의 승객 1백 명이 숨졌던 터라 충격이 더욱 컸다. 56함 참사는 1월 말까지는 그래도 언론에 보도됐으나 2월 들어 급격히 자취를 감췄다. 그해 말 어로저지선에서 조업하던 어선 39척과 어부 340여명이 납북됐을 때, 또 이듬해 해군 방송선이 납북됐을 때 56함의 기억이 다시 국민에게 살아났다. 그러나 잠시뿐이었다. 2월9일, 국방부는 해상 어로보호임무를 내무부와 농림부로 이관하겠다고 밝혔다. 경비함들이 민간어로 보호 임무를 하느라 본연의 군사임무에 소홀할 수 있다는 이유였다. 또한 4월27일. 해군은 56함을 대체할 고속 경비정(PCE) 1척과 초계호위함(PGMI) 1척을 미국으로부터 인수했다. 그날은 또 56함 격침 현장 인근 해역 DD 91함 함상에서 전몰장병 진혼제가 열린 날이었다. 침몰 직후 정부가 호언했던 ‘응분의 대가’ ‘모종의 중대 조치’는 별도로 지면에 보도되지 않았다. 그러나 70년대 초 해군에 입대한 장병들은 훈련조교들로부터 “56함의 복수를 위해 UDT대원들이 북한 00항에 야간 침투, 쑥대밭을 만들고 돌아왔다”는 말을 들었다. 물론 확인되지도 않고 보도되지도 않은 얘기였다.
1968년 1월 21일에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소속의 군인 31명이 대한민국의 청와대를 기습하려던 사건이다. 당시 유일하게 생포되었던 김신조의 이름을 따서 김신조 사건이라고도 한다. 이 사건은 1968년 1월 13일에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민족보위성 정찰국의 124부대 소속 31명이 조선인민군 정찰국장인 김정태로부터 청와대 습격과 요인 암살 지령을 받아, 대한민국 국군의 복장과 수류탄 및 기관단총으로 무장하고, 1월 17일 자정을 기해 휴전선 군사분계선을 넘어 야간을 이용하여 대한민국 수도권에 잠입하였다. 이들은 청운동의 세검정고개의 창의문을 통과하려다 비상근무 중이던 경찰의 불심검문으로 정체가 드러나자, 수류탄 및 기관단총을 쏘면서 저항하였다. 대한민국 군·경은 비상경계태세를 확립하고 현장으로 출동하여 소탕 작전을 벌였으며, 경기도 일원에 걸쳐 군경합동수색전을 1월 31일까지 전개하였다. 현장에서 비상근무를 지휘하던 종로경찰서장 최규식 총경은 총탄에 맞아 사망하였고, 124부대 소속 31명 중 29명이 사살되고 김신조는 투항하였으며, 한 명은 도주하여 북으로 넘어갔다. 도주한 이는 조선인민군 대장인 박재경 총정치국 부총국장을 역임한 인물로 2000년, 2007년에 방한하여 송이버섯을 선물하기도 했다. 시도는 미수에 그쳤으나, 이 사건 이후에 남-북 간의 군사적 긴장관계를 이유로 하여, 박정희는 ‘국가안보 우선주의’를 선언하였다. 안보우선주의는 노동조합과 민주화 운동을 탄압하는 근거가 되었으며, 대한민국 예비군이 창설(1968.4.1)되는 계기가 되었다. 또한, 대한민국은 특수부대인 684 부대를 비밀리에 조직하여 보복성 공격을 계획(북에 대한 보복으로 평양의 주석궁을 습격하기로 하고 31명의 청년을 불러 모았다. 이들이 격리ㆍ수용되어 지옥 훈련을 받았던 곳이 인천 앞바다의 외딴 섬 실미도이다)하였으나, 남-북의 화해 분위기가 조성되자, 무산되었다. (more) -. 생포(生捕)한 북괴유격대원(北傀遊擊隊員) 김신조(金新朝) 회견 - 동아일보(1968.01.22) -. 김신조 특수부대의 1.21 사태. 실록 - 유용원의 군사세계 -. 생생하게 전해 들은 김신조의 청와대 기습사건(1968.01.21) - 고성혁 -. 김신조 일당의 ‘1.21사태’ 기억하나요 [130127 오마이뉴스 정운현기자] -. ‘무장공비’ 김신조 목사 “오랜만입니다” - 문화일보(2010.05.28) ■ 대한항공 국적기(YS-11) 납북사건 (1969.12.11) 1969년 12월 11일 승객 47명과 승무원 4명을 태우고 오후 12시 25분경 강릉을 출발하여 서울로 향하던 대한항공의 NAMC YS-11 국내선 쌍발 여객기가, 이륙한 지 약 14분여 만에 강원도 평창군 대관령 일대 상공에서 승객으로 위장하여 타고있던 북한의 고정 간첩 조창희에 의해 하이재킹되어 오후 1시 18분경 원산시 인근의 선덕비행장에 강제 착륙된 사건이다. 당시 평양방송은 사건 발생 후 약 30시간 뒤인 12월 13일 새벽, KAL YS-11기가 조종사 2명의 자진 입북에 의해 북한에 도착하였다고 밝혔다. 12월 22일에 판문점에서 국제 연합의 요청에 의하여 '군사정전위원회 비서장회의'가 열려 납북된 사람들과 여객기 기체의 송환을 요구하였다. 이에 북한은 UN에서 개입할 사안이 아니라는 이유를 들며 거부하였다. 대한민국은 일본 적십자사 및 국제적십자위원회의 도움을 받아 북한과의 협상을 성사시키려 하였지만, 북한은 이를 응하지 않았다. 사건 이후 대한민국 각지에서 북한을 규탄하는 시위가 벌어졌으며, 12개국 주요 항공사에서 이 사건에 대해 규탄한다고 밝히기도 하였다. 그러자 북한은 1970년 2월 5일 드디어 납북자들을 송환하기로 약속하였다. 그러나 다시 약속을 뒤엎고 승무원 4명과 승객 8명은 송환을 하지 않겠다고 밝혔다. 결국 대한민국의 지리한 송환 협상에도 불구하고 2월 14일 판문점을 통해서 12명을 제외한 39명을 송환하는 것으로 사건은 종결되었다. 이 사건 이후, 대한민국 정부에서는 국무회의 의결을 통하여, '탑승객에 대한 검문검색 강화', '비행장 직원에게 사법권 부여', '민간기 승무원들에게 무기 휴대 허용', '승객의 익명 및 타인 명의의 사용 금지' 등의 한층 강화된 항공기 보안 대책을 수립하였다. 2001년 2월에는 송환되지 못한 승무원 중 한 명이었던 성경희가 제3차 이산가족 방북단으로 평양을 방문한 자신의 어머니를 만나기도 하였다. -. 우리 국적기 하이재킹 사건(2)--대한항공 여객기 납북사건 - 당시 상황이 자세히 기술되어 있다. -. KAL기 납북일지 -. 43년째 돌아오지 못한 출장길 MBC 여러분! 도와주세요 - 1969년 KAL기 납북된 MBC PD 아들의 투쟁 (2012.05.21) 실미도는 인천에서 20km 떨어진 곳에 있는 작은 무인도로, 1968년 당시 중앙정보부가 북파공작원을 양성시키기 위한 특수부대를 만들었던 곳. 1968년 1월 21일 밤10시경, 북한특수부대 124군 소속 31명이 청와대를 습격하기 위해 서울 세검정까지 침입하였다. 이들 공비들은 우리 군경과의 격렬한 전투 끝에 공비 30명이 사살되었고, 생포된 김신조는 "박정희, 목따러 왔수다."라고 말해 TV를 지켜보던 국민들을 아연실색하게 만들었다. 이 사건을 계기로 당시 박정희 정부는 4월 1일부터 향토예비군을 창설하였으며, 북에 대한 보복으로 평양의 주석궁을 습격하기로 하고 31명의 청년을 불러 모았다. 이들이 격리ㆍ수용되어 지옥 훈련을 받았던 곳이 인천 앞바다의 외딴 섬 실미도이다. 실미도 부대(정식 명칭은 '2325 전대 209 파견대'로 1968년 4월에 창설됐다고 해서 '684부대'로 불리기도 함)는 전과자와 민간인으로 꾸려졌으며, 3년여 동안 가혹한 훈련과 비인간적인 대우를 받았다. 그러나 3년 4개월 동안 출동 명령만을 기다리다가 1970년대 초 남북화해 분위기가 조성되면서 북파 임무가 취소됐으며, 이들의 존재가 외부에 공개될 것을 우려한 정부는 기간병들에게 모두 사살하라는 명령을 내린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하지만 당시 같은 부대에 있던 기간병 24명 가운데 18명이 훈련병들에 의해 살해당했으며, 훈련 중 사망한 7명을 제외한 훈련병 24명은 인천 독배부리 해안에 상륙한 뒤 시내버스를 빼앗아 서울로 향하였다. 그러나 총격전 끝에 대부분의 부대원이 수류탄을 터뜨려 자살을 하였고 4명만이 생존하였다. 생존자 4명도 1972년 3월 사형당했다. 정부는 이 사건을 북한 무장간첩이 서울을 침입하여 군인들 간의 교전 끝에 이들을 사살한 북한 소행의 '실미도 난동사건'으로 발표, 30여 년간 베일에 싸여 있었다. 북한특수부대의 존재를 최초로 확인시켜 준 이 사건은 1999년 백동호의 장편소설 <실미도>가 출판되고 그해 연말 SBS 시사/교양 프로그램 <그것이 알고 싶다>에서 다루어지면서 세상에 드러나게 되었다. 한편 이를 바탕으로 한 강우석 감독의 영화 <실미도>가 2003년 12월 개봉 한국 최초 1000만 관객 동원이라는 기록을 세워 흥행에 크게 성공하였으며, 영화 상영을 계기로 실미도사건이 국민적 관심사로 부각되었다. 이에 2004년 열린우리당은 실미도사건 희생자 문제에 대한 진상 규명과 명예 회복 등을 위한 ‘실미도사건 진상조사위원회’를 구성하였다. 2005년 국방부 과거사진상규명위원회가 실미도사건 진상조사를 시작했고, 그해 11월 벽제 서울시립묘지에서 실미도 부대원 유해발굴작업을 벌여 일부 유해를 확인하였다. 그러나 유해발굴과 부대원 확인 작업까지는 마쳤지만 더 이상의 조치가 아직까지 이루어지지 않고 있어 아직도 의문에 싸여 있다. -. 실미도 사건 - 엔하위키, ‘실미도 사건’ 탈취 버스 민간인 동승기 첫 공개, 무참히 살해당한 이승복일가. 1969년강원도 북방 동해안 소재 주문진읍에서 일곱 명의 간첩들이 몰살당한 대 사건이 있었다. 이들 무장 간첩들을 토벌해 버린 부대는 대간첩작전을 위해서 특수 훈련을 받은 특전대나 또는 해병 수색대같은 부대도 아니었고 더 나아가 출동한 육군 정규군도 아니었다. 또 이들 7명의 간첩들을 한 명도 북으로 복귀 못하게 섬멸하는데 로케트포나 기관총같은 중화기가 사용된 것도 아니었다. 이미 한 명의 경찰관을 살해한 이들 떼간첩을 섬멸한 용사들은 두 명의 경찰관과 집에서 자다가 놀라 뛰쳐 나온 두 명의 예비군들이었다. 사용 화기는 단 네 정의 칼빈 소총이었다. 교전 시간도 단지 5분도 되지 않았었다. 무장 간첩들의 어처구니 없는 실수와 남한측의 신속하고 대담했던 대응이 합쳐서 생긴 운명이 이들을 다 물고기 밥이되게 했던 것이다. [울프독]
해군 방송선 피랍사건 (1970.6.5) 1970년 6월 22일 국군묘지 현충문 폭발사건(북한에 의한 두번째의 박정희전대통령 암살기도 사건)이 일어나기 약 반달 전인 1970년 6월 5일 북한 함정은 우리 영토인 연평도(延坪島) 부근 공해상에서 우리 함정을 기습 공격하여 납치해 갔다. 소위 [해군 방송선 피랍사건]이다. 방송선이라고 보도됐지만 어선단을 보호하는 임무를 띠고 있는 어엿한 현역 해군함정 "120톤급 포함(砲艦)"이었는데 15분간 교전을 한 후 승무원 20명 중 대부분이 사상된 채 납치 당했다 [해군방송선은 120톤급으로 최대 시속은 12노트 정도, 40mm와 20mm 기관포 각 1문으로 무장하였으며 레이더도 갖고 있으나 매우 노후하여 기능을 제대로 발휘하지 못하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한편 북한 고속포함은 북한 해군의 연안경비용 함정으로 250톤급이다 최대 속력은 25노트, 무장은 75mm 포 1문과 기관포, 레이더을 갖고 있었다 북한 이런 함정을 당시 수십 척 보유하고 있었다]
이 사건은 1971년 1월 23일, 승객 55명과 승무원 5명을 태우고 속초공항을 출발 서울로 향하던 대한항공(KAL)소속 F-27 여객기(HL5212)가 괴한 1인에 의해 공중납치되었으나, 기장과 각 승무원들의 노력, 보안승무원의 기민한 대응, 수습 조종사의 희생으로 납치를 모면한 사건이다. 승무원 1명 사망, 15명 중경상, 범인은 기내서 피살되었다. 이 사건의 특징은 앞의 두 여객기 납치사건과 비교할때 좀 다른 부분이 있었다. 그것은 기내에 무장한 보안승무원이 타고 있었고 조종사들도 무장을 하고 있었다는 점이다. 69년 대한항공 여객기 납북사건후 대한항공은 청원경찰 14명을 경찰에 위탁훈련을 시켜 각 국내선에 1명씩 배치하였고 조종사들에게도 권총을 지급했다. 이 사건에서 활약한 최천일 보안관도 훈련된 14명의 청원경찰 중 한사람이었다. 쌍끌이 어선 오대양 61, 62호의 선원 25명은 1972년 12월28일 서해상에서 홍어잡이를 하던 중 납북된 것으로 알려졌다. ◁ 1971년과 1972년 서해상에서 납북된 휘영37호와 오대양 61·62호 선원 36명이 1974년 묘향산에서 찍은 사진. 동그라미 속 얼굴은 거제시 장목면에 살다가 집단 납북된 18명이다. 사진은 지난 2월 납북자가족모임 최성용대표가 탈북단체에서 입수해 공개했다. -. 납북 오대양號 선원 탈북…41년 만에 한국行 예정 (2013.8.23)
8·15 저격사건 / 문세광 저격사건 (1974.8.15)
1974년 8월 15일 대한민국 서울특별시 장충동 국립중앙극장에서 박정희 대통령 연설 도중에 영부인 육영수 여사가 문세광이 쏜 총탄에 피격당하였고, 서울대학교 의과대학 부속병원으로 이송되었으나 오후 7시에 사망하였다. 문세광이 사용한 권총이 일본의 한 파출소에서 사라진 것이라는 사실, 문세광이 소지했던 위조 여권을 발급한 것에 대한 책임, 문세광의 공범 중에 일본인이 끼어 있다는 사실 등으로 일본 정부는 법률적 내지, 도의적 책임을 면할 수가 없게 되었다. 일본이 연관되어 있었던 정황이 보여 한일관계가 불편해졌으나, 일본정부가 책임을 솔직히 인정하면서 개선되었다. 그리고 9월 19일 집권당인 자유민주당 부총재인 시나 에쓰사부로가 수상 다나카 가쿠에이의 친서를 휴대하고 진사특사로 한국을 다녀갔다. 문세광은 대법원에서 사형을 선고를 받았으며 그해 12월 20일에 사형을 집행하였다. 범인 문세광은 1974년 5월에 북한의 대일 공작선이며 재일교포 북송선이기도 한 '만경봉호(萬景峰號)'에서 올해 광복절 기념식장에서 대통령을 저격하라는 지령을 받았음이 밝혀졌다. 하지만 북한의 수뇌부의 직접적인 지령을 받은것 까지는 아니고, 그냥 조선노동당 대외 연락부 공작 지도원이 공작금을 좀 주고 손 안대고 코풀려 하다가 실패한 사건으로 해석되기도 한다. 이 사건으로 박종규 대통령 경호실장이 경질되고 후임 대통령 경호실장에 차지철이 임명되었다. 한편 일본은 1974년 8월 19일 육영수 여사 장례식에 다나카 일본 총리가 조문사절로 참석했지만, 그 이후 일본 정부는 한국과 문세광 수사에 대해 다른 시각을 표출했다. 일본 측은 문세광이 김대중 납치사건에 분개, 박정희 독재를 무너뜨리기 위해 단독으로 저질렀다는 수사결과를 12월 25일 발표했다. 한국 측이 주장하는 배후나 공범 2인에 대해서는 증거가 없다며 부정했다. 일본은 조총련과 특히 북한 배후에 대한 증거는 찾을 수 없다고 주장했으며, 한국정부가 김대중 납치사건으로 수세에 몰린 후 이를 역전시키는 한편 박정희체제를 강화하기 위해 자작극을 꾸몄다는 의심을 표명하기도 하였다. 어쨋든 박정희 정부는 이 사건으로 인하여 대외적으로 인권문제와 특히 김대중 납치사건으로 일본에 숙이고 들어가야 했던 상황이 여기서 극적으로 역전되었고, 미국 역시 인권문제에 대한 수위를 낮추었으며, 대내적으로는 학생운동까지 약화되는 등 그동안 궁지에 몰려 있던 정권의 ‘위기’를 일거에 해소하고 유신체제를 공고화할 수 있었다. 한마디로 피해자인 박정희가 가장 큰 정치적 수혜자였던 것이다. 하지만 사건에 대한 자세한 진상은 현재까지도 확실하게 규명되지 못하고 상당부분 베일에 가려져 있다. (more)
[육영수와 문세광] 1부 중앙정보부는 문세광을 알았다. 2부 문세광을 이용하라 MBC 이제는 말할 수 있다.(검찰, 문세광 공소장 공개키로) 문세광이 쏜 마지막 탄환은 육영수 여사를 맞혔는가? - 총성, 화면분석 전격 공개! 배후의 인물 '김호룡', 30년만의에 만나 단독 인터뷰. - "나는 배후가 아니다"
8.18 도끼만행사건 (1976.08.18)
판문점 도끼 살인 사건은 대한민국에서는 판문점 도끼 만행 사건, 북한에서는 8.18 판문점 도끼 살인사건이라고 부르는 사건으로 1976년 8월 18일 판문점 인근 공동경비구역 내에서 미루나무 가지치기 작업을 감독하던 미군 장교 2명이 조선인민군 군인의 도끼에 맞아 즉사한 사건이다. 그 미루나무는 공동경비구역에서 오래전부터 자라온 나무로서 남과 북 양측이 상대방을 감시하는 데에 지장을 주고 있었다. 그 당시 한국은 월남전에서 실전을 경험한 많은 병력과 최신예 무기를 다량 구입하게 됩니다.. 그래서 박정희 대통령은 이번이 통일의 기회라고 생각하고 있었고 때마침 그 사건이 터졌는데 초기에 미 포드정부는 월남전 후유증으로 강경대응을 자제하였고 우리정부에 압력을 가합니다. 그 때 우리정부는 판문점도끼만행이라고 사건을 명칭화하며 신문에 북한군이 아서대위의 등에 도끼찍는 사진을 내보냅니다..미국유명신문들도 당연히 내보내고 미여론은 사람으로서 할짓이 아니고 두명이 비겁하게 등뒤에서 도끼로 자국민을 죽이는 사진에 경악합니다. 포드정부도 여론에 밀려 강경대응으로 취하나 비선으로는 우리정부에 전쟁은 절대불가라고 통보합니다.. 이에 박정희 대통령은 공병대로 위장한 공수부대를 조직(1공수) 미루나무제거 작업에 보내고 문제가 된 북한초소들을 공격 완파시킵니다.. 이에 김일성은 진짜 전쟁발발 위협을 느끼고 절대 응전불가를 명하고 몇 시간뒤 긴급 수석대표회의를 요청하여 6.25이후 처음이자 마지막인 김일성의 사과성명을 발표합니다. 우리정부도 미국측의 요청으로 수락합니다. 그 후에도 대치상태는 1년정도 계속 유지됐습니다..박정희 대통령은 전쟁을 원했으나 역사상 가장 멍청한 정부로 뽑히는 포드정부는 반대했으므로 우리나라 단독으로 전쟁하기는 힘들다고 보여집니다. [당시 대치상황] 전쟁 가상하고 주한미군 가족들 일부철수 명령. - 수도권지역은 K16비행장과 오산비행장으로 집결,
1978년 대한항공 902편 격추사건. -. 사고 원인
-. 이후 1978년 4월 20일 대한항공 902편 격추사건의 개요가 러시아 인터넷판에 사고 당시 사진과 함께 게재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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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26사건이 일어나 대통령 박정희가 암살된 뒤 합동수사본부장을 맡고 있던 보안사령관 전두환과 육군참모총장이자 계엄사령관인 정승화 간에는 사건수사와 군인사문제를 놓고 갈등이 있었다. 전두환을 중심으로 한 신군부세력은 군부 내 주도권을 장악하기 위하여 정승화가 김재규로부터 돈을 받았다고 주장하고, 10·26사건 수사에 소극적이고 비협조적임을 내세워 정승화를 강제 연행하기로 계획하였다. 이를 실천에 옮기기 위하여 11월 중순 국방부 군수차관보 유학성, 1군단장 황영시, 수도군단장 차규헌, 9사단장 노태우 등과 함께 모의한 후 12월 12일을 거사일로 결정하고 20사단장 박준병, 1공수여단장 박희도, 3공수여단장 최세창, 5공수여단장 장기오 등과 사전 접촉하였다. 그리고 12월 초순 전두환은 보안사 대공처장 이학봉과 보안사 인사처장 허삼수, 육군본부 범죄수사단장 우경윤에게 정승화연행계획을 수립하도록 지시하였다. 이 계획에 따라 12일 저녁 허삼수·우경윤 등 보안사 수사관과 수도경비사령부 33헌병대 병력 50명은 한남동 육군참모총장 공관에 난입하여 경비원들에게 총격을 가하여 제압한 후 정승화를 보안사 서빙고 분실로 강제 연행하였다. 한편, 총장의 연행에 저항할지도 모르는 특전사령관 정병주, 수경사령관 장태완, 육군본부 헌병감 김진기는 보안사 비서실장 허화평에게 유인되어 연희동 요정의 연회에 초대되었다. 연회 도중 총장의 연행사실이 전해지자 정병주·장태완 등의 육군장성들이 대응태세를 갖추려 하였으나, 이미 전두환이 박희도와 장기오에게 지시하여 국방부와 육군본부를 점령하게 함으로써 육군지휘부를 무력화시킨 후였다. 이와 같은 일련의 사태진전은 당시 대통령 최규하의 재가 없이 이루어졌다. 사후 승인을 받기 위하여 신군부세력은 최규하에게 압력을 가하여 총장연행 재가를 요청하였으나 거절당하였다. 이에 신군부세력은 국방장관 노재현을 체포하여 그를 통하여 대통령이 총장연행을 재가하게 설득하였다. 결국 최규하는 13일 새벽 정승화의 연행을 재가하였고, 이후 신군부세력은 제5공화국의 중심세력으로 등장하였다. 이 사건의 주도세력인 전두환과 노태우가 대통령으로 재임한 1993년 초까지 12·12사태는 집권세력에 의하여 정당화되었으나, 그후 김영삼정부는 하극상에 의한 쿠데타적 사건이라고 규정하였다.
하나회의 군인이자 공무원, 계엄군, 정치인, 범죄자, 사형수이다. 아호는 일해(日海), 본관은 완산(完山)이다. 대한민국의 제 11·12대 대통령으로 1980년부터 1988년까지 대통령을 지냈다. 육군 제1공수특전여단장, 백마부대 29연대장, 국군 보안사령부 사령관, 12.12 사건 이후 중앙정보부장 서리, 국가보위비상대책위원회 상임위원장 등을 역임하고, 육군 대장 예편 후 정계에 입문했다. 10·26 사태 후 합동수사본부장이 되어 박정희 암살 사건을 수사하였다. 1979년 12월 12일 육군참모총장 정승화를 김재규의 협력자라는 혐의로 체포한 12·12 군사 반란을 일으켜 군부를 장악하였다. 12월 13일에는 보안사령관으로 중앙정보부 차장보를 겸직했다. 대통령직 퇴임 이후 민주정의당 명예총재, 국가원로자문회의 의장 등을 지냈으며, 1995년에 구속 기소돼 1심에서 내란죄 및 반란죄 수괴 혐의로 사형, 항소심에서 무기징역을 선고받았으나 1997년 12월 사면됐다. 당시 전두환은 특가법 상 뇌물수수죄로 추징금 2200억원을 선고받았다. 2013년 9월 추징금 완납계획을 발표했으나 아직 완납하지 않은 상태이다. |
대한항공 007편 격추 사건
1983년 9월 1일 미국 뉴욕 존 F. 케네디 국제공항을 출발, 앵커리지를 경유해서 김포국제공항으로 오던 대한항공 소속 007편 여객기(기종 : 보잉747-230B, 기체번호 : HL7442)가 비행 중 소련 상공에서 소련 공군 소속의 수호이 15(ru)의 공격을 받아 사할린 서쪽에 추락하여 탑승자 전원이 숨진 사건이다. 이 사건으로 래리 맥도널드(en) 미국 민주당 하원 의원을 포함한 16개국 269명에 달하는 탑승자 전원이 사망하였다. 비무장 여객기에 대한 소련 전투기의 공격으로 인한 격추 사건으로, 대한민국 및 서방 국가에 엄청난 반향을 일으켰다. 9월 2일부터 3일간 대한민국에서는 특별 애도 기간을 갖고 관공서와 가정에서 조기를 게양했으며, 정부는 사고 발생 직후 유엔 안보리 소집을 요청, 격추에 대한 항의를 했고 각국은 소련 항공기에 대한 운항 중지, 모스크바 취항 거부 등의 제재조치를 했다. 9월 5일 유가족 53명을 태운 훼리호는 사고현장에 갔지만 시신을 찾지 못하였다. 대한민국에서 일반적으로 김현희의 대한항공 858편 폭파 사건과 함께 양대 KAL기 사건으로 회자되곤 한다.
격추 후 소야 곶에 세워진 위령탑 사고 후 소련은 그것이 민간 여객기인지 몰랐으며, 미국이 소련의 반응을 알아보기 위한 고의적인 도발로 오해했다고 발표했다. 그러나 이 사건 탓에 자본주의 진영과 공산주의 진영의 관계는 다시 악화되었으며 미국의 로널드 레이건 대통령은 소련을 악의 제국이라고 비난하였다. 사고 당시 인근 상공에서는 미국·소련·일본의 치열한 정보 전쟁이 진행 중이었다. 뒤에 소련은 한국과 수교를 하며 당시 통신내용이 담긴 블랙박스를 무상 지급했으나 사건의 진상은 명확히 밝혀지지 않았다. 로널드 레이건 대통령은 이 사건을 계기로 군사용으로만 사용될 예정이던 GPS를 민간에게도 제공할 것을 공표하였다. 대한항공은 보잉사와 공동으로 새로운 기체 도색을 고안하여 현재까지 하늘색 도색을 사용하고 있다. 엔하위키미러에 당시의 상황과 경과과정 및 기타 내용들이 자세히 기록되어있다. 20년 만에 밝히는 83년 KAL기 격추사건의 실체 (UpKorea 2003.09.16) 한국기자 20년 만의 최초 인터뷰-KAL 007기 격추 소련 요격기 조종사 오시포비치 - 한국 유족들에게 사과했다 당시 격추명령을 내린 아나톨리 미하일로비치 코르누코프 러시아 공군 대장(예) 2014년 7월 1일 72세로 사망. 1983년 9월 1일 KAL기 격추사건 발생 (곰PD의 전쟁이야기 2007.09.01) "공중에서 사라진 269명"...'KAL 007 피격사건' 미스터리 [Ch.19] 세상에 없는 TV 이제 시작합니다. 2013. 9. 1. 아웅산 묘역 폭탄테러사건은 1983년 10월 9일 미얀마(당시 버마)의 수도 양곤에 위치한 아웅산 묘역에서 미리 설치된 폭탄이 터져 한국인 17명과 미얀마인 4명 등 21명이 사망하고 수십명이 부상당한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의 폭탄테러사건이다. 서석준 부총리, 이범석 외무, 김동휘 상공장관 등 각료와 수행원 17명이 순직하고 기타 수행원들이 부상당하였다. 사건 직후 대통령 전두환은 공식순방일정을 취소하고 귀국했다. 1983년 10월 8일 전두환 대통령은 공식수행원 22명, 비공식수행원 등을 데리고 동남아 5개국의 공식 순방길을 출발했다. 미얀마(당시 버마)는 당시 전두환 대통령의 동남아시아, 오세아니아 순방길의 첫 방문지였으며 이 날은 버마의 독립운동가 아웅산의 묘소에서 참배 행사가 예정되어 있었다. 10.9 아침에 전두환 대통령은 참배행사에 참석하기 위해 이동중이었고 테러범들은 전두환대통령의 방문 일정을 파악하고 차량에서 내릴때 폭사시키기 위해 미리 묘역에 폭발물을 설치해 놓았다. 전두환 대통령 도착 직전 북한의 특수공작원으로 구성된 테러범은 수행원 차량을 전대통령 탑승차량으로 오인하여 미리 장치해 놓았던 폭탄을 폭발시켰다. 도착 전이었던 전 대통령은 목숨을 구했지만 사건이 일어난 오전 10시 28분에는 애국가 예행 연습 중 서석준 부총리를 비롯한 수행 공무원들과 경호원, 기자들이 미리 대기해 있다가 순직하고 말았다.
대한항공 858편 폭파사건(大韓航空 858便 爆破事件, Korean Air Flight 858 Bombing)은 이라크 바그다드에서 출발한 KAL 858기가 1987년 인도양 상공에서 실종된 사건이다. 사건 당시 대한민국 정부는 북한에 의한 공중폭발로 결론짓고 사건조사를 마쳤다. 북한은 이 사건 때문에 미국의 테러지원국 명단에 올라 있었지만, 2008년 10월 명단에서 삭제되었다. 1987년 11월 29일 미얀마 안다만해역 상공에서 대한항공 보잉 707기는 북한 공작원 김승일과 김현희에 의해 공중 폭파되어 탑승객 115명 전원이 사망하였고, 이 사건은 1987년 10월 7일 김정일의 명령에 의해 88 서울올림픽대회를 방해하고, 대한민국 내 대정부 불신을 조장을 목적으로 하였다. 여객기 폭파후 두 폭파범은 1987년 12월 1일 바레인 공항에서 조사를 받던 중 김승일은 독약으로 자살 하고, 김현희는 남한으로 압송하였다. 사건에 대한 의혹 제기 수사 결과 발표에도 불구하고 사회 일각에서는 사망자들의 시체 미발견등으로 사건에 대해 의문을 제기 -. 블랙박스가 발견되지 않음 (안기부에서 일부를 폐기하였다는 설 주장) -. 대한항공 858편 폭파사고 사망자 시체, 유품이 발견되지 않음 -. 국가안전기획부(現 국가정보원)의 빠른 수사 종결처리 이에 대해 국가정보원의 과거사 진실 규명위원회가 조사를 하여, 2006년 8월 그리고 2007년 10월, 진실위는 이 사건에 대해 "조작이 아니다"라는 결론을 내렸다. 1987년 11월 29일 승객 115명을 태운 KAL858기가 인도양 상공에서 방콕과 최후 교신 뒤 실종. 1987년 12월 11일 KAL기 잔해 물체를 발견하였으나, 12월 15일 미국방성은 KAL기 잔해가 아니라고 보고. 1987년 12월 16일 대통령 선거 실시. 안기부 주관으로 하치야 마유미 신상확인 조사 착수. 1988년 01월 15일 어느 한 여성이 TV기자 회견을 통해, 자신의 이름은 김현희이며, 김정일의 사주로 88올림픽 방해와 대통령 선거 혼란 야기, 남한내 계급투쟁 촉발을 위해 KAL858기를 폭파하였다고 발표. 1989년 02월 03일 서울지검은 김현희에 대해 살인죄, 항공기폭파치사죄, 국가보안법 위반으로 불구속 기소. 1990년 03월 27일 김현희에 대해 대법원의 사형선고. 1990년 04월 12일 김현희에 대한 사면 조치 1991년 06월 02일 김현희는 수기집 《이제 여자가 되고 싶어요》를 발간. 1992년 07월 01일 김현희는 수기집 《사랑을 느낄때면 눈물을 흘립니다》를 발간. 1997년 12월 28일 전직 안기부 직원과 김현희 결혼. 2004년 03월 23일 국가정보원은 KAL기 의혹을 제기한 책 《파괴공작》의 출판사 창해 대표에게 10억원 손해배상 소송 제기. 2004년 05월 22일 ~ 23일 KBS는 〈KAL858기의 미스터리〉를 방영하여, 수사결과에 대한 거짓부분을 밝힘. 2004년 06월 28일 법원은 국가정보원의 《파괴공작》 판매금지 가처분 신청 기각 판결. ■ KAL기 폭파범 김현희의 최근 (2014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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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6년 강릉시에 북한 특수부대가 상어급 잠수함으로 침투한 사건이다. 이들은 한국군에 의해서 생포 내지 사살로 소탕되었지만, 북한 민중들의 식량난 해소를 위한 식량지원으로 화해분위기가 조성되던 남북한관계가 외교관계가 침체되었다. 1996년 9월 18일 A.M. 1:00분경 강릉시 강동면 동해고속도로상에서 택시기사 이진규(이후 1억 5천 가량의 포상금 지급)가 거동이 수상한자 2명과 동해상 해안가에 좌초된 상어급 잠수함 1척(길이35m,폭3.8m,무게300t )을 경찰에 신고 하였다. 좌초된 잠수함은 북한의 소형 잠수함으로 확인됨에 군,경,예비군 합동으로 무장공비 소탕 작전에 돌입하였다. 이 수색,소탕 작전중 잠수함과 도주로 주변에서 중화기인 대전차 로켓을 비롯하여 M-16,AK소총,정찰용지도등 유류품 367종 4380점을 노획하고 조타수 이광수 (31세)를 생포하였다. 또 9월 18일 오후3시45분 아군이 공비의 예상 도주로를 헬기를 통해 수색하던 중 청학산 부근에서 무장공비의 사체 11구를 발견했다 이 것들은 동승했던 총책 인민군 대좌이하 정찰조원들에 의해 잠수함 좌초책임을 물어 사살한것으로 추정되는 사체들이였다.
1999년 6월15일, 서해 연평 앞바다에서는 우리 해군이 북방한계선(NLL)을 침범한 북한 경비정과 목숨을 내 건 사투를 벌여 우리 바다를 지켜낸 날이며, 이를 ‘제1연평해전’이라고 한다. 당시 북한 함정의 기습공격에도 불구하고 우리 해군은 북한 함정들을 향해 돌진하며 40㎜·76㎜ 기관포로 응사해 교전이 일어난 지 14분여 만에 북한 함정을 격퇴하는 승리를 거뒀다. 1999년 6월 15일 참수리급 고속정이 부딪혀 막는 일명 "밀어내기 작전"으로 대응한 제1연평해전 이후, 한일월드컵이 막바지에 이른 2002년 6월 29일에 연평도 근해 북방한계선에서 북한의 무력 도발로 충돌이 일어났다. 차단기동을 하던 한국해군 참수리 고속정 357호를 향한 북한군 등산곶 684호의 지근거리 기습 함포공격으로 시작된 전투는 함포와 기관포를 주고 받는 치열한 격전 후 대한민국의 피해는 6명이 전사, 19명이 부상하고 전투종료 후 복귀 도중 참수리급 고속정 357호가 침몰하였다. 한편 북한의 피해는 약 30여명의 사상자를 내고 SO-1급 초계정 등산곶 684호가 반파된 채로 퇴각하였다. <정부 대응 비판> 제1연평해전 이후 김대중은 선제공격을 하지 말라는 교전 수칙을 지시했다. 이후 제2연평해전 국군 피해가 컸던 것은 교전 지침 때문이라는 증언이 있었다. 이 사건이 발생했음에도 불구하고 당시 대통령 김대중은 제2연평해전 전사자의 영결식에 불참했으며 같은 시각 일본의 요코하마에서 2002년 FIFA 월드컵 결승전 브라질 대 독일의 경기를 관전하고 있었다. 당시 김대중은 북한의 무력 도발로 제2연평해전이 발발하여 국군 6명이 전사하였음에도 국가안전보장회의를 4시간 35분만에 여는 등의 늦장 대응을 했다. 군통수권자인 김대중의 주재로 열린 국가안전보장회의(NSC)는 우발적 충돌로 결론지었고, 같은 내용의 북한 통지문이 오자 그대로 수용했다. 김대중은 교전 다음날 예정된 금강산 관광선을 출항시켰다. 제2연평해전 발발 다음날인 30일 김대중은 월드컵 결승전이 열리는 일본 사이타마로 출국하여 결승전 경기를 관람했다. 교전 이틀 후 국군수도병원에서 해군장으로 거행된 합동영결식이 열렸을 때조차 김대중은 참석하지 않았으며 국무총리, 국방부 장관, 합참의장 등 내각과 군의 핵심 인사들마저 참석하지 않았다. 또한 월드컵 특수를 노린, 방송사들의 시청률 경쟁에 의해 교전 소식은 국민들에게 깜짝 소식이 되긴 했지만 큰 이슈를 남기지 못했다. 공중파로 대표되는 방송3사 또한 제2연평해전을 단신으로 처리하고 당일 있었던 3,4위 결정전 중계에 초점을 맞췄다. <피해가 컸던 이유> 참수리고속정의 약한 방어력과 부족한 화력, 그리고 차단기동 등으로 기습에 취약하였다. 또한 적의 해안에 위치한 대함미사일 실크웜의 위협때문에 아군의 초계함이 가까이 접근 할 수 없었다. <교전 이후 양국 해군의 변화> 한국 해군은 교전 수칙을 개선하고, 함대의 구성 또한 바꾸었다. '경고방송→시위기동→차단기동→경고사격→격파사격'으로 돼 있던 교전수칙이 2004년 '경고방송 및 시위기동→경고사격→격파사격'의 3단계로 단순화되었다. 그리고 현장지휘관의 권한을 강화하여 즉각대응 능력을 높였다. 또한, 한국 해군은 제2연평해전의 전훈을 반영해 기존의 참수리급 고속정에 소총수용 방호구조물을 설치하는 등 소폭 개량하였고, 보다 대형화되고 강력한 화력과 방호력을 갖춘 신형 고속함 PKX를 개발한다. 그리고 이 PKX의 네임쉽인 1번함에는 故윤영하 소령의 이름을 따 윤영하함이라는 이름이 붙었다. 이후 건조되는 윤영하급 함정에는 차례대로 제2연평해전 전사자의 이름이 붙여졌다. 2009년 9월 23일 진해에 위치한 STX 조선해양에서 윤영하급 유도탄 고속함(PKG-A)과, 같은급 함선인 한상국, 조천형함의 진수식을 가졌다. 이후 2010년 9월~10월 해군에 인도되며, 참수리급 고속정 교체사업에서 윤영하함 포함 24척을 건조하게 된다. 북한에선 해당 전투 전사자들을 전원 영웅급으로 추서하였다고 하며, 또한 문서 위의 북한군의 증언에서 언급되는 고폭탄 파편에 대응하고자, 북한 해군은 전투시 여름에 엄청 더울 듯한 솜으로 만든 파편 방호복을 입도록 교리를 수정했다고 한다. 그리고 2012년 들어서는 윤영하급 등장으로 인한 북한 전투함의 화력 부족을 보강하기 위해 이란으로부터 도입한 76mm 주포(윤영하급의 주포와 동일한 모델)를 장착한 신형 전투함을 배치하는 것이 확인되었다. -. 제2 연평해전 [엔하위키] “발포명령만 내리면 바로 발포하겠다” 이틀 전 도발징후 묵살한 김대중 정부 2009년 11월 10일 11시경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의 경비정 한 척이 서해 북방한계선(NLL)을 침범하여 남하하자(대청도 동쪽 11.3km 지점) 5차례 경고방송을 했고, 이에 응하지 않자 대한민국 해군은 경고사격을 가하였다. 이에 조선인민군 해군의 경비정이 조준사격하면서 교전으로 이어졌다. 그 결과 조선인민군 해군의 경비정은 반파되어 다른 함선에 예인되어 북상하였고 8명의 사망자가 발생하였다. -. 靑海의 블로그
남북 장성급군사회담 북측 대표단 단장은 13일 남측 단장에게 통지문을 보내 최근 서해교전과 관련, 서해에는 "오직 우리가 설정한 해상군사분계선만이 있다"며 "지금 이 시각부터 그것을 지키기 위한 우리의 무자비한 군사적 조치가 취해지게 될 것"이라고 말했다. 북한이 이번 교전과 관련해 '군사적 조치'를 명시적으로 언급한 것은 처음이다. 북측 단장은 북한의 조선중앙통신에 보도된 통지문에서 "위임에" 따라 "사태의 엄중성에 대한 다음과 같은 우리 군대의 원칙적 입장"을 통지한다며 이러한 제3항을 포함해 4개항의 입장을 밝혔다. 북측은 제2항에서 "남측의 북방한계선 고수 입장이 더 이상 통하지 않는다는 것을 똑바로 알고 시대의 요구와 민족의 지향에 맞게 분별을 가려 처신하여야 할 것"이라고 주장했다.
시간대별 상황 설명과 남북한 관통하는 북한강, 임진강,한탄강의 댐 | |||
북한의 도발은 군사분계선에만 국한 되지 않는다. |
■ 천안함 침몰사건 [위키백과] [천안함 Story] -. '그것이 알고 싶다'로 돌아 본 천안함 미스터리. [이정환닷컴] -. 천안함, 동북아 흔든 ‘지정학적 사건’ - [MB 3년, 한반도와 동북아] 냉전회귀 넘어 열전 방불케 -. 천안함사건 요약 - 천안함 Story -. 천안함 침몰사건 ‘첫 재판’ 모두진술 프레젠테이션 (서프라이즈 / 신상철 / 2011-08-22) -. 魚雷 공격으로 두 동강이 나지 않는 한, 軍艦은 절대로 금방 가라앉지 않는다 ■ 북한의 연평도 민간인 포격 만행 [위키백과] 중국을 제외한 각국 정부는 북한의 도발을 규탄했으나, 북은 남측에 책임을 넘기며 정당한 군사적 대응이라고 주장했다. 이 사건은 천안함 사건 이후로 벌어진 것으로 남북간의 갈등이 더 심화되었으며, 연평도 주민들은 대부분 섬을 떠나게 되었다. -. 연평도 포격사태 보고서 [Bemil의 군사고문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