터키 남동부 샤늘리우르파(Şanlıurfa) 근처에 있는 선사시대 유적.
제식적인 중요성을 지닌 성역이었던 것으로 추측되는 이 유적에는 조각이 새겨진 여러 겹의 거석들이 남아 있다.
괴베클리 테페는 1996년에 발견되었고 아직 그 발굴 진척도가 10%에도 이르지 못하였다.
그 고고학적 의의도 완전히 밝혀지지 않아 일반인들에게는 아직 친숙하지 않으나, "사상 최대의 고고학적 발견" 으로 불리울 만큼 충격적인 발견이었다.
그리고 그 연대는 약 11000년 전 정도로 추정되는데 이는 신석기 시대 초기에 해당하는 시기로서 영국의 스톤헨지보다 6천년이나 앞선 것이다.
연구에 따라 이 연대는 더 과거로 내려갈 가능성도 여전히 남아 있다고 한다.
The ruins of Göbekli Tepe 4,288 × 2,848 pixels.
2011년 발굴 모습으로 당시 발표에 의하면 아직 지하에 13개의 써클이 더있다고 한다.
Göbekli Tepe (Turkish: [ɡøbe̞kli te̞pɛ], "Potbelly Hill"), is an archaeological site at the top of a mountain ridge in the Southeastern Anatolia Region of Turkey, northeast of the town of Şanlıurfa. The tell has a height of 15 m (49 ft) and is about 300 m (984 ft) in diameter. It is approximately 760 m (2,493 ft) above sea level. Since the mid-1990s, it has been excavated by a German archaeological team that since 1996 has been under the direction of Klaus Schmidt.
The tell includes two settlement phases dating back to the 10th-8th millennium BC. During the first phase (PPNA), circles of massive T-shaped stone pillars were erected. More than 200 pillars in about 20 circles are currently known through geophysical surveys. Each pillar has a height of up to 6 m (20 ft) and a weight of up to 20 tons. They are fitted into sockets that were hewn out of the bedrock. In the second phase (PPNB), the erected pillars are smaller. They stood in rectangular rooms. These rooms had floors of polished lime. Obviously, the site was abandoned after the PPNB-period. Younger structures date to classical times. The function of the structures is not yet clear. The most common opinion, shared by excavator Klaus Schmidt, is that they are early neolithic sanctuaries. (more)
Göbekli Tepe, is a hilltop sanctuary erected on the highest point of an elongated mountain ridge some 15 km northeast of the town of Şanlıurfa, in southeastern Turkey and 500 miles away from Istanbul, Turkey. It is the most astonishing archaeological discovery in modern times and also thought to be the oldest advanced civilization on Earth.
Göbekli Tepe는 터키어로 '배불뚝이 언덕'이란 뜻으로, 터키 남동쪽 샨르우르파(Şanlıurfa)도 외렌직(Örencik)군에 있는 유적이다. 해발 760미터에 위치한 언덕 정상에 묻혀있었다. 현지인이 우연히 찾아서 몰래 파내려다가 발각되었고, 1963년에 미국 시카고 대학과 터키 이스탄불 대학의 공동조사를 통해 처음 세상에 알려졌다. 독일인 고고학자 클라우스 슈미트를 단장으로 한 조사단이 1994년부터 2014년까지 본격적인 발굴조사를 하였다. 20여 개에 달하는 원 모양으로 세워진 총 200개 이상의 T자 형태 돌기둥 유적이 특징이며, 그중 가장 높은 것은 5.5미터에 달한다.
이렇게 보면 그냥 평범한 고대 유적지로 보이지만...
충격적인 것은 이 유적이 만들어진 시기가 기원전 80-100세기, 그러니까 지금으로부터 무려 12,000년 전이라는 것이다.
현재까지 발굴된 제3계층의 연도는 9100~8600년 전으로 분석되었으나, 그 중심의 제의를 지내던 단상 부분은 기원전 11000, 혹은 그 이전인 플라이스토세 말까지도 올라간다고 추측된다. 더더욱 놀라운 것은 유적이 발견된 언덕 주변을 레이더 스캔한 결과 또다른 구조물들이 지하에서 발견됐는데 이들의 연대는 매머드가 활동하던 시대인 플라이스토세에 해당되는 14,000~15,000년 전이라고 추정된다는 사실이다.
이는 메소포타미아, 이집트의 고대유적을 아득히 뛰어넘을 뿐 아니라, 현재까지 발견된 어떠한 문화 유적까지 앞서 가장 오래된 유적이다.
현대에서 기록이 남아있는 가장 오래된 문명인 수메르 문명과 현재의 연도 차이보다, 수메르와 괴베클리 테페의 연도 차이가 더 크다. 간단하게 보면 다음과 같다:
괴베클리 테페 → (약 7,000년 경과) → 수메르 문명 → (약 5,000년 경과) → 현대시대
이 시기는 겨우 원시적인 농업이 시작되려던 신석기 시대 초기로 추정되는 시기인데, 고고학계의 기존학설에 따르면 인류가 이러한 거대유적을 조성하려면 체계적인 노동력이 필요하고, 이를 뒷받침하려면 농경생활에 따른 체계적 사회조직이 등장해야 한다고 전제하였다. 현재까지 알려진 괴베클리 테페는 이러한 학설을 정면에서 부인한다. 그야말로 실존하는 초고대문명이다. 본격적으로 발굴되고 자료들이 축적되면서 국가체계를 갖출 정도로 발달된 문명이 이 시기부터 이미 존재하지 않았냐는 주장이 주류학계에서 계속해서 제기되면서 조금씩 힘을 얻는 추세다. (more 나무위키)
터키어로 '배꼽모양의 언덕'(belly hill)을 뜻하는 괴베클리테페는 시리아와의 경계 근처에 있는데, T자 모양의 석회암 거석들이 원형으로 모양을 이루고 있다. 그 거석들 중 일부는 높이가 5m가 넘고 무게가 50t 이상 나간다. 이러한 형태가 서로 겹쳐져 있는 것도 있다. 완성된 각 원형은 흙으로 덮고, 바로 그 위에 같은 작업을 되풀이하는 방식이었다. 어떤 거석들은 무늬가 없는 반면 어떤 거석들은 넓은 면에 여우, 전갈, 사자 등 여러 형상들을 공들여 조각했다. 스톤헨지보다 시기적으로 6,000년 가량 앞서는 괴베클리테페는 1960년대에 처음 조사가 시작되었으나, 당시에는 중세 묘지로 간주되었다. 1990년대에 다시 발굴이 시작되어, 그제서야 축조 시기가 제대로 밝혀졌다. 이 유적지에서 발굴한 유물인 당시 도구들을 탄소 연대 측정에 의해 인근 유적들의 유물들과 비교하여 시대를 추정했다.
야생식물이나 수많은 동물 뼈, 특히 가젤의 뼈들이 이곳에서 발견되었다. 그러나 쓰레기 구덩이나 난로, 기타 다른 주거생활의 흔적들이 없는 것으로 보아 이곳은 거주지역이 아니었을 것으로 추측된다. 대부분의 전문가들은 이곳을 제식용 장소로 파악하고 있으며, 멀리서부터 참배자들이 찾아왔을 것으로 추측한다. 이 유적의 유물들을 통해 괴베클리테페를 수렵 채집인들이 건설한 것으로 추정한다. 그렇게 많은 양의 야생동물들의 뼈가 남아 있다는 것은 그들이 아직 가축을 기르거나 농사를 시작하지 않았다는 것을 나타낸다. 이 유적으로 어떤 전문가들은 정착생활과 사회문화 발달 사이의 관계를 재고하기도 했다. 정착생활이 사원 건설과 복잡한 사회 구조의 전제조건이라는 가설이 오랫동안 유지되어 왔던 것이 사실이다. 그러나 괴베클리테페 건설을 위해 많은 일군들이 한곳에서 기거하며 먹고 자는 것이 필요했을 것이다. 즉, 협동해야 하는 일이 정착생활에 뒤이어 일어난 것이 아니라, 그 일 때문에 정착생활이 필요했으리라는 뜻이다. [Britannica]
Göbekli Tepe : The Birth of Religion [National Geographic]
We used to think agriculture gave rise to cities and later to writing, art, and religion. Now the world’s oldest temple suggests the urge to worship sparked civilization.
괴베클리 테페는 신전으로 추정되며 주변에 마을이나 도시의 흔적은 없다. 농경이나 목축이 있던 시기가 아니라 이 시기의 사람들은 수렵채집을 하며 먹고 살았었다. 그러니까, 사람들은 오로지 종교적 목적을 위해서 이 신전을 세웠다는 거다. 이는 사람들이 한 장소에 모여 살기 전부터 종교가 먼저 존재했고, 종교를 중심으로 문명이 생겨난 것이 아닌가 하는 추측을 가능하게 한다. 내셔널 지오그래피에는 "종교의 탄생' 이라는 제목으로 소개하고 있다. 흔히 알려져있는 '문명의 조건'에 맞지않는 다는 것이 흥미롭다. (more)
12,000 Years Old Unexplained Structure(History) 리얼 대탐험 130904 인류 최초의 신전, 터키 괴베클리 테페 (원본 National Geographic)
지구는 10만 년 동안 지속된 빙하기가 끝나고 1만3천 년 전부터 다시 따뜻해진다. 이때부터 인류는 비약적으로 발전하기 시작한다. 예를 들면, 동북아시아 아무르강 하류에서 매우 우수한 토기 유적의 발굴로 인류 문명의 시작을 알린다. 그러나 이후 지구에는 BC 10,500년~8,500년까지 소빙하기가 도래하여 다시 추위가 엄습한다. 이때 아무르강 유역의 사람들은 남하하여 추위를 피하지만, 터키의 고원 남단 산자락에서는 오히려 고도의 석기문명이 나타난다. 인류 최초의 거석기 유적인 터키의 괴베클리 테페이다. 이것은 1만1천 년 전의 작품이라고 믿기 어려운 놀라운 거석문명이다. 지구의 이 석기문명 이후, 인류의 문명은 지난 1만 년 간 지속된 이례적인 따뜻한 간빙기를 맞아 비약적으로 성장하였다.
1994년 매우 뜨거운 한여름에 쿠르드의 양치기들이 동부 터키의 롤링 평원에 있는 메마른 언덕을 넘어 인근 주민들이 신성시하는 뽕나무를 지나가며 양떼에게 풀을 먹이고 있었다. 정적을 깨며 종소리만이 울려 퍼지고 있었는데, 양치기가 그때 무언가를 발견하였다. 웅크리고 앉아 흙먼지를 쓸어내자 직사각형의 거대한 돌이 드러났고 주변에서도 이와 유사한 흔적들이 발견되었다. 양치기는 이 사실을 마을에 알렸다. 이 발견은 몇 주 후 수십 마일 떨어진 산리-우르파 박물관에 알려지게 되었고 그 후 이스탄불에 있는 독일 고고학 연구소에도 소식이 전해졌다. 1994년 가을에 독일의 클라우스 슈미트(Klaus Schmidt)가 괴베클리 테페에 왔고 이듬해부터 발굴을 시작하였다.
둔덕은 높이가 45m에 직경이 300m이고 해발 760m에 위치하고 있는데, 1994년에 이스탄불 대학과 시카고 대가 이 언덕이 자연적인 언덕은 아닌 듯하며, 비잔틴 시대의 무덤이 이 밑에 있을 거라고 추정하였다. 그 이유는 당시에 발견된 다량의 부싯돌과 석회암 돌조각들을 토대로 중세 무덤의 잔해로 추정했기 때문이다. 이 언덕은 오랫동안의 경작으로 인하여 돌이 옮겨지는 등 유적이 많이 훼손되었다. 클라우스 슈미트에 의하면, 괴베클리 테페와 같은 종교 건축의 이면에는 종교와 이동 가능한 노동이 구석기에서 신석기로 이행하는데 중요한 역할을 하였다고 본다. 슈미트는 원래 다른 지역을 발굴하려다 부싯돌 조각들이 선사시대 유적임을 한눈에 알아차리고 그 다음 해에 발굴을 시작하였다.
산리-우르파 박물관과 공동으로 발굴하여, T자형 석회석 돌기둥이 이내 발굴되었고, 처음에 돌기둥을 발견한 지점에서부터 인근에서 돌기둥들이 잇달아 발견되면서, 이 돌들을 파내다보니 직경 3~5m의 원환으로 서 있는 돌기둥들이 드러나게 되었다. 돌기둥은 원환의 가운데 것이 가장 큰데, 높이가 최대 5.5m, 무게가 10~20t에 이른다. 현재까지 발굴된 원환은 4개인데, 원환은 이 발굴분을 포함하여 16여개에 이르는 것으로 추정이 되고, 각 원환마다 16개 정도의 석회석 돌기둥이 있어, 돌기둥은 총 200개 정도로 추정한다. 돌들은 100m 아래의 지반에서 부싯돌의 뾰족한 끝으로 떼어내 운반한 것으로 판명되었다. 각 원환에는 두 개의 돌기둥이 위치하고 있는데, 추측으로는 이 두 개의 돌기둥 위에 구조물이 있어 지붕이 있었을 것으로 본다.
슈미트는 이 지역이 인근 160km 이내의 순례자들이 참배하는 성스러운 장소였을 거라고 한다. 그 이유는 어떤 경작이나 도살 및 요리의 흔적도 없이 다만 사슴, 가젤, 돼지, 거위의 뼈다귀가 발견되었기 때문이다. 즉, 말하자면 먹을 것을 싸들고 와서 먹었다는 점과 물이 인근에 존재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각 돌기둥은 추상화된 수수께끼 같은 상형 그림과 동물 부조로 조각이 되어 있다. 상형 그림은 선사인들의 동굴 벽화에 등장하는 것과 유사하다. 부조에 조각된 동물들은 야생 들소, 야생 돼지, 여우, 가젤, 당나귀, 뱀, 파충류, 곤충, 거미, 새 등이며 그 중에서도 독수리가 두드러진다. 즉, 이런 그림을 보고 추정하면, 그 당시에는 지금의 건조한 사막기후와는 달리 이 지역이 강수량이 많은 지역으로 정착생활을 하였다는 점과 농경 바로 전 상태인 진흙토기시대로 진화할 수 있는 풍부한 여건인 것을 알 수 있다. 독수리 문양이 나온 것은 티벳이나 조로아스터교의 조장의 풍습과도 연계해 볼 수도 있다. 단, 여기서 특이한 점은 사람 모습의 조각 부조는 없다.
이 유적은 1·2·3기층으로 나뉘는데, 가장 오래된 3기층에서 커다란 원환 구조물이 만들어지고, 후대인 2기층에서는 구조가 사용에 편리한 사각형 구조로 바뀐다. T형 돌기둥은 2기에도 만들어지는 것으로 보면, 성소로서 역할을 한 것 같다. 3기층 연대는 BC 9,600~8,800이고, 2기층은 BC 8,800~8,000이다. 완성된 각 원형은 흙으로 덮고, 바로 그 위에 같은 작업을 되풀이하는 방식이었다.
이들의 생활은 가축화와 농경의 흔적은 없고, 이들이 수렵과 채집에 의존하는 생활을 하였지만, 이들이 대규모 마을을 이루어 군집생활을 하였음이 드러났다. 즉, 토기, 금속, 바퀴, 가축화, 문자 등의 출현이 없는 분명히 신석기 이전의 후기 구석기 사회이지만 굉장히 조직화된 사회가 존재했었다는 것이다. 예를 들면, 10t 이상의 돌기둥을 밑에서 100m을 옮기는데 적어도 500명 이상의 인원이 필요하다. 이 정도의 사회를 조직하고 유지하는 사회체제가 있었다는 것이다. 이 신전을 지은 사람들에게는 수레나 짐을 나르는 동물 따위가 없었는데도 16t이나 되는 돌들을 자르거나 다듬고 운반하였다니 놀라울 뿐이다.
이 유적의 사용흔적은 BC 8,000년부터 사라지는데, 아마도 가축화와 농사에 따르는 신석기 혁명에 휩쓸렸거나 아니면 소빙기가 끝나면서 기후변화로 인한 사막화 등으로 뒤안길에 묻힌 것으로 보인다. (more)
괴베클리 테페는 세워진 뒤 약 2천 년간 신전으로 사용된다. 원 모양으로 세워진 기둥들은 시간이 지나면서 고의적으로 메워진 뒤 인근에 새로운 기둥들을 세우는 등 몇 번에 걸친 변화가 이루어진다. 후기로 갈수록 기둥을 제작하는 방식은 단순해지고 조잡해지는 경향이 있고, 결국 기원전 8000년쯤 괴베클리 테페는 버려져 땅속에 묻힌다. 다만 특이한 점은 신전이 사람들의 왕래가 끊기며 자연스럽게 묻히지 않고 사람들이 고의적으로 땅을 파 기둥을 메운 뒤, 그 위에 석회 자갈과 석기 도구들, 그리고 동물과 인간의 뼈를 묻은 뒤 버렸다는 점이다.
고의적으로 신전을 매장한 흔적이 있는 것으로 볼 때 종교/정치적인 분쟁이나, 지배 계급에 대한 반란 등에 휘말렸으리라는 시각이 존재한다. 예를 들면 새로운 종교를 믿는 무리가 신전 일대를 지배하게 되면서 괴베클리 테페를 일종의 이교도의 건축물로 규정하고 묻어버렸거나, 혹은 그 이전에 누군가가 돌기둥들을 숨기거나 보존하기 위해 묻었다는 것. 이 주장은 파괴의 흔적이 나타나기보다는 돌기둥들이 비교적 '온전하게' 묻혔다는 사실로 유추할 수 있다. (괴베클리 테페의 몰락 - 나무위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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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hree views of a unique 1.5-metre-tall sculpture that was found defaced and buried within a stone wall. The excavators have nicknamed it the 'totem-pole' because it is composed of a series of figures each holding the next figure down. The head of the top figure is more like a bear than a human. It holds the head of a human figure, which in turn holds another figure. On each side there is a snake.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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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만 1600년 전 터키 남부 지방에 세워진 신전인 괴베클리 테페의 돌기둥들. 가장 큰 것이 높이 5.5m에 달한다. 전면에 있는 돌기둥에 새겨진 인물 형상을 보면 로인클로스(허리에 둘러 입는 옷)가 드리워진 허리띠 위에 양손이 위치해 있다. |
몸통이 긴 여우 형상이 새겨진 돌기둥 하나가 별이 반짝이는 밤하늘을 배경으로 서 있다. 훼손되기 쉬운 이런 양각 그림들을 보존하기 위해 고고학자들은 올해 이 유적지에 지붕을 씌울 계획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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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자 모양의 돌기둥에 세련되게 양각해 놓은 독수리, 전갈 따위의 동물 형상은 숙련된 장인들이 만든 것으로 보인다. 이것은 수렵과 채집을 하던 고대인들에게도 복잡한 사회 구조를 갖출 만한 능력이 있었음을 보여주는 증거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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터키 남부, 시리아 북부, 이라크의 여러 신석기 시대 유적지에는 세계 최초의 조직화된 종교의 출현을 암시하는 단서들이 산재해 있다. 가장 흔하게 만들어진 우상은 이제 막 형성된 인류의 정착지 너머에서 배회하는 멧돼지를 비롯한 위험한 동물들의 모습이다. 여기 사진 속에 나오는 멧돼지 형상의 조각상은 괴베클리 테페에서 출토됐다. |
세계 최초의 조직화된 종교에서 흔히 발견되는 또 하나의 상징적 동물은 뱀이다. 이 뱀 형상은 네발리 초리에서 출토된 사람의 머리 뒤통수에 새겨져 있었다. 터키 남부에 있는 샤늘르우르파 박물관에서 사진 촬영. |
세계에서 가장 오래된 신전인 괴베클리 테페에서 14km 떨어진 터키 동남부에서 발견된 실물 크기의 인간 조각상. 만들어진 시기는 BC 8000년경으로 추정된다. 수렵-채집 사회가 점차 복잡한 사회구조로 바뀌면서 인간과 신의 모습들이 나타나기 시작했다. |
5톤이나 나가는 석회암 기둥에 으르렁거리는 맹수의 조각상이 돌출되어 있다. 이 석회암 기둥은 장인들이 인근 채석장에서 수레나 소ㆍ말 등 사육 짐승들의 힘을 빌리지 않고 운반해 온 것이다. |
괴베클리 테페 부근의 석회암 언덕에서 고고학자들은 일부분만 채석된 돌기둥을 발견했다. 멀리 보이는 언덕이 괴베클리 테페 유적지다. |
터키 동남부 지방의 일부 농민들은 오늘날에도 낫으로 밀을 수확한다. 이곳에서는 최초로 외알 밀을 재배했는데, 괴베클리 테페 신전을 찾은 많은 참배객들에게 식량을 공급하려는 시도가 그 계기였던 것으로 추정된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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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t Gobekli Tepe temple site |
돌에 양각된 남자와 여자로 보이는인물들. 종교적 집회에서 춤을 추는 제관(祭官)들을 표현한 것으로 보인다. |
기둥위의 구멍의 용도는? 우리나라 고인돌처럼 별자리 측정용일까? |
매장된 고대인의 모습. Urfa Museum, Sanliurfa, Turkey |
View of site and excavation 4,117 × 1,449 pixels.
원래 1964년에 미국 고고학자들이 연합하여 터키의 남동 지방에 들어왔다고 한다. 그들은 이상한 언덕들 여러 개가 수만 개의 깨진 돌조각들을 뒤덮고 있다는 사실에 의문을 품었다. 이 유적지가 고대인들이 어떤 활동을 했는지 알려줄 소중한 정보가 될 거라고 판단했던 것이다. 그러나 그들은 아무것도 발굴하지 못한 채 곧 그곳을 떠났다. 그렇게 떠난 이후 20년이 지난 뒤 독일의 고고학자 클라우스 슈미트가 1994년 부터 독일 고고학연구소와 우르파 박물관과 합작해 본격적인 발굴에 착수했다. 지금까지 발견된 고대 건축 구조물 중 가장 오래된 것으로 알려졌다.
괴베클리 테페의 ‘테페(tepe)’는 곧 테페이(teppay)라고 발음하는데 터키어로 ‘배꼽 언덕’이라는 뜻이다. 수십 개의 거대한 돌기둥이 겹겹이 둥근 원을 이루고 있으며, 인류가 처음으로 만들었던 기존의 가옥구조 보다 더욱 크고 복잡한 형태를 띠고 있다. 이 돌기둥들은 1만 1600년 전에 세워졌으며 기자 대 피라미드보다 7000년이나 앞섰으며, 현존하는 가장 오래된 신전(神殿)의 형태도 있다. 터키 남동부 지역에서 건축물이 세워진 시기에 세계 어디에도 이와 비교할만한 규모의 건축물은 존재하지 않았다. 하나의 돌기둥이 다른 하나의 돌기둥을 받치는 형태는 마치 영국의 스톤헨지를 떠올리게 하지만 스톤헨지보다 약 2배는 오래됐다.
괴베클리 테페의 기둥들은 거칠게 깎인 것이 아니라 정교하게 조각되고 새겨진 석회석 기둥이다. 돌기둥엔 가젤과 뱀, 여우, 전갈, 멧돼지 등 동물이 양각으로 새겨져 있다. 돌기둥은 매우 방대했다. 가장 높은 것은 5.5미터이고 무게는 16톤에 달했다. 돌기둥 표면엔 각종 동물 형상이 부조됐고 모양은 서로 다른 풍격을 지니고 있었다. 조각이 거친 것을 비롯해 비잔틴 예술품처럼 정밀하고 상징적 의미가 풍부한 것도 있었다. 슈미트는 또 산자락의 여러 곳에서 고대 유물이 어마어마하게 널려 있는 것을 발견했다. 그곳은 신석기시대의 칼, 도끼, 투척 무기 등 창고였다. 이 돌은 인근지역의 골짜기에서 운반해온 것이었다. 슈미트는 “이곳의 1, 2평방미터 범위 내에 널려있는 돌들은 많은 고고학자들이 기타지역 유적에서 발견한 것보다 더 많았다”고 말했다.
괴베클리 테페의 고고학적 연구를 종합해보면 그 원인을 알 수는 없지만 당시 괴베클리 사람들은 몇 십 년에 한 번씩 돌을 묻고 새로운 돌기둥으로 대체하다가 이후 모든 원환이 부싯돌로 메워졌고 사람들은 또 부근에 완전히 새로운 구조물을 만든 것으로 추측된다. 전반 유적지는 이렇게 발굴됐다가는 메워지고 다시 보수되는 식으로 몇 백 년이 지난 것으로 보인다. 특이한 점은 당시 괴베클리 사람들의 신전을 보수하고 건축하는 기술은 시간이 갈수록 저하됐다는 것이다. 가장 초기의 원환은 가장 크고 기술과 공예 수준에서도 가장 발달했지만 후대로 진행됨에 따라 모양이 갈수록 초라해졌고 대수롭잖게 설치된 듯했다. 게다가 기원전 8200년 경, 이 공정은 완전히 정체 상태에 빠졌는데 괴베클리 테페는 철저히 쇠락해졌고 더는 부흥하지 않았다.
발굴 과정에서 또 다른 특이한 점은 그곳에서 사람들이 거주했던 흔적을 발견하지 못했다는 것이다. 이런 돌기둥을 조각하고 건축하려면 필연코 수백 명의 인력이 필요했을 텐데 유적지 부근에는 수원(水源)조차 없었다. 가장 가까운 계곡의 물도 그곳에서 5킬로미터나 떨어진 곳에 있다. 많은 인력이 또 거주해야 할 곳이 있어야 함에도 어떠한 벽이나 난로 혹은 주택 흔적마저 찾아볼 수 없다. 다수의 인력이 반드시 취사를 했을 텐데 주변엔 경작을 한 흔적도 없었다. 슈미트는 그곳에서 어떠한 취사도구나 밥을 끓이던 잿더미나 여타 흔적을 발견해내지 못했다. 다만 유적지 부근에서 발견된 수천 개의 영양과 야생소의 뼈로 판단할 때 작업 인력은 먼 곳에서 야생동물을 조달해 식사를 했던 것으로 추측된다. 이런 복잡한 활동은 반드시 책임 있는 조직과 감독이 있어야 함에도 불구하고 현장에서는 사회 계층을 설명할 수 있는 어떠한 증거 또한 발견되지 않았다. 지배세력의 존재를 입증할만한 아무런 흔적이 발견되지 않기 때문이다. 즉 사치품이 부장된 흔적도 없고 계급을 나타내는 식사도구의 차이점도 발견되지 않았다.
괴베클리 테페에 참배했던 최초의 사람들은 문자나 금속과 도자기 등이 없는 사회에서 생활했던 것으로 추정된다. 괴베클리 테페가 세워진 시기 대다수 인류는 아직 소집단으로 유목생활하고 있었고 식물을 채집하고 야생동물을 사냥해 생계를 유지했다. 그런데 이런 거대한 구조물을 세우기 위해서 신전을 구축했던 사람들은 놀랍게도 수레바퀴나 짐을 나르는 가축도 없이 16톤이나 되는 돌을 수백 미터의 먼 거리에서 자르고 날라서 이곳에 세워 놓을 수 있었다.
괴베클리 테페의 발굴 작업은 아직도 진행 중에 있으며 이를 둘러싼 고고학계의 논쟁 또한 그치지 않고 있다. 하지만 학자들은 이 유적지가 기존 과학계를 뒤집는 인류 이전 과거의 유물로서 가장 중요한 곳임을 공통적으로 인정한다. 20년 전만 해도 대다수 고고학자들은 신석기혁명이 발생된 시간과 지점, 대체적인 과정에 이견이 없었다. 하지만 괴베클리 테페의 고고학적 발견이 진행되면서 학자들은 기존의 역사 시기 분류와 관련한 학설을 뒤집어야만 하는 인류사적 고민에 직면해 있다. (시사중국)
발굴 책임자였던 클라우스 슈미트 (Klaus Schmidt 1953.12.11-2014.07.20)와 그의 아내 치으뎀 쾩살 Çiğdem Köksal
이 유적의 발굴 시작부터 모든 것을 관리했던 클라우스 슈미트 교수는 안타깝게도 2014년 7월 20일 수영 중 심장마비로 만 60세 나이에 급사하고 말았다.
현재는 아내인 치으뎀 쾩살 교수가 유적을 관리하고 있다. 그녀의 페이스북을 보면 발굴 관련상황과 더불어
남편 클라우스 교수에 대한 재밌는 일화를 읽어볼 수 있다(터키어). 꽤나 활발하게 활동하고 있는 모양이다
Göbekli Tepe is the oldest known example of monumental architecture—the first structure human beings put together that was bigger and more complicated than a hut. When these pillars were erected, so far as we know, nothing of comparable scale existed in the world. |
A sunken U-shaped block formed the entry pillars of the temple, capped by sculptures of dead animals. The inner ring had no such gate or doorway and may have been accessed with ladders. |
The stream nearest to Göbekli Tepe at the time was about three miles away, raising the question of how the many workers quenched their thirst. Children may have helped by using leather pouches to haul rainwater collected in cisterns. |
Real animal pelts may have hung on the pillars as offerings. The bones of a fox, for example, were found near one of the central pillars. |
The pillars were big—the tallest are 18 feet in height and weigh 16 tons, yet they were set only 15 inches into the ground, where they were fixed with clay and stone. |
Animals carved on pillars at the site are mostly deadly creatures native to the area, including wild boars, cranes, foxes, scorpions, and snakes. They may then serve as protectors of the human figures represented by the pillars, or they may be in attendance to receive sacrifices. Additionally they may serve as totems for families or other groups. |
During construction, villagers use wooden posts to prop up pillars. Because each pillar is only set shallowly into the ground, until the surrounding walls were constructed, they would have likely required some form of additional support. |
During the period from 10,000 to 9,600 B.C., referred to as Pre-Pottery Neolithic A, villages of mud-brick huts included community food storage. Evidence of plant domestication is debated, but wild grains were cultivated.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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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 터키는 놀라운 발굴 성과와 마주하고 있다. 시리아 접경지대에 있는 괴베클리 테페 언덕에서 발굴된 1만2000년 전 신전도시 유적이다.
바로 이곳에 세상의 상식과 기존 역사발전 이론을 송두리째 뒤흔들어 놓을 인류문명사의 새로운 수수께끼가 숨어 있다.
마치 황소자리의 플레이아데스 성단과 비슷하여 천문학적인 요소가 들어간 것이 아닌가 하고 추정하는 사람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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Gobekli Tepe: lonely tree with recents graves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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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he principal alignments of the main enclosures at Göbekli Tepe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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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지역이 이슬람 국가에 의해 개판이 된 시리아 국경 접경 지역이라 유럽 난민 사태 등으로 인해 발굴에 차질이 생길 듯하다.
2014년 8월경 이스탄불 대학의 이희수 교수가 이곳을 방문할 때 난민 수용지 근처라 검문을 받았다고 한다.
그래도 터키에서는 세계적인 유적지가 될 전망을 안고 기대하고 있으며 열심히 발굴 및 연구를 지원하고 있다. 위에 T자 돌탑들도 2016년 중순에 개장될 우르파 고대 박물관에 들어가 보관 중이며 중무장한 군이 배치되어 학자들을 경호하고 있다. 이희수 교수는 이 돌탑들을 보고 싶어했으나 박물관에 이동하여 개장 준비 중이라는 말을 듣고 그래도 조금이라고 볼 수 있을까 해서 박물관에 갔지만 당연히 개장하려면 한참 남았다고 거절당했다. 그래도 터키 내 인맥을 동원하고 외국인으로서 보고 싶기에 여기까지 왔다고 애원하여 마침내 부관장에게 특별히 개인적 관람을 허락받아서 정해진 시간이나마 직접 보았는데 겨우 10% 수준 발굴되었음에도 상당수 유적이 출토되어 이것들을 일부만 봤음에도 감명받았으며 이게 세계적인 관광지가 되고도 남을 것 같다는 소감을 적었다. 다만 인근 동네들이 정국이 좋지 않은 터라 문제이다.
2017년 9월 28일, 터키언론에 따르면 괴베클리 테페와 동시대의 유적이 티그리스강 근처 하산케이프 지역에서 발견이 되었다고 한다.
무려 괴베클리테페를 세운 수렵, 채집생활을 하던 수준의 사람들이 천 년간 거주하다 떠나간 도시 유적.
터키 정부의 아나톨리아 지역 개발계획에 의해 댐 예정지 조사를 진행하다 발견된 곳이라 몇 년 뒤 해당 지역이 수몰될 예정인 것이 문제.
터·日 연구진, 티그리스강 유역 하산케이프서 신석기 주거지 발굴 2017/09/28
'1만년 역사 고대도시' 하산케이프 주변에 댐 건설 논란
터키 남동부 티그리스강 유역에서 1만1천500년 전까지 거슬러 올라가는 신석기 주거지 유적이 실체를 드러냈다. 28일 일간지 휘리예트 등 터키언론에 따르면 터키 바트만주(州) 하산케이프의 티그리스강 유역에서 최고(最古) 9,500 B.C.에 형성된 주거지 유적이 발굴됐다. 하산케이프 신석기 주거지 발굴에는 츠쿠바대학 등 일본 고고학계도 참여했다.
유적지의 주민들은 다른 신석기 사회와 마찬가지로 수렵·채취생활을 했다. 하산케이프 주거 유적이 형성된 시기는 터키 남동부 괴베클리테페 유적과 일치한다. 괴베클리테페는 스톤헨지보다 6천년이나 앞서 거대한 돌기둥으로 건설한 '신전'이 발견돼 고고학계에 충격을 던졌으며, 기존 학계의 정설을 뒤집을 만한 내용도 속속 발표됐다.
발굴단은 하산케이프 주거 유적에서도 괴베클리테페와 비슷한 돌기둥이 설치된 터를 찾았지만 돌기둥 자체는 남아 있지 않았다. 집터에서는 사람의 유골이 다수 발견돼 구성원이 죽으면 집 아래에 묻는 장례풍습이 있었던 것으로 파악됐다. 9천년 전 터키 중부 차탈회이위크 유적에서도 비슷한 장례·제례 형태가 나타난다.
발굴을 이끈 메블뤼트 엘리위쉬크 교수(바트만대학교)는 "하산케이프 주거지는 약 1천년간 유지됐다"면서 "발굴단은 주민들이 이곳을 버리고 떠난 것에 주목하고 있다"고 말했다.
한편 하산케이프 유적지는 '을르수 댐' 프로젝트를 앞두고 일대 유적을 조사하는 과정에서 확인됐다.
을르수 댐 예정지인 하산케이프는 1만년 역사를 지닌 '고대도시'로, 댐 건설로 도시의 역사성이 파괴된다는 논란이 일었다. (이스탄불=연합뉴스) 하채림 특파원
※아래는 소설 『창세기 비밀』의 작가 '톰 녹스'가 2004년 터키의 고대 유적지 ‘괴베클리 테페’를 방문․취재하여 <포틴 타임스>라는 영국 잡지에 기고했던 기사 내용입니다.
톰 녹스는 이곳을 취재한 경험을 바탕으로 데뷔소설 『창세기 비밀』을 완성했습니다.
출처 : http://www.tomknoxbooks.com/the-genesis-secret/gobekli-tepe/
번역 및 편집 : 레드박스 루미
에덴이라는 단어는 페르시아어 ‘헤덴(Heden)’에서 유래한 히브리어로 ‘환희의 동산’, ‘태고의 정원’이라는 뜻을 가지고 있다.
또한 수메르어의 에디누(edinu: 평지, 황무지)에서 유래했다고도 한다.
에덴 동산(Eden) 또는 에덴은 구약성경의 창세기에서 야훼가 최초의 사람인 아담과 그의 아내 하와를 위해 만들어
살게 했다는 이상향의 이름이다.
아브라함 계통 종교들의 창조 신화에 등장하는 이 정원은 기독교가 세계적으로 전파되면서 널리
알려지게 되었고,
오늘날에는 낙원의 대명사로서 사람들에게 전형적인 낙원상으로 인식되고 있다.
창세기의 창조 이야기를 보면, 네 줄기의 강(피손, 기혼, 티그리스, 유프라테스)과 근처의 세 지역(하윌라, 에티오피아, 아시리아)을 언급하면서 에덴의 지리적 위치를 기술하고 있다.
에
덴이 실제 장소였다고 보는 기독교인들 사이에서는 에덴의 위치는 지금도 논쟁 대상이 되고 있다.
대체로 메소포타미아와 페르시아 만의
티그리스 강과 유프라테스 강 상류에 있었던 것으로 추측되고 있다.
또 다른 기독교인들은 에덴을 비유로 만든 가공의, 상징적인
의미의 장소라고 보고 있다.
[Wikipedia]
천국을 발견하다?
나는 허름한 터키 택시를 타고 시리아 쪽으로 달리기 시작했다. 앞쪽으로는 갈색 언덕이 끊임없이 이어졌고 이윽고 작은 마을이 보이기 시작했다. 진흙으로 만든 집들 그리고 여러 갈래 작은 개울이 보였다. 이곳은 결코 축복받은 장소가 아니었다. 그러나 내가 들은 정보가 맞는다면 나는 지금 세상에서 가장 놀라운 고고학 유적지로 향하고 있는 것이다. 무엇보다 엄청나게 놀라운 것은 이곳이 바로 에덴동산의 유적지라는 사실이다.
연신 투덜대며 욕지거리를 퍼붓던 택시 기사가 코너를 휙 도는 바람에 깜짝 놀란 나는 구름 한 점 없는 하늘 아래 삭막한 사막을 뒤로하고 고독하게 서 있는 오디나무를 보았다. 드디어 괴베클리 테페에 도착한 것이다.
차에서 내리자 10여 명의 인부와 고고학자들이 언덕에서 일하는 모습이 보였다. 고고학자들은 열심히 발굴 작업 중이었고 인부들은 돌이 담긴 통을 들어 올려 조심스레 흙 위에 부리고 있었다. 천막과 불도저, 측량기도 보였다. 발굴 작업을 하던 몇몇 사람이 일손을 멈추고 나를 바라보았다. 그리고 50대쯤 된 사람 좋아 보이는 인상을 한 독일 남자가 나에게 말을 걸었다. 그는 괴베클리 테페의 책임 고고학자 클라우스 슈미트 박사였다.
우리는 악수를 나누었고 슈미츠 박사는 나를 텐트로 데려갔다. 튤립 모양의 잔에 달콤한 터키 차를 마시면서 나는 그의 이야기를 들었다. 이마의 땀을 닦아내며 슈미트 박사는 발굴 작업에 대한 이야기를 풀어놓기 시작했다.
괴베클리 테페(테페tepe는 테페이teppay라고 발음하는데 이것은 터키어로 배꼽 언덕이라는 뜻이다.)는 1964년에 처음 발굴하기 시작했다. 그때 당시에는 미국 고고학자들이 연합하여 터키의 남동 지방에 들어왔다고 한다. 그들은 이상한 언덕들 여러 개가 수만 개의 깨진 돌조각들을 뒤덮고 있다는 사실에 의문을 품었다. 이 유적지가 고대인들이 어떤 활동을 했는지 알려줄 소중한 정보가 될 거라고 판단했던 것이다. 그러나 그들은 아무것도 발굴하지 못한 채 곧 그곳을 떠났다. 지금 그들은 마치 『해리포터』 원고를 읽고도 출판을 거부한 편집자와 같은 심정일 것이다.
미국 고고학자들이 그렇게 떠난 이후 20년이 지난 뒤 한 양치기가 그곳에서 양들을 돌보고 있었는데 이 먼지 언덕 사이에서 뭔가 이상한 점을 발견했다. 그리고 그 소식은 50킬로미터 떨어진 샤늘르우르파에 있는 박물관 큐레이터의 귀에 들어갔다. 박물관 측은 정부 관료에게 연락을 하게 된다. 그리하여 이스탄불에 있던 독일 고고학자들이 다시 이곳에 들어온다. 그렇게 해서 1994년 경험 많은 고고학자 클라우스 슈미트 박사가 이곳에 책임자로 들어와서 본격적인 발굴을 시작하게 된 것이다.
“정말 흥미로워요. 이곳은 여기 마을 사람들의 정서에도 굉장히 중요한 영향을 줄 수 있는 장소예요.”그는 웃으면서 말했다.
“여기는 이를테면 저기 제일 높은 언덕에 있는 저 고독한 오디나무 한 그루조차 굉장히 성스러운 존재거든요. 저는 우리가 지금 뭔가 대단한 일을 하고 있다는 걸 직감했어요. 처음 여기 와서 몇 분 만에 앞으로 이곳에서 평생을 보낼 거라는 예감이 들었어요.”
예감대로 슈미트 박사는 그 이후 쭉 이곳에 머물렀다. 그리고 지금까지 그가 발견한 것들은 굉장히 이례적인 것들이었다.
괴상한 돌들은 어마어마한 거석의 평평한 윗부분이라는 것이 밝혀졌다. 이 T자형 황토색 돌들은 지친 지구의 땅 위로 불쑥 솟아올라 있었다. 대부분의 돌에는 주로 기이한 동물이나 새 형상의 섬세한 조각들이 새겨져 있었다. 여자의 나체가 새겨진 어떤 조각은 포르노 같기도 했다. 구불구불한 뱀 모양의 형상들은 모든 조각에서 공통적으로 나타났다. 이 돌들은 마치 사람의 모습 같기도 했다. 어떤 것들은 양식화된 팔을 갖고 있고, 이것은 돌의 아래쪽으로 이어져 있었다.
지금까지는 43개의 돌 무더기를 발굴했다. 이 돌들은 5~10미터 간격으로 원을 이루고 있었다. 이 돌 원형 주변에는 바위로 된 벤치들이 있었다. 자그마한 틈새 그리고 진흙 벽돌벽도 있었다. 다 파낸 거석의 높이는 1~4미터 정도였다.
발굴 작업이 진행되면서 더 재미있는 일들이 벌어졌다. 몇 년 전 슈미트 박사와 그의 팀은 풍화되어 반이 날아간 상태의 T자형 돌들이 이곳에서 몇 킬로미터 떨어진 석회석 바닥에 누워 있는 것을 발견했다. 이 거대한 돌들은 9미터 길이에 괴베클리 테페에서 본 다른 돌들과 유사하게 생긴 것들이었다. 이 돌은 갈라지고 부서져 있었다. 슈미트 박사는 설명했다.
“이런 일이 일어났을 때, 사람들이 아마도 이건 남겨두고 다른 걸로 새로 쌓기 시작한 것 같아요.”
세계에서 가장 오래된 유적지
이 모든 일이 의미하는 것은 아마도 아직도 발굴되지 않은 다른 거대한 돌들이 많다는 것이다. 실제로 괴베클리 테페에 있는 여러 인공적 언덕을 기하학적으로 측량해보면 아직 적어도 250개 정도의 거석이 더 아래에 묻혀 있다는 걸을 알 수 있다고 한다.
지금까지 이야기만으로도 매우 놀랄 만한 유적의 발굴이라 할 수 있다. 그러나 이것만으로 발굴 이야기가 끝난다면 이곳은 터키의 스톤헨지(Stonehenge, 영국 윌트셔주 솔즈베리평원에 있는 고대의 거석기념물)나 쿠르드의 카르나크(Carnac, 거석으로 유명한 프랑스 도시)라고 정의 내리면 끝날 일이다. 그러나 이곳은 결코 단순하게 지금까지의 이야기로만 끝낼 장소가 아니다.
분명한 것은 이곳이 고고학 유적지 중 가장 오래된 장소라는 점이다. 그것도 믿을 수 없을 정도로 아주 오래된 고대 유적지이다. 놀라지 마시라. 탄소연대측정의 결과 이 유적지는 약 1만 2000년 전으로 것으로 판명되었다. 이것은 다시 말하자면 기원전 10,000~9000년 사이이다. 다른 유적지의 경우와 비교해도 말도 안 될 만큼 오래된 것이다.(스톤헨지는 기원전 2000년대의 것이다) 괴베클리 테페를 발견하기 전, 대부분의 고대 거석 유적지는 약 기원전 3500년 즈음의 것들이었다.
그러니 이 유적지는 사람들을 멍하게 할 정도로 오래된 장소이고 사실상 한 군데 정착해서 살았던 인간의 삶 그 이전의 삶을 말해준다. 이때는 토기를 사용하지도 않았던 시기이다. 그렇다면 바로 인간이 수렵채취 생활을 했던 시대를 말해주는 장소인 것이다. 어떻게 동굴에 살던 인류가 이렇게 어마어마한 것들을 세울 수 있었을까? 슈미트 박사는 수렵채취 생활을 하는 원시인 집단이 몇 십 년간 이곳에서 산발적으로 모였을 것이라 추측한다. 이 거석을 세우는 동안, 원시인 집단은 동물들의 가죽으로 만든 텐트 안에서 종족 보존을 위해 가축을 도살했을 것이다. 괴베클리 테페 근처에서 돌화살이 많이 발견되는 것은 이 이론을 증명하고 있다.
정말 문명(농업) 이전에 예술이 존재했을까?
이 사원을 건설한 수렵채취 원시인은 석기시대 사람들인데, 이는 지금까지 학설과는 완전히 다른 이론을 추측게 한다. 그래서 이곳이 중요하다는 것이다. 지금까지는 일반적으로 인간이 농사를 짓기 시작하면서 안정적 음식을 먹을 수 있었고 그 이후로 문명과 예술, 사회 그리고 건축 등을 탄생시켰다고 알려져 있다.
그러나 터키의 괴베클리 테페는 우리가 상상하는 것 이상으로 훨씬 앞선 고대 수렵채취인들이 예술과 문화를 즐겼다는 것을 생생하게 증명하고 있다. 그래도 의문점은 남는다. 괴베클리 테페 같은 어마어마한 건축물을 세우는 일은 매우 힘들고 인력 또한 턱없이 부족했을 것이다. 또 과연 이 건축물이 누구를 위한 것이었을까? 슈미트 박사는 이렇게 답한다.
“괴베클리 테페는 일반 가정집이 아니에요. 그럴 만한 증거는 나오지 않았거든요. 정착한 인간의 주거지로서 증명할 만한 게 없어요. 그렇다면 다른 목적은 하나죠. 바로 종교적인 장소라는 겁니다. 이곳은 세상에서 가장 오래된 사원인 거죠. 그것도 단순한 사원이 아니에요. 아마도 복합적인 장례 단지였을 거예요.”
슈미트 박사의 이론에는 많은 근거가 있다. 발굴의 최종 단계에서 인간의 유골을 발견한 것이다. 거석과 거석 사이 땅에서 유골들을 발견한 것이다.
“아마도 고대 수렵채취인은 시체를 이곳으로 가져왔을 거예요. 그리고 거석 사이에 두고는 야생 동물들이 뜯어먹기를 기다렸죠. 인도의 조로아스터교에서도 이런 풍습을 찾을 수 있어요. 흔히 조장(鳥葬)이라고 부르는데, 시체를 천신에게 바치는 거죠.”
괴베클리 테페가 종교적 목적의 건축물이라는 근거는 또 있다. 위에서 내려다보면 거석이 크게 원형을 그리며 놓여 있는데 이런 방식은 스톤헨지나 에이브베리 같은 신석기 시대 사원과 일치한다. 거석에 새겨진 조각도 일상생활과 관련된 것이라기보다는 제의적 성향이 짙다. 차를 홀짝이며 슈미트 박사는 이 사실에 대해서 자세히 설명했다.
“이런 조각들은 사냥을 축복하는 거예요. 주로 야생돼지, 여우, 가젤 등의 사냥감이 새겨진 조각들이 많죠. 또 그물에 잡힌 오리 이미지도 있었고요.
기본적으로 괴베클리 테페는 아마도 장례를 치르는 장소였을 겁니다. 그러면서 수렵채취인들의 삶과 사냥 그 자체를 축복하는 공간이기도 했죠.”
인류 최초의 곡식, 외말밀의 원산지
하지만 그런 결론에 이르기 전 분명하게 떠오르는 의문점이 있다. 과연 이곳에서 무슨 일이 있었던 것일까? 만약 이 지역이 풍족한 에덴동산이었다면 왜 지금 이렇듯 황량하고 척박한 것일까? 슈미트 박사는 거친 땅에서 돌조각 하나를 집어 들었다. 이곳에는 이와같이 수많은 돌조각들(사람이 만든)이 언덕 곳곳에 깔려 있었다. 그는 이어 말한다.
“이런 곳을 세우기 위해서 엄청난 숫자의 원시인들이 모였을 거예요. 그 사람들은 모여서 장례 의식을 치렀겠죠. 그런데 그렇게 많은 사람들을 먹일 수가 없는 거예요. 그러니까 농업이 시작된 거죠. 외알밀(einkorn, 인류 최초의 곡식)은 이곳에서 자라나기 시작했어요. 원시인들은 이것을 재배했죠.”
슈미트 박사는 언덕에 있는 외로운 오디나무를 바라보았다.
“다른 말로 하면 그들은 종교 집단을 존속하기 위해 농업을 시작했죠. 하지만 역설적이게도 농업은 그들을 몰락시킵니다.”
슈미트 박사의 말에 따르면 이곳에서 농업이 시작되지만, 기원전 8000년 전 무렵 괴베클리 테페 주변 환경이 급격하게 변화했다.(이곳이 세계에서 최초로 농사가 시작된 곳이라는 것은 입증된 사실이다.) 언제 어디서 농업이 시작됐는지는 고고학적 증거를 통해 이미 알려져 있다. 이 농업 혁명은 인간과 동물에게 생리적으로 큰 변화를 몰고 왔다. 인간들의 골격은 이전에 비해 훨씬 작고 허약해졌다. 인간은 단백질이 부족한 식단에 익숙해졌고 삶은 몹시 고달파졌다. 또한 동물들을 길들여 가축으로 사육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기원전 8000년경 이곳의 환경도 변하기 시작했다. 나무는 주저앉고 땅은 점점 말라갔다. 이 지역은 점점 건조하고 헐벗은 땅으로 바뀌었다. 숲과 목초, 야생초, 사냥감이 풍부하던 영광스런 목축 지역이 영원히 노동으로 논과 밭을 가꾸어야만 하는 고생스러운 장소로 바뀐 것이다.
슈미트 박사와 나는 사다리를 타고 발굴지 밑 깊숙한 아래로 내려갔다. T자형 거석 위에는 고대의 먼지가 쌓여 있었다. 슈미트 박사는 계속해서 말했다.
왜, 누가 땅속에 매장했을까?
“정말 이상한 일은 기원전 8000년경 농업이 시작되면서 누군가 괴베클리 테페를 파묻어버린 사건이에요. 이건 산사태나 자연재해 때문이 아니라 의도적인 사건이거든요. 왜 그랬는지 모르지만 수렵채취인들은 여기를 전부 흙으로 메워버렸어요. 여기 있는 언덕들은 전부 인공적인 거예요. 정말 미스터리한 일이죠.”
잃어버린 천국, 버림받은 삶, 인간의 끔찍한 실수. 정말로 괴베클리 테페와 에덴동산 사이에는 어떤 관계가 있을까?
결론을 내리기 전에 나는 좀 더 조사를 해봐야했다. 하루 정도 뒤에 다시 슈미트 박사를 만나기로 약속하고 나는 다시 택시를 탔다. 그리고 먼지 가득한 길을 따라 내려가기 시작했다. 택시 안에서 노트에 기록했다.
『성경』에 나오는 에덴동산 이야기는 알레고리다. 인간의 수렵채취 시대를 묘사한다는 것이다. 낙원에 살던 벌거벗은 아담과 이브처럼 나무 사이를 돌아다니며 과실을 따고 야생풀을 모으고……. 그것을 에덴동산에서 쫓겨난 걸로 표현한 것이다. 수렵채취 생활을 하던 인간이 농사를 짓기 시작했다는 것을 은유적으로 표현했다는 것이다. 몇몇 학자(휴 브로디 같은 고고학자)나 작가들은 이렇게 주장했다.
실제로 이곳 괴베클리 테페 주변 지역은 이 알레고리를 증명할 만한 환경이 조성돼 있다. 그 증거로는 농업이 거의 인류 최초로 시작되었다는 점이다. 터키의 고고학 유적지는 모든 유라시안의 농업이 이곳에서 시작되었다는 사실을 말해주고 있다. 또 이곳에서 90킬로미터쯤 떨어진 차외뉘라는 유적지는 이곳에서 최초로 돼지를 사육했다는 사실을 증명하고 있다. 마찬가지로 세계 곳곳의 밀 종류는 인류 최초의 곡식인 외알밀에서 유래되었다. 외알밀은 이 언덕에서 최초로 재배되었다.
택시기사는 길이 납작해질 정도로 엑셀러레이터를 세게 밝았다.
우리는 목화밭을 향해 달렸다. 유프라테스 강에서 수로를 연결해서 일군 목화밭이었다. 수평선 너머로 푸른 황소자리 별자리가 보였다.
갑자기 또다시 에덴동산 이야기가 떠올랐다.
『성경』에는 에덴동산 근처에 네 개의 강이 흐르고 있다고 묘사돼 있다. 티그리스 강과 유프라테스 강 사이에 비옥한 초승달지대에 에덴동산이 있다고 믿었던 것이다.
또 다른 단서들도 있다.
이곳에서 40분 정도 차를 타고 나가면 생기 넘치는 도시, 쿠르드의 샤늘르우르파에 도착한다.
이곳은 여기에 비해서 훨씬 현대적인 장소이다.
하지만 어떤 기사에 따르면 이곳에는 매우 기이한 혈통의 사람들이 사는 곳이라고 한다.
샤늘르우르파에 있는 박물관이 나의 첫 방문지다. 입구에 들어서고 입장료를 냈다. 먼저 갤러리로 들어갔다.
계단 아래, 그리고 소화기 옆 기묘한 실물 크기의 회색과 크림색이 섞인 듯한 느낌으로 사람 형상의 동상이 서 있었다.
이 동상은 샤늘르우르파의 고대 유적지에서 발굴해낸 것이다. 경사지를 만들기 위해 땅을 파기 시작했을 때, 발견한 것이라고 한다.
이것을 탄소 연대 측정해본 결과 신석기 시대의 유물이라는 걸 알 수 있었고, 약 기원전 10000년~9000년 사이의 것이라는 것을 확정할 수 있었다고 한다. 아마도 이것은 지금까지 발견된 돌로 만든 동상 중에서 가장 오래된 것일 것이다. 이 동상이 소화기 바로 옆에 서 있었다.
동상의 눈은 흑요석으로 되어 있었는데 충격적일 정도로 슬퍼 보였다.
아마도 수백억 년을 건너오면서 인류 고뇌과 선견지명, 비극적인 실수 등을 눈 속에 다 담고 있는 듯했다.
다시 택시를 타고 나는 그 동상이 발견된 장소로 돌아갔다.
괼바쉬 가든이라고 알려진 지역이었는데 매우 아름다운 장소였다.
길고 맑은 호수가 있고, 골드스톤으로 만들어진 회교도 사원이 있는 그곳에는 예쁜 찻집과 개조된 크루세이더 교회도 있었다.
이곳을 방문한 관광객들은 연못의 살찐 물고기들에게 먹이를 주고 있었다.
아브라함의 후손들
전설에 의하면 아브라함이 이곳에 직접 잉어를 풀어놨다고 한다. 이 지역 주민들은 샤늘르우르파가 『성경』 속에 나오는 곳이라 믿고 있다. 물론 이것은 전설일 뿐이다. 하지만 우리는 이 근처 지역이 믿을 수 없을 만큼 오래된 유적지라는 사실을 알고 있다. 1만 2000년 전부터(아마도 지금까지 계속)이곳에서는 계속 인간이 활동했다. 그러니 「창세기」에서 이곳을 고대 문명의 근원으로 삼고 있을 만하지 않은가? 그래도 전혀 이상할 것이 없다. 왜냐하면 샤늘르우르파 근처 지역이 「창세기」에 분명히 언급되고 있기 때문이다.
다음날 아침, 나는 또다시 택시를 타고, 갈색의 평평한 땅을 지나고 있었다. 사막을 통과하면서 더 남쪽으로 내려갔다. 그곳에서는 전형적인 라벤더 색깔의 머리 스카프를 두른 쿠드르 여인들이 밭을 갈고 있었다. 그 여인은 열기 때문에 매우 지쳐 보였다. 이 지역은 매우 무더워서 사람들은 집 밖에 넓직한 평상을 만들어놓고 거기서 잠을 잔다.
나는 드디어 하란에 도착했다. 세상에서 가장 오래된 이슬람 대학이 눈에 들어왔다. 입구에 허름한 탑이 서 있었다. 이 대학은 기원전 9세기 때부터 존재했다. 1000년은 넘었다는 소리이다. 하지만 이곳 하란에 사는 사람들은 아브라함의 혈통을 이어받았다는 설이 있으니 더욱더 놀라울 뿐이다.(하란은 「창세기」에도 두 번이나 언급되는 도시이다)
다시 택시를 타고 괴베클리 테페로 마지막 여정을 떠났다. 나는 흩어진 미스터리 퍼즐 조각을 다시 맞춰보았다. 이 지역에서 최초로 가축을 사육했다는 것은 사실이라고 한다. 그런 정황으로 봤을 때 괴베클리 테페는 틀림없이 에덴동산의 유적지가 아닐까?
에덴동산 이야기가 민간 설화이자 일종의 알레고리라는 것도 매우 매력적인 가설이다. 그토록 비옥했던 땅, 아타톨리아(터키)는 인간이 수렵채집 생활을 했던 영광스런 시대를 증명해준다.
가혹한 노동으로 힘든 나날을 보내기 이전의시대.
괴베클리 테페는 풍요롭고 행복했던 고대를 상기시킨다. 비록 토기를 만들지도, 농사를 짓지도 않았지만 고대인들은 여가를 즐기고, 예술적 능력을 발산하고 복잡한 종교를 숭배했던 것이다. 슈미트 박사는 고개를 끄덕였다.
“맙소사! 정말 놀라운 사실이죠.”
그는 발굴 장소로 성큼성큼 걸어갔다. 그리고 아래쪽을 가리켰다.
“어제 이걸 발견했어요.”
또 다른 거석 아랫부분에 완벽한 동물 조각상 하나가 붙어 있었다. 이전에는 누구도 발견하지 못한 것 같았다. 이 길쭉한 조각상은 바로 어제 발견한 것이다.
“이게 뭐죠?” 내가 물었다. 슈미트 박사는 머리를 가로저으며 답했다.
“아마 악어거나 아니면 고양이과 동물 같은데요. 근데 저 발톱을 보면 늑대 같기도 하고요.”
우리는 뭔가 엄청난 발견을 한 것 같았다. 내 심장은 세차게 쿵쿵대기 시작했다.
슈미트 박사와 나는 다시 텐트로 돌아가 차 한잔을 했다. 우리는 에덴동산과 괴베클리 테페에 대해 대화를 나누었다. 그는 그 가설이 굉장히 놀랍긴 하지만 어디까지나 여러 설 중 하나라고 말했다. 그러면서 이렇게 덧붙였다.
“괴베클리 테페는 그 어떤 설과 관련이 없다 해도 너무나 중요한 유적지예요.”
[출처] 고대 유적지 ‘괴베클리 테페’는 정말 에덴동산이었을까?_톰 녹스의 기사|작성자 졸리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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