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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내의 문화유산

고려불화대전 - 700년만의 해후


들어가며

ㅇ 전시유물 : 혜허(慧虛)필 <수월관음도> 등 108점
국내, 일본, 프랑스, 미국, 러시아 등 총 44개 처
-. 일본 소재 고려불화 27점, 미국·유럽 소재 고려불화 15점,
국내 소재 고려불화 19점 등 61점,
-. 중국·일본 불화 20점, 조선 전기 불화 5점, 고려시대 불상과 공예품 22점

고려불화는 잘 알려져 있듯이 세계에서 가장 아름다운 종교예술품으로 손꼽힌다. 고려인의 높은 미적 수준을 드러내는 섬세하고 단아한 형태, 원색을 주조로 한 화려한 색채와 호화로운 금니, 흐르는 듯 유려하면서도 힘 있는 선묘 등 당시 동아시아에서 독보적인 미의 세계를 창조하였으며, 승화된 고려불교의 정신성과 고려인들의 숨결까지 함축하고 있어 고려시대의 문화상을 유감없이 보여준다. 또한 이 특별전에는 고려불화 뿐만 아니라 동 시대인 중국의 남송~원대의 불화와 일본의 가마쿠라시대의 불화도 함께 출품되어 동아시아 불교미술 가운데 고려불화의 뛰어난 예술성을 폭넓은 시야에서 이해할 수 있도록 전시하였다.

이번 전시에서 가장 주목되는 것은 국내에 소장된 고려불화 외에 일본・미국・유럽 등 전 세계에 흩어져 있는 고려불화를 한 자리에 모음으로써 평소 한두 점 관람하는 것조차 쉽지 않은 고려불화 수십 점을 한눈에 비교하면서 감상할 수 있게 하였다는 것이다. 센소지(淺草寺) 소장 <수월관음도>를 비롯해 네즈미술관(根津美術館) 소장 <지장보살도>, 오타카지(大高寺) 소장 <관경16관변상도> 등 출품작 상당수가 우리나라에서 처음 공개되는 작품이다. 특히 ‘물방울 관음’이라는 별칭을 가진 센소지 소장 <수월관음도>는 일본 현지에서도 공개하지 않아 일본 학자들조차 보기 어려운 것으로 유명하다.

주요 출품 기관은 국내의 삼성미술관 Leeum, 일본의 동경국립박물관, 나라국립박물관, 규슈국립박물관을 비롯하여 미국의 메트로폴리탄박물관, 보스턴미술관, 프랑스의 기메박물관, 독일의 베를린동아시아박물관과 쾰른동아시아박물관, 러시아의 에르미타주박물관 등 총 44개 처에 달한다.

고려불화는 작품이 워낙 귀하기 때문에 한 곳에서 여러 점을 소장한 경우가 드물다. 총 44개 처에 달하는 국・내외 소장처와 협의하는 과정에서는 우여곡절이 많았다. 많은 고려불화가 일본에 소장되어 있어, 한국에 빌려주면 다시 돌려받을 수 없을지도 모른다고 걱정하는 소장자들을 찾아가 끈질기게 설득하고 신뢰를 얻는 것이 가장 어려운 과정이었고 심지어 작품 운송을 코앞에 둔 시점까지 주저하거나 출품의사를 철회해 버리는 소장 기관도 있어 관계자들의 애를 태웠다. 한편 출품을 허락한 기관들은 ‘불화도 자기 고향에 한번은 가보고 싶을 것’이라는 말을 종종 하였는데, 이러한 이유로 인해 어렵게나마 국외 대여를 허락하는 경우도 많았다.


고려시대에 제작된 뒤 어느 때인가 흩어져 소장된 고려불화들이 이런 우여곡절 끝에 마침내 특별전에서 함께 선보이게 되었다. ‘700년 만의 해후’라는 특별전의 부제가 함축하고 있는 의미처럼, 이번 전시는 고려불화들의 특별한 고향 나들이인 동시에, 우리 국민으로서도 평생 다시 만나기 어려운 반갑고 애틋한 만남의 시간이 될 것이다.

 

 

 



 

 


전시의 구성은 주제별로 구분되어 있다.

제1부 ‘깨달음의 존재, 부처’에서는 고려불화 중에서도 부처를 주존으로 그린 작품들을 전시하였다. 고려시대에는 정토신앙의 성행을 반영하듯 아미타불을 그린 불화가 많다. 삼성미술관 Leeum 소장 <아미타삼존도>는 내영도來迎圖 형식, 즉 아미타불이 죽은 자를 극락으로 맞이하기 위해 다가가는 모습을 그린 것으로, 관음보살이 허리를 굽혀 극락왕생할 사람을 연꽃에 태우려는 모습이 인상적이다.

제2부 ‘중생의 구제자, 보살’에서는 불교 신도들에게 친근한 관음보살과 지장보살을 주제로 한 불화들을 전시하였다. 일본 센소지 소장 <수월관음도>는 은은한 녹색의 물방울 모양 광배 속에 서 있는 관음보살을 그렸는데, 관음보살의 자태는 늘씬하고 우아한 고려의 미인을 연상케 한다. 일본 단잔진자 소장 <수월관음도>에는 보타락가산의 암좌에 앉아 법을 구하러 온 선재동자를 맞이하는 관음보살의 엄숙하고 단아한 모습이 그려져 있다.

제3부 ‘수행자의 모습, 나한’에서는 고려 1235-6년에 그려진 <오백나한도> 연작을 선보인다. 현재 14점 정도 알려져 있는데 국립중앙박물관에서 가장 많은 7점을 소장하고 있어 전 작품을 전시하며, 미국, 일본 등에서 대여한 3점을 더하여 총 10점이 전시되므로 현재 남아 있는 작품의 대부분을 볼 수 있는 셈이다.

제4부 ‘이웃 나라의 불보살’에서는 고려불화와 같은 시기에 그려진 중국과 일본의 불화들을 전시하여 당대 동아시아의 불교문화와 불교회화를 넓은 시야에서 감상할 수 있도록 하였다. 특히 1909년 코즐로프 탐험대가 하라호토에서 발굴한 12-13세기의 서하西夏 불화 3점은 러시아 에르미타주박물관 소장품으로서, 삼성미술관 Leeum 소장 고려불화 <아미타삼존도>와의 친연성을 통해 그 존재가 이미 잘 알려져 있었으나 실물을 보기는 어려웠다. 국내에서 볼 수 있는 것은 이번이 최초이다.

에필로그 격인 ‘전통의 계승’에서는 고려불화의 전통이 조선시대에 어떻게 계승되었는지를 조선 전기 왕실에서 발원한 불화 중심으로 살펴보았다. 문정왕후가 1565년 회암사 중창시 발원한 400점의 불화 중 일부인 <약사삼존도> 2점도 전시된다.

<섬세함,단아함,화려함 '고려불화의 美'에 빠지다 - 한국일보 2010.10.11>

 



고려의 불교와 불교회화

 

후 삼국시대의 분열과 혼란을 겪은 후 918년 다시금 한반도에 통일 왕조를 건설한 고려는 군소 호족들과 지식층에 대한 적극적인 포용 정책을 실시함과 동시에, 새로운 왕조의 사회 통합 이념으로 불교 사상을 기반으로 삼았다. 고려 태조가 불교를 숭상하며 수도 개경에 10대 사찰을 건립하고 연등회와 팔관회를 중요시한 것과 대각국사 의천 등 많은 왕실과 귀족 가문 자재들이 출가하여 활발하게 활동한 것은 고려시대 불교의 높은 위상을 보여주는 예라고 할 수 있다.

고려의 불교는 통일신라에서부터 시작된 각종 종파가 더욱 다양하게 발전하고 체제를 갖추어 국가 불교로서의 외적 성장 뿐 아니라 내적 발전도  함께 이루어 갔으며, 향도 등 각종 불교 결사의 활동으로 다양한 사회 계층 전반에 깊이 뿌리내리고 있었다. 고려인들은 불교에 기대어 각자의 소망을 발원하였으며 사찰을 세우거나 경전, 불화를 조성하는 일을 매우 중요하게 생각하였다. 이에 더하여 고려시대의 무르익은 귀족 문화와 세련된 취향은 고려불화와 같이 숙련된 기법과 귀한 재료. 오랜 시간의 정성과 노력을 요구하는 수준 높은 불교 미술품이 발달하는 배경이 되었다.

고려시대의 불화는 기본적으로 통일신라시대의 불화 전통을 이어받았지만 활발한 대외 교류를 통해 중국 송.원대 불화의 영향도 받아들였다. 현재 남아있는 고려불화는 세계적으로 160점 정도로 추산되고 있다. 이는 실제 제작되었던 수많은 고려불화의 일부분에 불과하지만, 이 중 많은 부분을 차지하고 있는 아미타불도, 수월관음도, 지장보살도 등을 통해 당시 유행했던 불교신앙의 모습을 추측할 수 있으며, 고려불화에 보이는 섬세한 기법과 높은 완성도는 고려시대 회화의 높은 수준을 여실히 보여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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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불화는 원나라 침공으로 강화도로 옮겨간 고려 조정이 몽고와 강화를 맺고 개경으로 환도한 1270년부터 약 120년간에 걸쳐 제작됐다 (대부분 14세기 후반에 제작되었다). 이 짧은 시기에 제작된 그림은 전세계 160여 점밖에 남아있지 않는데다 그 중 10여 점만 국내에 있을 따름이다.

고려불화의 특징 중 하나는 색채다. 민병찬 전시팀장은 “동시대의 중국불화에 보이는 청색이 고려불화에는 보이지 않는 등 이웃나라 그림에서 찾아볼 수 없는 독특한 느낌을 자아내는데, 지역마다 나는 안료가 달랐기 때문”이라고 설명했다. 가령 붉은 빛만 해도 중국의 것은 조금 더 선홍에 가까운 반면, 고려의 것은 다소 어둡다. 조선 미술의 영향으로 한국의 미는 흔히 단순하고 검박한 것이 특징이라 알려져 있지만 고려불화는 눈에 띄게 화려하다. 특히 금가루를 아교에 갠 ‘금니(金泥)’로 표현한 영향이 크다. 중국이나 일본은 붉은 가사가 단색으로 표현되는 반면, 고려의 것은 당초문·모란문 등의 문양을 금니로 섬세하게 그려 넣었다. 가사자락의 주름을 섬세히 표현하는 것은 물론이요, 투명한 사라(紗羅·베일)에 직조된 무늬까지 그려 넣었다.

중앙박물관 미술부 배영일 학예연구사는 “물방울 무늬의 광배가 전신을 감싸 ‘물방울 보살’로 불리는 일본 센소지 소장 수월관음도는 금니를 머리카락 한 올 짜리 붓으로 찍어 그렸으리라 추정될 정도로 그 섬세함이 극에 달했다”고 말했다. 육안으로는 확인할 수 없고 현미경으로 확대해 보아야만 보인다. 조선 전기까지 고려불화의 기법이나 도상이 전해지긴 하나 그 섬세함은 확연히 떨어진다. 고려불화의 발원문에는 ‘나라가 태평하고 임금은 하늘처럼 오래 사시고 왕비는 만년토록 오래 사시기를’이란 문구가 흔히 등장한다. 고려불화는 단순히 인간의 손이 그린 것이 아니었다. 호국과 성불의 염원이 그려낸 그림이었다. (중앙일보 2010.10.12)

 

 

고려불화는 우리나라에 10여 점이 소개되고 있으나 이 작품들도 일본에서 사온 것들이다. 
고려불화가 일본에 전래된 것은 주로 배불정책의 조선 전기때이다.  조선의 배불 정책으로 인하여 고려 때까지 보호되던 막대한 사찰과 그에 딸린 경전, 조각, 회화, 기물 등이 오갈 데가 없어지게 된다. 많은 사찰들은 폐찰되고, 심지어는 유생들의 손에 의해 불태워지거나 서원 등으로 변해지고, 이런 와중에 여전히 불교를 숭상하던 일본에서 국가적인 입장으로 조선에 대장경을 요구하게 되자 조선은 대장경과 함께 범종, 불화들을 전하게 된 것으로 보인다.
 
임진왜란을 겪으면서 조선의 사찰 90%가 소실되고, 사원건축들과 함께 그동안 전해오던 불화, 불경, 불상 등도 모두 불타버려 사라졌으나 일본에 건너간 회화들은 대체적으로 잘 보존되어 우리가 지금 찾아볼 수 있게 된 까닭이다.


현재 전하는 고려불화는 모두 13세기 이후의 것들로, 14세기 작품이 주요이다. 고려문화의 가장 극성기인 11-12세기의 작품들이 남아있지 않아 아쉬울 따름이다. 고려의 무신정변, 몽고침략, 홍건적의 침입 등은 전국토를 황폐화시켰고, 따라서 고려의 예술품들은 보존하기가 어려웠던 것이다. 안타깝게도 그나마 남아있는 작품들도 소유하지 못하고 일본이나 외국이 대다수 소장하고 있다. 사연이야 있겠지만 결과에 대한 가장 큰 원인 제공자는 자기 자신의 문화나 미술품에 대해 몰랐고 경시했던 우리 자신이 아닌가 여겨진다.

임진왜란같은 격변기에 행해졌던 약탈과 조선시대 숭유억불 정책등의 이유로 고려불화가 한국내에 존재 할 수 없었던 이유를 설명하지만 , 고려불화가 소중하다고 의식을 했다면  애지중지 간직했을 것이고 국내에 상당수는 존재 했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유홍준 교수 설명에 의하면 고려불화를 알아 준 것도 결국은 일본이라는 사실이 안타깝다. (도자기나 막걸리의 예 처럼)

 

美로 간 고려불화… 그 뒤에 일본 古미술상 있었다 (조선일보 2014.01.20)
해외 떠도는 우리 佛畵… 그 중간에는 일본 있다  (조선일보 2014.01.08)

해외를 떠도는 한국문화재

 


고려불화제작 기법

고려불화는 대부분 비단 바탕 위에 광물질로 만든 안료를 사용하여 제작된다고 한다. 고려불화에 주로 쓰인 적색, 녹색, 청색은 각각 주사, 석록, 석청이라는 광물성 안료에서 나온 것으로 이들 안료는 원석을 가루 낸 뒤 맑은 아교물을 부어 여러 차례 거르는 방식으로 만들었단다. 금가루를 개어 만드는 금니도 고려불화에 많이 사용되었다한다.

안료 가루를 비단 위에 칠하기 위해서는 안료가 비단에 잘 붙을 수 있도록 접착제 역할을 하는 아교가 필요하다. 아교는 동물의 가죽 등에서 추출한 천연 접착제로 물에 녹여서 아교물을 만든 뒤 여기에 안교 가루를 개어 사용했다. 한편 바탕의 뒷면에 채색을 한 후 앞면에서 다시 채색하는 고려불화의 배채법은 깊은 색감을 살리고 안료가 떨어져 나가는 것을 막아 주어 고려불화의 아름다운 모습을 지금까지 고스란히 전해 준다.

 


출처 : 즐거운 시간여행  / 한국의 美  / 그대에게 가는 길  / 조정육의 행복한 그림읽기  / 문화 그리고 여행  / 부처마을  / 아름다운 사람  / 
이외에도 상당히 여러군데서 발췌를 하여 일일이 다 적지를 못하였습니다. 부끄럽게도 남이 열심히 모아놓은 자료들을 허락도 없이 한 곳에다 최대한 모아보려했습니다.

자료를 모으다보니 상당히 공부가 되었고 다른사람들에게도 많은 도움이 되리라 자위해 봅니다. 안타까운 모습도 너무 많이 보게되었습니다. 부디 자비를...

 

 

 

 

 





제1부 '깨달음의 존재, 부처'

현존하는 고려불화를 주제별로 나누면 여래도(부처), 보살도, 나한도, 경상변도 등으로 분류된다. 부처 그림은 비로자나불, 석가불, 약사불, 아미타불 등 다양하다.
그 중에서도 아미타불도, 관음보살도, 지장보살도 같은 정토계불화가 가장 많이 남아 있다. 이는 현세의 복락, 고난으로 부터의 구제, 극락왕생 등 현실적안 기원과 관계가 깊기 때문이다.

1부에서는 고려불화 중에서도 부처를 주존으로 그린 작품들을 전시하였다. 고려시대에는 정토신앙의 성행을 반영하듯 아미타불을 그린 불화가 많다.



비로자나불도(毘盧舍那佛圖)


고려후기 비단에 색, 1620 x 882mm, 일본 후도인(不動院)소장







화면은 배경뿐이 아니라 4면에 테두리까지 모두 화불 혹은 "佛"자로 가득차 있다.

만오천불을 그리고자 했던 화공의 집념과 원력을 보고있자면...

한 작품을 완성하기 위해 얼마나 정성스런 붓질이 들어갔는지 숙연해집니다.


아름다움은 時空을 초월하고 염원은 生死를 뛰어넘는다.


원형 광배 안에 비로자나불이 보관과 법의를 착용하고 영락과 팔찌를 한 모습으로 한쪽 무릎을 껴안고 앉아 있다. 

본 존의 두광(머리둘레의 빛)과 법의(부처님의 옷)는 물론이고 '萬五千佛(만오천불)'이라 써진 윗부분과 화면 하단의 공간에 수많은 화불(化佛)이 그려진 독특한 도상의 그림이다.

그 아래에 흰색 안료로 '大平' 이라는 글자를 썼는데, 글자안에도 수많은 화불을 그려 넣었다.


세부 그림을 자세히 들여다보면 동전같은 원형 안에 울긋불긋하게 그려진 얼굴이 바로 화불이다. '化佛(화불)'이란 부처나 보살이 중생을 제도하기 위해 작은 여래의 모습으로 표현된 형식이다.

화면 하단에는 이불병좌상<二佛竝坐像>이 그려진 탑의 좌우에 화불 무리를 배치하고, 각 무리마다 '五菩薩','十九佛', 五十三佛', '보승칠불<寶勝七佛>' 등의 명칭을 작은 네모칸 안에 써 넣었다.



<비로자나불>
비로사나불(毘盧舍那佛) · 노자나불 · 자나불이라고도 한다. 산스크리트로 ‘태양’이라는 뜻인데, 불지(佛智)의 광대무변함을 상징하는 화엄종(華嚴宗)의 본존불(本尊佛)이다.

무량겁해(無量劫海)에 공덕을 쌓아 정각(正覺)을 성취하고, 연화장(蓮華藏)세계에 살면서 대광명을 발하여 법계(法界)를 두루 비춘다고 한다. 

법 상종(法相宗)에서는 노사나불(盧舍那佛) · 석가불(釋迦佛) · 수용신(受用身) · 변화신(變化身)으로 쓰고, 비로자나불은 자성신(自性身)이라 하여 구별하고 있다.

또 천태종(天台宗)에서는 비로자나불·노사나불·석가불을 법신(法身)·보신(報身)·응신(應身)에 배치하여 설명하고 있고, 밀교(密敎)에서는 《대일경(大日經)》의 설을 계승하여 대일여래(大日如來)와 동체라고 한다.

(네이버백과사전)




비로자나 삼존도(毘盧舍那 三尊圖)


고려후기, 비단에 색, 1230 × 820mm, 독일 쾰른 동아시아박물관 소장









화엄경의 주존 비로자나불이 가운데 대좌 위에 앉고, 그 양쪽으로 문수보살과 보현보살이 서 있는 정면향의 비로자나삼존도이다. 비로자나불의 양손은 가슴 앞에서 모아 지권인(智拳印)을 취하고 있다. 화면 향좌측의 문수보살은 양손으로 여의(如意)를 받쳐 들고 있고, 보현보살은 왼손으로 연꽃 줄기를 받쳐 들었는데 연꽃 위에 경권(經卷)이 놓여 있다. 이 그림은 현재 남아 있는 고려불화 중 유일한 비로자나삼존도라는 점에서 중요한 예이다.


본 존과 협시, 대좌에는 금니선과 금니 문양을 적극적으로 사용하여, 육신부를 제외하면 금니(금물감)가 사용되지 않은 부분이 거의 없다. 본존의 법의와 보현보살의 치마에는 연화당초원문, 문수보살의 치마에는 당초원문을 주조로 하였다. 대좌에도 다양한 금니 문양을 많이 그려 넣었는데, 연꽃 바로 아래의 겹쳐진 원형 무늬, 금강저 무늬, 사자 주변의 육각형 무늬 등 연속문늬를 사용한 것이 눈에 띈다. (국립박물관 학예연구사 박혜원)


(금니는 고운 금가루를 아교풀로 개어서 만든 안료를 의미한다.)




변상도(變相圖)

'변상도'란 경전의 내용을 압축해서 묘사한 그림이다.




관경십육관변상도(觀經16觀變相圖)

고려. 1323년, 비단에 색, 2242×1391mm, 일본 지온인(知恩院) 소장





최하단 가운데 부분의 검은 머리카락을 한 여인이 왕비와 공주로 아마 이들의 시주로 이 그림이 그려지지 않았겠느냐고 해석하는 사람도 있다



변상도란 경전의 내용을 그림으로 표현한 것으로 관경십육경변상도는 『관무량수경』 경전을 그림으로 표현한 것이다.
극락세계에 이르는 16가지 방법을 그림으로 나타내고 그것을 관상함으로써 극락에 도달한다는 것이다.

전체적은 구성은 화면을 세로로 네 부분으로 나누고, 16관의 차례에 따라 위에서 아래로 진행하는 형식이다. 각 관을 나타낸 부분에는 붉은색 구획을 마련하여 금니로 해당 관의 아름을 기재하였다. 또 하단의 화기에는 제 1관(日沒觀)부터 16관(하배생상관 下輩生想觀) 까지 "정토 십육관의경각송(淨土 十六觀依 經各頌)"이라 하여 각 관에 대한 게송을 적어 놓았다.
 
상단의 제 1관(日沒觀=일몰관)은 까마귀가 그려진 붉은 해로 나타내었다. 좌우에는 넘실거리는 물결을 그려 제 2관(水想觀=수상관)을 나타내고, 그아래 제 3관(地想觀=지상관)을 유리지(琉璃地) 위에 황금선이 교차한 모습으로 표현하였다. 제 4관(樹想觀=수상관) 가운데 흰 빛줄기가 뻗어나가는 나무를 중심으로 일곱 그루의 보배나무를 그렸고, 제 5관(池想觀=지상관)은 붉은 여의주에서 물줄기가 솟아나와 보배연못으로 흘러들어가는 모습으로 그렸다.


제 6관(摠想觀=총상관)은 보배연못 아래 천상의 음악이 연주되는 아름다운 누각을 제 7관(華座觀=화좌관)은 화려하게 치장된 대좌 위에 당간을 꽂은 모습으로 표현하였다. 제 8관(像想觀=상상관-화기에는 僧想觀=승상관 으로 기재)화좌 사이에 앉은 삼존상으로 나타내었다. 제 9관(遍觀色想觀=편관색상관), 제 10관(觀音色身觀=관음색신관), 제 11관(勢至身想觀=세지신상관)은 각각 부처님의 몸, 관음보살, 세지보살을 생각하는 관인데, 화면 중앙에 가장 큰 규모의 삼존상으로 그렸다. 부처의 신광 안에는 화불이 있으며, 삼존 좌우로는 승려형과 보살형의 권속이 둘러싸고 있다. 제 12관(普觀想觀=보관상관)은 정토에 나는 것을 관찰 하는 관으로, 탁자를 사이에 두고 승려와 여인 4명이 앉아 있는 모습으로 나타내었다. 


제 13관(雜想觀=잡상관)은 구름으로 둘러싸인 누각 앞에서 아미타불이 협시보살을 거느리고 설법하는 모습이다. 제 14관(上輩生想觀=상배생상관)상배관의 연못에서는 잡상관의 아미타삼존이 이 연못의 상배 왕생자(往生者), 즉 높은 근기의 왕생자들을 맞이하는 역할을 겸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향우측은 제 15관(中輩生想觀=중배생상관) 향좌측은 제 16관(下輩生想觀=하배생상관)을 배치하였다. 한편 향우측의 중배관 연못에서는 두 보살이, 향좌측의 하배관 연못에서는 한 보살이 각각 중배 왕생자들과 하배 왕생자들을 맞이 하고 있어, 왕생의 등급에 따른 차이를 보여준다.


게송에 이어지는 발원문에는 이 공덕이 일체에 미쳐 자신과 중생이 극락에 오르길 바란다는 내용이 적혀 있다.








向우측의 중배관 연못에서는 두 보살이, 향좌측의 하배관 연못에서는 한 보살이 각각 중배 왕생자들과 하배 왕생자들을 맞이 하고 있어, 왕생의 등급에 따른 차이를 보여준다.

하루 만이라도 부처의 가르침을 행한 자는
마땅히 부처를 좇아 극락의 연꽃에 가리라.
수행이 적은데 어떻게 그럴 수 있는가 라고 말하지 말라.
만 개의 횃불도 지푸라기 불에서 나오는 것이니.

-<관경십육관변상도> 게송 중에서


아미타여래 한분이 허공을 꽉 채우니
푸른 부처의 눈은 바다처럼 깨끗하네.
이처럼 가없는 부처의 모습을,
다만 白毫의 모습만 봐도 자연히 모두 보게되네.

-<관경십육관변상도> 게송 중에서



(출처 : 아름다운 사람)




관경십육관변상도(觀經16觀變相圖)

고려후기, 비단에 색, 일본 오타카지<大高寺>소장





상단의 좌측 모습 . 중앙에 학 그림도 있고, 신비로운 빛 아래에는 비천상도 있다.






이작품은 『관무량수경 觀無量壽經』의 중심 부분인 정종분<正宗分>의 내용을 그린 곤경십육관변상도로, 극락세계의 열여섯 가지 장엄한 모습을 관상함으로써 극락에 갈 수 있다는 내용을 담고 있다.


화면의 구도는크게 상단.중앙. 외연부로 나눌 수 있다. 화면 상부에는 Γ¬ 자형태로 9개의 원이 있고, 좌우에 각각 2개의 원으로 13관상을 표현하였다.
상부의 좌측 위에서 아래로 두 번째에 위치한 제 13관 상배관<上輩觀>은 도상을 확인 할 수 있지만, 나머지 모양이 불명확하고 명칭이나 게송이 기재되지도 않아서 각각의 도상을 확인하기가 어렵다.


중앙은 전각을 중심으로 3단으로 구성되어 있다.

하단의 전각에는 부처와 권속들을 배치하고, 좌우에는 빈 대좌와 보리수를 배치하였다. 보리수는 붉은색의 열매를 표현하였다. 

전각의 상단부분에는 중단의 전각을 감싸듯 신비로운 빛이 좌우로 뻗어 올라가고, 여기에 하강하는 비천을 좌우에 배치하였다.


중단의 전각에도 부처와 권속들을 배치 그좌우에는 여러 성중과 공양하는 비천을 그렸다.
상단의 전각에도 부처와 권속들, 구름을 타고 나타나는 시방제불<十方諸佛>과 가릉빈가<迦陵頻伽>를 배치하였다.


(출처 : 아름다운 사람)



원각경변상도(圓覺經變相圖)

고려후기, 비단에 색, 1650x850mm, 미국 보스턴 미술관 소장






원각경, 즉 대방광원각수다라요의경<大方廣圓覺修多羅了義經>의 내용을 그린 불화이다. 원각경은 고려시대에 선종의 근본 경전으로서 매우 중시되어 그 위상이 높았다.

경전의 내용은 문수보살을 미롯한 열두 보살이 부처와의 문답을 통해 부처의 가르침을 받게 된다는 것으로 각 보살의 이름을 딴 12개의 장으로 구성되어 있다.
경전에서는 주존의 존명을 명확하게 밝히지 않았으나, 이 그림에서는 설법하는 자세의 비로자나불을 표현한 것으로 추정된다.

12 명의 보살은 사자를 탄 문수보살과 코끼리를 탄 보현보살, 옆에 방제<旁題>를 두어 존명을 밝힌 보안보살<普眼菩薩>, 금강장보살<金剛藏菩薩>, 미륵보살<彌勒菩薩>, 청정혜보살<淸淨慧菩薩>, 위덕자재보살<威德自在菩薩>, 변음보살<辨音菩薩>, 정제업장보살<淨諸業障菩薩>, 보각보살<普覺菩薩>, 원각보살<圓覺菩薩>, 현선수보살<賢善首菩薩>, 로 확인되어, 경전의 내용과 일치한다

보살들 아래에 역시 방제로서 존명을 기재한 팔만금강, 이십팔천왕, 십만귀왕, 대범왕은 원각경의 마지막 부분에서 이 경전을 지닌 자를 수호할 것을 맹세하는 대중으로서 등장하고 있어, 경전의 내용이 이 그림에 충실히 반영되었음을 알 수 있다. 호림박물관 소장 <원각경변상도>(1357)에서도 유사한 구도가 보인다.


출처 : 도록의 해설서



● 미륵하생경변상도(彌勒下生經變相圖)

고려후기 1350, 비단에 채색, 171.8×92.1cm, 일본 지온인 소장



미륵불



삼국 이래 뿌리깊게 신앙되었던 미륵신앙은 미륵상생경에 의한 도솔천 왕생사상미륵하생경에 의한 용화수하성불의 이른바 메시아 사상으로 나누어 볼 수 있습니다. 앞의 것은 극락왕생의 아미타 사상과 거의 흡사한 것이지만, 뒤의 것은 오랜 후세에 석가불이 미처 구제하지 못한 중생들을 미륵이 남김없이 구제한다는 것으로, 가령 후삼국 때 궁예가 세상을 구제하러 강림한 미륵으로 자칭하기도 하였습니다.



『미륵하생경』에 의하면 미륵은 인도 바라나시 국의 바라문 집안에서 태어나 석가모니 부처님의 교화를 받으면서 수도하다가, 미래에 성불하리라는 수기를 받고 도솔천에 머물며 진리의 법문을 설합니다. 그는 석가모니 부처님 입멸 후 56억 7천만 년이 지난 뒤 사바세계에 다시 태어나 화림원 용화수 아래에서 성불하고 3회에 걸쳐 설법하여 석가모니 부처님이 못다 제도한 중생들을 성불케 한다고 합니다. 이 3회의 법회를 "용화삼회"라고 하는데, 용화수 아래에서 성불하기 이전까지는 미륵보살이라 하고 성불한 이후는 미륵불이라 합니다.

이 작품은 이러한 도솔천의 미륵이 하생하여 용화수 아래에서 성불하고 당시까지 구제되지 못한 모든 대중을 성불시킨다는 『미륵하생경』의 내용을 알기 쉽게 그린 『미륵하생경변상도』로 일종의 교화용 경변상도이지만 본존 미륵불을 크게 클로즈업시켜 화면을 압도하도록 구성했기 때문에 예배용의 존상화적 성격에 가까운 그림입니다.

크게 2등분되는 화면의 상부는 미륵불이 용화수 아래서 중생들을 성불시키기 위해 설법하는 장면으로 전체의 2/3를 차지합니다. 상부 중앙에는 미륵불이 큼직하게 자리잡고 있으며 불상 무릎 좌우로 두 협시 보살이 좀 더 크게 묘사되었는데 이 삼존은 삼각형적인 구도를 보여주고 있습니다. 미륵불 주위에는 보살중 10대 제자들이 좀 더 작게 그려져 있으며 이 주위를 제석 범천, 사천왕, 팔부중 등이 둘러싸고 있습니다.


미륵불은 보통 의좌상(倚坐像)을 하고 계신데, 그 이유는 설법하는 장소가 법회를 하기 위해 꾸며지거나 실내가 아닌 용화수 아래의 길거리인 이유로 가부좌를 하지 않고 무엇인가에 걸터앉은 모습으로 그려집니다.

미륵불의 머리 보주 위에서 올라간 광선이 허공으로 올라가 맴을 돌아 좌우 두 가닥으로 퍼져 나가는 곳에 구름 속에 싸여 있는 2층의 화려한 건물은 성불하기 이전에 거주하던 도솔천 궁의 화려하고도 장엄한 모습이며 그 좌우에 5구씩 부처와 악기를 연주하는 천녀를 그렸다,  이들 하늘 세계와 미륵불이 있는 지상세계를 흰 광선 모양의 둥근 광배가 분리시키고 있는데 불보살들이 발 아래의 청문대중과도 역시 구름으로 구획짓고 있는 점에서 당시 불화의 위계에 의한 계층적 구도를 실감할 수 있습니다.

청문대중 은 바둑판 모양의 지상에 좌우 대칭되는 구도로 묘사되었는데 오른쪽에는 남성, 왼쪽에는 여성이 배치되었다. 이 가운데 가장 주목되는 인물은 서로 마주 바라보면서 꿇어앉은 남녀상과 머리를 깎고 있는 남녀상인데 꿇어 앉은 인물들은 2용왕으로 알려져 있지만 용왕과 용녀일 것이며 삭발하고 있는 인물들은 전륜성왕과 왕비로 생각된다.

이왕족들은 미륵의 설법을 듣고 출가를 결심하여 머리를 깍는 전륜성왕<轉輪聖王> 부부로 추정하기도 하지만 최근 일본에서 공개된 묘만지본에서는 이들이 자씨부수범마<慈氏父修梵摩> 자씨모마하제<慈氏母摩하提>, 즉 미륵의 부모임을 각 도상의 옆에 금니로 기록하고 있어, 지온인본과 신노인본에서도 역시 미륵의 부모를 그린 것이 아닌가 생각된다. 하여튼 이 장면에서는 삭발하고 있는 두 인물이 가장 크게 그려지고 있어서 주인공임이 분명하다.

그리고 하단에는 사람들의 생활상 (가마를 메고 가는 사람들, 씨 뿌려 거두는 추수, 칠보가 떨어져 흩어져 있어도 아무도 욕심내지 않는 모습 등 경전에 묘사된 모습)이 묘사되어 있습니다.

이와같이 이 그림은 미륵불이 용화수 아래에서 성도하고 난 후 전륜성왕 내외와 모든 신하 시녀 그리고 미륵의 부모를 위시한 일체 중생을 세 번에 걸쳐 설법하여 출가성불케 하는 내용을 도해한 것입니다.







전륜성왕의 권속들

경작하는 백성들의 모습



향로와 공양인들

원문과 당초문

미륵불의 연화좌와 연꽃

비천. 화불


이 그림은 친왕원의 작품과 크기는 물론 자세히 살펴보지 않으면 동일하다고 할 수 있을 만큼 모든 모티브의 형상과 배치·구성이 거의 같다. 그러나 묘법에서는 다소 차이가 있어서 미륵삼존 등의 육신부가 금니가 아닌 황토색 계통이며, 묘선 역시 가늘면서 탄력이 있어 생동감을 느끼게 한다. 뿐만 아니라 각 모티브의 형상에 일그러짐이 없고, 건물, 수목 등이 매우 사실적으로 묘사되어 있어 전체적으로 평면인 화폭이면서도 깊이감을 느낄 수 있다.제작 시기는 묘법, 각 모티브의 형상, 그리고 화풍을 통하여 볼 때 친왕원의 작품(1350년)보다 상당히 앞선 것으로 보여, 13세기 말엽 또는 14세기 초엽으로 생각된다. 그리고 이 두 작품은 고려불화에서 많이 보이는 도상 전승의 한 예로써 중요한 위치에 있다고 생각된다. (출처 : 한국사전연구사 한국불교미술대전)


미륵하생경변상도 3점은 비슷한 화면 구성을 보이고 있으나 지온인본 및 신노인본은 서로 거의 같은 구성이고 1294년 작 묘만지본은 약간 다르다. 이로보아 기년명이 없는 지온인본은 1350년 작 신노인본과 모본을 공유했을 가능성 등 좀 더 가까운 관련성을 가지고 제작되었다고 할 수 있다. (출처 : 아름다운 사람)




미륵하생경변상도 (彌勒下生經變相圖)

고려시대 1350 충정왕10년. 견본채색. 1780 x 903mm, 일본 와카야마현 신노인(親王院 친왕원)



석가가 열반에 든 후 56억 7천만 년이 지난 뒤 이 세상에 태어난 도솔천의 미륵보살이 용화수(容華樹) 아래에서 부처가 되어 그때까지 구제받지 못한 중생들을 위해 세 번의 설법회를 열어 모두 성불시킨다는 미륵하생경의 내용을 그린 경변상도이다. 현재 2점이 남아 있는데, 서로 보고 베낀 듯이 유사하나 세부묘사에는 차이가 있다. 가령 이 미륵불은 신체에 금채를 한 반면 지온인[知恩院] 소장의 본존은 살색에 가깝게 표현되어 있다. 지온인의 미륵불화는 제작연대가 없으나 전체적으로 부드럽고 세련되어 다소 경직된 듯 보이는 신노인[親王院]의 불화보다 앞서 제작된 것으로 추정된다.

화면의 상단에는 미륵불이 용화수 아래에서 중생들을 성불시키기 위해 설법하는 장면을, 하단에는 미륵불이 하생(下生)한 곳이라고 알려진 시두말성(翅頭末城)의 모습이 나타나 있다. 화면 가운데에는 의자에 앉은 듯이 두 다리를 내린 미륵불과 같은 자세를 취한 협시보살좌상, 그 주위로 제석, 범천, 십대제자(十大弟子), 십이신장(十二神將)이 배치되어 있다. 윗부분에는 천개(天蓋)를 중심으로 보수와 구름을 탄 5체의 부처 그리고 악기를 연주하는 주악천녀가 그려져 있다.


미륵삼존좌상의 아래에는 설법을 듣고 출가를 결심한 전륜성왕과 왕비가 꿇어앉아 삭발하는 장면을, 그 아래에는 미륵이 하생한 시두말성의 화려한 누각, 말, 코끼리가 끄는 보차, 전륜성왕 및 여러 대신의 모습이 그려져 있다. 또 하단부에 농부가 밭갈이 하는 장면, 추수하는 장면, 금은보화를 쓸어담는 장면 등은 "비가 때맞추어 내려 곡식이 풍성하게 자라고, 한번 심어 7번이나 수확한다"는 『미륵하생경』의 내용을 도상화한 것으로 보인다.

화수(畵手)인 회전(悔前)이 그린 이 미륵불화는 적색과 녹색, 군청이 주조색이며, 문양 및 세부묘사에 금니를 사용하고 있다.


출처 : 한국 미의 재발견 - 불교회화 (유마리, 김승희)



이 불화는 고려불화의 화려함, 보다 세련되고 섬세한 필치, 틀에 잡힌 구성과 색채 등을 능히 볼 수 있는 작품이다. 이 불화의 화려함은 금분을 많이 쓴 까닭에서 찾을 수 있다. 그러면서도 분위기가 뜨지 않고 품격을 유지할 수 있었던 것은 채색을 적은 숫자로 썼고, 서로 멀지않은 색들을 썼기 때문인 듯하다.  미륵불의 가슴에는 역으로 된 만자(卍)자가 금니로 그려있고, 부처의 붉은 가사 전면에는 원문을 가득 그려 넣었다. 원문 안에는 가득한 금니의 문양들이 그려있다.  고려불화에서 재미있는 사실은 간혹 그렇지 않은 경우도 있으나, 이 원문이 옷주름에 접히더라도 항상 원형을 유지한다는 것이다. 이 불화에는 부처님이 밟고 있는 연화대좌와 보살들의 연화대좌, 미륵불의 연화좌 사이 등 합하여 7개의 연꽃이 큼지막하고 탐스럽게 표현되었다.


출처 : 기주짱



이 그림은 도솔천의 미륵이 하생하여 용화보리수 아래에서 성불하고 그때까지 구제받지 못한 중생들을 구제하여 준다는 『미륵하생경(彌勒下生經)』의 내용을 회화화한 것이다.
화면의 구성은 크게 상하로 나뉘어 있는데 상부에는 미륵삼존을 중심으로 그 주위에 두 보살과 천부상, 그리고 성문중들과 12신장 등이 배치되어 있으며 미륵삼존의 위에는 시방불(十方佛)과 주악천상이 표현되어 있다. 화면 하부에는 미륵불이 하생한 시두미대성 (翅頭未大城)과 용왕, 그리고 다시 그 밑에는 풍부한 농작의 수확과 온갖 보물들, 속세의 삼악도고(三惡道苦) 등이 표현되어 있다. 전체적으로 볼 때 화면 상부는 예배적 장엄을, 하부는 설화적 이야기를 표현하여 이해하기 쉬운 교화적 성격의 구성을 보이고 있다.


묘법은 미륵삼존 및 몇몇 상들의 육신부를 금니로 칠하였고, 윤곽 및 세부선들이 탄력을 잃고 있어 생동감을 상실하고 있다. 그러나 색감이나 기본적인 표현기법은 고려불화의 전통을 잇고 있으며 특히 오른쪽 아래에 쓰여있는 명문을 보면 「지정십년(至正十年)」 즉 충정왕 10년(1350년)에 제작되었음을 알 수 있어 고려불화의 전체적 흐름으로 볼 때 화풍과 제작년대가 일치한다고 보여진다.


(출처 : 한국사전연구사 한국불교미술대전)

(참고 : 한국민족문화대백과)


그림 하부 우측에 고려시대 추수하는 농민의 모습이 묘사되어 있다. 벼를 베는 사람과 도리께로 타작하고 떨어진 낱알을 쓰는 등의 갖가지 풍요로운 가을 정경은 "비가 때맞추어 내려 곡식이 풍성하게 자라고 한번 심어 7번이나 수확한다"는 하생경의 표현을 도상화시켰다 할 수 있다. 그림 속에서 추수하는 농민들의 복식은 머리에는 두건을 쓰고 있고, 저고리와 바지를 착용하였으며 저고리는 허리부분의 대로 고정되어 있다. 허리 아래로 옆선에 트임이 있는 저고리는 백색이거나 붉은 계열, 혹은 녹색계열이며, 바지는 모두 흰색에 가깝다. 특징적인 것은 바지의 통이 매우 좁다는 것이다.


(출처 : 한국의 고유복식)




미륵하생경변상도 (彌勒下生經變相圖)

고려 1294년, 비단에 색, 일본 묘만지<妙滿寺>소장


묘만지본에는 최상단에 '미륵하생지도', 하단 화기에 '용화회를 주제로 함을 밝혔다. 미륵경전에서 용화회는 본래 미륵불이 하생하여 용화수 아래에서 여는 법회를 의미하지만, 고려시대에는 미륵불에 대한 불교의식도 용화회라 일컬었다. 고려시대에는 충렬왕이 1301년과 1302년에 광명사에서 친히 용화회를 열었다는 기록 등 용화회 개최에 대한 기록이 다수 남아 있다. 융성했던 법상종과 미륵신앙이 용화회 개최 및 미륵하생경변상도 제작의 배경이 되었음을 보여준다.


(출처 : 아름다운 사람)





아미타여래도(阿彌陀如來圖)


- 극락에 가길 기원하는 아미타불 -
아미타불은 서방정토 극락세계에 머물면서 법을 설파하는 부처로서 "나무아미타불 관세음보살"이라고 쉽게 입에 올리게되는 법문의 부처이다.

살았을 때 선행과 염불을 많이 한 사람은 임종할 때 아미타불이 극락정토로 맞이해간다는 '내영도'형식이 많다.


최근 연구에 따르면 전세계에 전하는 고려불화 숫자는 1백60여점에 이른다고 한다. 고려 불화라고 해도 그려진 내용을 살펴보면 크게 몇 가지로 나뉜다.

우선 깨달은 자인 부처님 모습을 그린 그림이 있다. 또 중생을 구제하겠다는 서원(誓願)을 하고 성불을 미룬 여러 보살들을 주제로 한 그림들이 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인간의 모습을 한 채 깨달음을 수행하는 수행자 모습의 나한이 있다.
 
부처님 그림도 신앙 대상에 따라 달라진다.

불법, 즉 가르침을 중시할 경우에는 비로자나불이 된다. 또 국락 정토의 왕생을 기원하는 때에는 아미타불이다. 그리고 깨달음 그 자체를 중요시할 경우에는 석가모니불이 된다.
 
현재 전하는 고려불화 가운데 50여점, 즉 3분의 1 가까운 수자를 차지하는 불화가 이 아미타불을 그린 불화다.

아미타불은 서방 극락정토를 주재하시는 부처님이다. 한마디로 말하면 사람이 죽은 뒤 극락 세계에 태어나 영원히 살 수 있게 해주시는 부처님인 것이다. 


‘나무아미타불’은 아미타불을 전적으로 믿고 따르겠다는 의미다




아미타 삼존도(阿彌陀 三尊圖)


고려시대, 1230 x 570mm, 일본 동경국립박물관







본존불의 오른손은 앞을 향하여 밑으로 내리고 있다. 손모양이 잘 보이지 않아 돋보기로 봐야 보인다. 손바닥에는 법률이 금니로 그려져 있다.

왼손은 엄지와 중지를 붙여 원을 만들고 있고 나머지 손가락은 앞으로 뻗고 있다. 아미타불의 수인이다.



아미타불이 관음보살과 세지보살을 거느리고 왕생자를 맞이하러 오는 내영도 형식의 아미타삼존도이다. 이 작품은 특히 아미타삼존의 발 아래에 구름 표현이 있다는 점에서 주목받은 바 있다. 내영도가 발달한 일본에서는 아미타불 일행이 타는 구름이 내영도의 거의 필수적인 도상적 요소인 데 비해 고려불화 내영도에는 구름이 없다는 점에서, 이와 같은 형식은 내영도가 아니라 수기도(授記圖) 즉 수기를 주는 장면이라 주장되기도 하였다. 이러한 상황에서 구름이 표현된 이 아미타삼존도는 고려불화 내영도가 구름을 생략했을 뿐 내영 장면을 의도한 것이 맞다는 근거로 제시되기도 했다.


그 러나 일본 아미타내영도에 대부분 구름이 표현된다 하여 구름을 내영도의 필수적 도상으로 보기는 어렵고, 이 그림에 그려진 구름도 일본 아미타내영도의 구름과는 다르다. 일본 아미타내영도에서는 아미타 일행이 실제로 구름 위에 올라타고 왕생자를 맞이하러 오는 데 비해, 여기서는 단순히 아미타 일행이 위치한 공간이 구름 위 공중임을 암시하는 데 지나지 않기 때문이다. 따라서 내영도인지 아닌지는 구름의 존재 여부보다 당시 고려인들이 어떤 신앙을 가졌으며 내영(혹은 수기)에 대해 어떻게 생각했는지가 더 중요한 기준이라고 할 수 있으며, 아미타불 일행의 모습 자체는 구름의 존재와 상관없이 내용을 암시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이 아미타삼존도는 형식상 하쿠쓰루미술관((白鶴) 및 MOA미술관 소장 아미타삼존도들과 같은 계열로, 고개를 앞으로 내민 아미타불의 자세와 두 협시보살의 배치가 매우 유사한 구성을 보여준다. 다만 관음보살이 든 버드나무 가지가 하쿠쓰루미술관본에는 없으며, 세지보살이 지물 없이 옷자락을 잡고 있는 것도 다른 점이다.


이 아미타삼존도의 또 다른 특징은 문양이 매우 세밀하다는 것이다. 아미타불의 붉은 가사에는 고려불화 특유의 당초원문이 그려져 있는데, 달팽이처럼 말린 덩굴의 표현은 가느다란 금니선을 세 겹으로 구사하고 덩굴줄기 사이에는 작은 삼각형을 무수히 채워 넣었다. 이 문양에서 사용된 금니선의 간격은 비단 바탕의 올 간격보다도 좁을 정도로 세밀함의 극치를 보여준다. 협시보살에도 다양한 문양이 사용되었다.


(출처 : 부처마을)




아미타 삼존도(阿彌陀 三尊圖)


고려후기, 비단에 색, 1005x542mm, 일본 MOA미술관 소장, 일본 중요문화재




(두번째 사진) 아미타불의 오른쪽, 그림에서는 왼쪽에 대세지보살이 있다. 서방극락세계에 있는 지혜 및 광명이 으뜸은 보살이다. 지혜로 중생의 어리석음을 없애주는 보살이기도 하다. 정수리에 보병을 이고 천관을 쓰고 있다. 가슴에는 자그만 상자를 들고 있다. 가슴에 늘어뜨린 목걸이인듯한 장식품도 대단하다. 팔찌도 이쁘다. 작은 상자를 들고 있는 손의 손톱이 길쭉길쭉하다. 요즘 화려하게 치장해야 하는 여인네의 손톱같다. 손모양도 특이하다. 머리에 이고 있는 너울 하나에 등근 금니 무늬가 화려하다. 왕생자를 맞이하는 아미타불과 대세지보살의 자세가 참으로 포용적이다.

(세번째 사진) 아미타불의 왼쪽, 보는 입장에서는 오른쪽에 관세음보살이 서 있다. 왼손에는 정병을 들고 있고, 오른손에는 버드나무 가지를 들고 있다. 정병을 들고 있는 왼손의 모습이 잘 보이지 않는다. 화려하기가 더 이상 이를데가 없다. 거대한 목걸이와 아름다운 팔찌가 드러나 있다. 손 모양의 우아함도 대단하다. 아미타불의 붉은 옷과 원형의 금니 무늬와 관음보살의 광배가 만나는 곳에서 광배의 바깥 금니색은 더욱 진하다. 검은색 배경에 그려진 광배의 금니보다 훨씬 진하게 표현되어 있다. 그래야 비슷해지니 말이다. 역시 왕생자를 맞이하는 공손하고 친절한 모습이다.


내영도 형식의 아미타삼존도이다. 본존은 오른손 바닥을 내밀며 팔을 길게 뻗고 시선은 아래를 응시함으로써 왕생자를 맞이하는 분위기를 강조하였다.

아미타불과 보살의 얼굴은 경직되지 않고 생동감이 있으며, 고개를 약간 숙이는 시선 처리와 진행방향의 암시로 인해 마치 그림의 한 끝에 왕생자가 있는 듯한 분위기를 만들어 내고 있다.

아미타불, 관세음보살, 대세지보살 모두 연꽃 위에 올라가 있다. 아미타불은 붉은 옷을 입고 있는데, 원형의 꽃무늬를 금니로 그려넣었다. 옷은 주름져 있으나 금니 무늬는 원형을 그대로 유지하고 있다. 이렇게 비사실적으로 처리해야 더욱 근엄하게 보이기 때문일 것이다. 좌우의 협시보살의 너울 옷은 환상적이다. 너울에 표시되어 있는 원형의 금니무늬도 원형을 유지하고 있지만, 가장자리 원형의 무늬가 겹치는 곳에서는 원형을 유지하지 못했다. 원형의 근원성도 너무나 말도 안되는 곳에서는 사실성을 회복했다. 세 분의 두광 표현도 너울을 그린 것과 유사하다.


이 작품은 일반적으로 고려불화가 육신부에 주선을 사용하는 데 비해 본존의 육신부에 주선을 거의 사용하지 않은 점, 그리고 옷주름 표현에서 먹선 또는 한 단계 짙은 색선을 긋고 가장자리를 따라 가늘게 금니선을 덧그리는 관습적 표현을 사용하지 않고 먹선 또는 한 단계 짙은 색선만 사용하였다는 점이 표현상의 특징이다. 또한 보통 고려불화에 그려지는 원형 문양이 원칙적으로 형태만 원으로 형성될 뿐 가장자리에 윤곽선이 그러지지 않는 데 비해, 이 불화의 원형 문양은 실제로 윤곽선을 돌리려는 경향이 강하다는 점도 흥미롭다.


(출처 : 부처마을 - 중앙국립박물관 학예연구사 박혜원 글)



아미타 삼존도(阿彌陀 三尊圖)


비단채색, 1030 × 680mm











연꽃을 밟고 서있는 아미타여래를 가운데 두고, 좌우에 역시 연꽃을 밟고 서 있는 관음보살과 대세지보살이 모셔져있다.





아미타 삼존도(阿彌陀 三尊圖)


고려 후기. 1173 x 602mm. 미국 메트로폴리탄박물관 소장.









중품중생인을 결하고 높은 대좌 위에 앉은 아미타불이 입상의 관음보살과 세지보살을 거느리고 있는 설법도 형식의 아미타 삼존도이다.

얼굴이 정방형에 가깝고 당당하고 중량감 있는 신체를 가진 아미타불에 비해 보살은 세정한 비례를 보인다.


두 보살은 모두 사라<紗羅>를 착용한 모습으로, 투명하고 우아한 표현에서 고려 불화의 수준 높은 기법을 볼 수 있다. 관음보살은 좌상의 화불이 표현된 보관을 쓰고 왼손에는 정병을, 오른손에는 버즈나무 가지를 들었다. 세지보살은 정병이 표현된 보관을 쓰고 양손을 가슴 앞으로 모아 끈이 달린 경합을 감싸 쥐고 있다. 『관무량수경』에서 설하는 16관중 제 11상에서 세지보살의 모습을 "육계 위에 보병<寶甁>이 있어 온갖 光明이 가득하여 두루 佛事를 나툰다고" 묘사하는데, 보관에 그려지는 정병의 표현은 이에 입각한 것이다


(출처 : 아름다운 사람)




아미타 삼존도(阿彌陀 三尊圖)


고려 1330년, 비단에 색, 일본 호온지<法恩寺>소장 일본 중요문화재




좌측은 관세음보살, 우측은 대세지보살을 그리고 있다.



아미타삼존도는 아미타불, 관세음보살, 세지보살로 이루어지나 여기에 아난과 가섭을 더한 특수한 형식의 아미타 삼존도이다.
아난은 양손을 합장하고 가섭은 발우를 받쳐 들고 있다. 협시보살이 모두 연화좌위에 양다리를 포개고 앉은 자세로 표현된 것은 고려불화의 다른 작품에서 볼 수 없는 특이한 점이다.

관세음보살은 버드나무 가지를,세지보살은 경책이 놓인 연꽃줄기를 들고 있다.

또 하나 특이한 점은, 고려불화가 대부분 권문세족등 귀족계층의 후원으로 제작되었는데 이작품은 화기에 의해 향도<香徒>의 후원으로 제작되었음이 명시되어있다는 점이다.

香徒는 신라시대부터 시작된 불교 신앙결사의 한 형태로, 수행을 위한 것이기도 하지만 특히 佛事를 위한 경제적 보시의 성격이 짙은 모임이었다.

* 향도들은 주로 불상, 불화, 종, 탑 등을 조성하였다

(출처 : 아름다운 사람)






아미타 삼존도(阿彌陀 三尊圖)


고려 후기. 1112 x 509mm. 일본 네즈미술관 소장.

아미타불 본존은 얼굴과 턱선이 풍만하고 손의 표현이 두툼하며, 육신부의 윤곽을 표현하는 주선이 다른작품에 비해 굵고 경직되어 있어 전체적으로 둔중하고 강한 인상을 주는 것이 특징이다.

하단의  협시보살에서는 그러한 경향이 보이지 않는다. 특히 본존은 육신부 전체를 금니로 칠한 데 비해 보살의 육신부는 살구색을 칠하였고 본존보다 밝고 발그레한 주선과 붉은 바림으로 생동감 있게 표현하였다.



설법도 형식에서 두손모두 엄지와 중지를 붙인 상태로 오른손은 가슴 높이로 세워 들고 왼손은 명치 높이로 눕혀 든 모습을 보이는 데 비해, 이 작품에서는 오른손은 손가락을 붙이지 않고 있으며, 왼손을 옆구리 정도로 내려 들고 있다. 본존은 얼굴과 턱선이 풍만하고 손의 표현이 두툼하며, 육신부의 윤곽을 표현하는 주선이 다른작품에 비해 굵고 경직되어 있어 전체적으로 둔중하고 강한 인상을 주는 것이 특징이다. 그러나 협시보살에서는 그러한 경향이 보이지 않는다. 특히 본존은 육신부 전체를 금니로 칠한 데 비해 보살의 육신부는 살구색을 칠하였고 본존보다 밝고 발그레한 주선과 붉은 바림으로 생동감 있게 표현하였다.


(출처 : 아름다운 사람)





아미타 삼존도(阿彌陀 三尊圖)


고려후기. 비단에 색, 1100x510mm, 삼성미술관 리움 소장, 국보 218호

(2) 아미타삼존도는 대부분 아미타불을 중심에 두고 좌우에 관세음보살과 대세지보살을 거느리는 형상을 띠고 있다. 그러나 이 그림에서는 대세지보살을 지장보살이 대신하고 있다. 지장보살은 지옥에 떨어진 존재까지도 성불시킨 뒤에 마지막으로 해탈하겠다는 서원을 세우고 있는 그야말로 대자대비한 보살이다. 극락에 왕생하는 자를 맞이하는 이 그림에서는 어쩌면 지혜를 일깨워준다는 대세지보살보다 지장보살이 더 어울릴 지도 모를일이다. 지장보살은 머리를 깎았고, 금니로 표현된 등근 구슬을 손으로 받들고 있다.

(3) 대자대비의 관음보살이 본존의 한발 앞에 나와 몸을 앞으로 굽힌 채 내영자에게 두 손을 뻗어 손 위에 올려놓은 연꽃 대좌 위로 맞아들이려는 자세를 취하고 있다. 지옥에 떨어진 마지막 한 명의 중생까지 구원하지 않고서는 부처가 되지 않겠다는 지장 보살은 소년처럼 앳된 모습으로 표현되어 있다. 이 구도자처럼 관음과 지장의 도움으로 아미타불이 주재하는 극락에 왕생하고픈 고려 귀족들의 마음이 잘 나타나 있다.



아미타불이 보살들을 거느리고 왕생자를 맞이하러 오는 내영도 형식의 아미타삼존도는 고려불화에서 상당수 찾아볼 수 있으나, 이 작품은 그 중에서도 내영도의 맥락이 가장 강하게 드러난 작품으로 손꼽힌다. 아미타불의 머리에서 뻗어 나온 빛은 두 손을 모으고 무릎을 끓은 왕생자를 감싸면서 그가 아미타불에 의해 극락왕생의 길로 곧 인도될 것임을 강하게 암시한다. 아미타불 앞으로 나와 왕생자에게 다가선 관음보살은 허리를 굽혀 왕생자가 탈 금련화(金蓮花)를 내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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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존도하면 대부분 중심이 되는 본존이 중앙에 있고 좌우에 협시보살이 있게 마련인데, 이 그림은 오른쪽에 아미타불이 있고, 왼쪽에 지장보살과 관음보살이 서 있다. 관음보살은 약간 구부려 왕생자를 적극적으로 맞이하고 있는 특이한 그림이다. 그래서 덩치가 가장 큰 아미타불이 중심에서 약간 오른쪽으로 치우쳤고, 지장보살이 부처의 오른쪽에, 관음보살이 부처의 앞 오른쪽에 위치하고 있어 약간 헝클어진 균형을 완벽하게 잡고 있다. 아미타불의 오른손은 아래로 내렸고, 왼손은 가슴 부근에 있는데 잘 보이지 않는다. 아마도 여원인 즉 설법할 때의 수인이지 않을까 싶다. 얼굴과 가슴 그리고 손은 검게 나타나 있는데 안타깝게도 그 부분을 칠한 염료가 탈색한 듯하다.


아미타불이 왕생자를 향해 빛줄기를 방사하고, 관음보살이 연화대를 내밀어 왕생자를 태우려는 모습의 삼존도 형식의 내영도는 서하의 아미타내영도에서 자주 볼 수 있는 것으로 그 관련성은 오래 전부터 주목받았다. 이 고려불화의 내영도와 서하의 내영도가 같은 모티브를 갖게 된 원인은 아직 구체적으로 밝혀져 있지 않으며 이 작품 외에 다른 고려불화 내영도에서는 현재까지 이러한 도상이 발견되지 않고 있다는 점에서 이 작품은 희소하고 흥미로운 사례이다. 일반적으로 아미타불이 관음보살과 세지보살을 거느리고 있는 모습인데 비해, 여기서는 세지보살 대신 보주를 든 지장보살이 그려진 점도 특이한 점이다.


출처 : 부처마을


아미타 내영도에는 몇가지 형식이 있는데, 아미타불 단독으로 왕생자를 맞이해 가는 장면, 아미타 삼존불이 맞이해 가는 장면, 아미타불과 8대 보살이 맞이해 가는 장면, 아미타불과 25 보살 또는 많은 성중이 맞이해 가는 장면 등이 있다.아뭏든 아미타불은 단독 예배를 위한 아미타불 존상화, 아미타 내영도, 관경변상도 등의 여러가지 모습으로 수없이 많이 그려지고 숭배되었다. 이 그림들은 왕족이나 귀족의 원당이나 사찰의 무량수전, 극락전, 아미타전 등에 봉안되었다.


위 그림 형식의 모습은 서하西夏에서 그려진 아미타내영도에서 자주 볼 수 있는 것으로 그 관련성이 오래 전부터 주목받고 있다.

아래의 그림은 위의 그림과 주제와 구도가 아주 비슷한 서하의 그림이다. 이번에 같이 전시되었다.






▲ (左) 아미타삼존내영도, 중국 서하西夏 13세기, 면에 색, 142.5*94.0cm 러시아 에르미타주박물관 소장

아미타불과 관음보살, 세지보살이 구름을 타고 죽은 자를 맞이하러 오는 아미타삼존내영도이다. 중국계에 속하는 불화이다. 관음보살의 보관에는 화불이, 세지보살의 보관에는 정병이 있어 존격을 뚜렷이 드러내 준다. 나무 밑에 앉은 왕생자는 승려의 차림으로 두 손을 합장하고 있으며, 그의 머리에서 마치 영혼과 같은 빛줄기가 위로 발하고 있다. 빛줄기 속에는 왕생(다시 태어남)을 의미하는 어린아이가 막 연화대에 오르려 하고, 아미타불의 이마에서 발하는 서기가 내려와 어린아이를 감싸고 있다. 손을 내민 아미타불, 연화대를 들고 다가서는 보살, 그 앞의 왕생자로 이루어지는 이러한 구도는 고려불화 중 <아미타 삼존도>와 매우 가까워 오래 전부터 주목받았다.


(中, 右) 아미타불도, 중국 서하西夏 12-13세기, 비단에 색, 러시아 에르미타주작물관 소장





아미타 삼존도(阿彌陀 三尊圖)


고려, 일본 가쿠린지(鶴林寺) 소장 중 도난. 일본 중요문화재












● 돌려줘야 하나 말아야 하나.

아미타삼존도 사건 계기로 본 해외문화재 환수문제

국내 절도범이 2002년 7월 일본 효고(兵庫)현 가쿠린지(鶴林寺)에서 훔쳐 반입한 고려불화 아미타삼존도의 반환여부가 논란이 되고 있다. 민법의 ‘선의취득’ 조항을 들어 돌려줄 필요가 없다는 의견이 대세를 이루는 가운데 유네스코 협약에 따라 돌려줘야 한다는 주장도 제기되고 있다. 이 아미타삼존도는 국내 반입 후 4~5차례 주인이 바뀐 끝에, 최종 구매자가 대구 어느 사찰에 기증한 것으로 확인됐으나 기증받은 사찰은 도난당했다고 주장, 아직 소재가 파악되지 않고 있다. (출처 : 현대불교 2004.12.03)


● 훔쳐 온 문화재는 어디로 갔나?

얼마전 일본의 절에 보관중이던 고려 불화 한 점이 우리 나라 사람에 의하여 절취되었고, 그 절취범은 국내에 판매를 하였다고 경찰에서 진술하였습니다. 그러나 경찰은 이 사건의 처리에 있어 국내에서 판매하여 소장하고 있다는 경북 모 암자 주지의 완강한 부인으로 말미암아 결국은 사건을 종결하고야 말았습니다. 그 사건의 전말은 다음과 같습니다... (출처 : 수수께끼의 낡은 보물창고 2005.06.13)


서울중앙지검을 日本사찰의 대리인으로 방문한 제일교포2세인 정광균씨

● "일본서 도난당한 고려 佛經 한국에 있다" 10여년 전에 종결된 사안… [日 '고려 유물 도난' 재수사 요청]

조선왕실의궤 반환 맞춰 - 日, 민사소송은 할 수 있지만 소유자 몰라 사실상 불가능

일본이 조선왕실의궤 등 1205권의 한국 도서를 반환키로 하면서 1990년대 이후 일본에서 도난당한 고려시대의 중요 문화재가 한국으로 밀반입됐다며 이에 대한 재조사를 요청한 것으로 8일 확인됐다... 일본 외무성이 재조사를 요청한 것은 나가사키현의 안코쿠지(安��寺)가 소유했던 고려판 대반야바라밀다경(高麗版大般若波羅蜜多經)과 효고현의 가쿠린지(鶴林寺)가 보관했던 아미타 삼존도 불화다....  (출처 : 조선일보 2011.05.09)




"목숨 걸고, 고려佛畵 찾아오라"
日사찰 주지 특명… 대리인 방한, 정부가 문화재 지정땐 환수 불투명


‘일본 원정 문화재 절도단’이 일본 사찰에서 훔친 고려 불화(佛畵)를 되찾으려고 일본 사찰 관계자가 지난 7일 한국을 방문했다... 재일동포 2세인 일본 사찰측 대리인(59)은 9일 본지 기자와 만나 “고려 불화를 소장했던 일본 효고(兵庫)현 가쿠린지(鶴林寺) 주지로부터 ‘목숨을 걸고’ 아미타삼존상을 되찾아 오라는 지시를 받았다”고 말했다. 선대로부터 가보처럼 물려온 물건을 자기 대에서 잃어버린 것을 불명예스럽게 생각한다는 것이다. 그는 “한국 민법상 ‘선의 취득의 원칙’에 의해 대구의 모 암자에 고려 불화 소유권이 있다면 적당한 값을 치르고서라도 되찾아 가겠다”고 했다. (출처 : 조선일보 2011.05.09)






아미타 팔대보살도(阿彌陀八大菩薩圖)


고려 1320년, 177.2cm×91cm, 비단에 채색, 일본 송미사 소장.















아미타 팔대보살도(阿彌陀八大菩薩圖)


고려후기, 비단에 색, 175.3 X 84.3. 일본 도쿄예술대학<東京藝術大學>소장








아미타불 아래 여덟 보살의 몸이 향하는 방향이 엄격한 좌우 대칭을 이루어 고후쿠고코쿠젠지<廣福護國禪寺>소장본에 비해 한층 정적이고 경직된 느낌을 준다.
고 려 말로 갈수록 구도가 좌우대칭을 강조하게 되고, 조선시대 예배화에 보이는 정면성으로의 지향이 뚜렸해진다.

이 작품에서는 통상 앞줄 중앙에 배치되는 관음보살과 세지보살이 뒷줄에 배열되었는데, 이러한 예는 고려의 아미타팔대보살도 중 유일하다.

이는 달리 보면 관음보살과 세지보살이 본존 가까이로 이동한 것으로도 볼 수 있다.

조선 전기에 들어서면 관음보살, 세지보살을 제외한 다른 보살들의 지물이 점차 사라지거나 연꽃으로 획일화되면서 화면에서 아미타삼존만 개별성을 갖게 되는데,

이러한 현상이 이미 이때 부터 감지된다고 볼 수 있을 것이다.

(출처 : 아름다운 사람)





아미타 팔대보살도(阿彌陀八大菩薩圖)


고려후기, 비단에 색, 일본 고후쿠고코쿠젠지<廣福護國禪寺>소장









대좌 위에 결가부좌한 아미타불 아래로 여덟 보살이 좌우 네 명씩 서 있는 구도로, 보살이 약간씩 몸을 튼 모습과 변화 있는 시선 처리, 자연스러운 묘법 등에서 아미타팔대보살도 중 시대가 이른 것으로 추정되는 작품이다.


아미타불의 좌측 제일 앞에 서 있는 보살은 보관에 화불이 있고 내려뜨린 왼손에 정병을 들고 있다. 이 보살과 대칭되는 위치의 보살은 보관에 정병이 있고 왼손에 경합을 들고 있다.

이러한 지물과 보관 위의 상징물은 아미타정토도(순희淳熙 10년 - 1183년, 명, 지온인知恩院 소장, ) 등 남송대 불화에서 관음보살, 세지보살을 표현한 전형적인 방법이다.
서방극락정토에 중생을 왕생시키고자 하는 아미타불의 본원을 성취하는 실천자 무리로서 팔대보살이 아미타불과 함께 신앙되었다고 생각된다.


(출처 : 아름다운 사람)





아미타 팔대보살도(阿彌陀八大菩薩圖)


고려시대, 173.1×91.1, 비단에 채색, 日本 京都 교토 조코지(淨敎寺) 소장




얼굴을 정면으로 향한 두 보살이 있어서 이채롭다. 아마도 시주를 크게 한 인물일 것이란 분석이 있다.



아미타여래가 여덟 보살을 거느리고 약간 오른쪽을 향하여 움직이는 듯한 구도의 내영도이다. 얼굴은 약간 장방형이고, 입술은 작게 묘사되어 있으며, 착의는 지장보살을 포함하여 모든 보살이 베일을 쓰고 있는 것으로 표현되어 있다. 색채는 朱, 綠靑, 群靑을 주조색으로 하였으나 몸체에는 금니를 사용하였고 윤곽선을 따라 朱로 약간 바림을 하였다. 문양은 본존의 가사 뿐 아니라 앞줄 네 보살의 베일에도 연화당초원문을 사용하였다. 몸체부분에 금니를 칠하고 모든 보살이 베일을 쓰고, 각 부분에 치밀하게 문양을 묘사하고 있으며, 윤곽선 또한 확실하여 표현 의도는 쉽게 파악할 수 있다. 상용에 이지러짐이 없고 배색의 효과도 있어 안정된 느낌을 주고 있다.


제작시기는 작은 입술과 장식 과잉 등 형식화가 엿보여 14세기 중반으로 보여진다.

한편 관음보살의 왼발 옆에는 금니로 쓴 “佰全書”라는 명문이 있는데 여기서의 佰全은 이 그림을 그린 작가를 의미한다고 보이나, 그의 이력에 대해서는 알 수가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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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면 상부에 천개가 그려져 있다는 점을 빼면, 지장보살을 포함한 여덜 보살이 모두 보관 위까지 베일을 쓰고 있으며, 방형의 경권을 들던 보살이 두루마리형의 경권을 들었다는 점, 보주를 든 보살과 쌍을 이루는 보살이 기존의 연화와는 다른, 잔가지가 여럿 달린 꽃가지를 들고 있다는 점에서 게간지 소장본과 공통되는 도상적 특징을 갖고 있다.

신체에는 금니를 바탕으로 칠하고 윤곽선을 따라 주색으로 바림을 하였는데, 이로 인애 보살의 이목구비나 삼도가 확실하게 표현되었으나 다소 화면이 번잡스러운 느낌이 있다. 시대가 내려갈수록 작게 표현되는 입술, 장식적 경향을 고려할 때 고려 말에 가까운 시기에 제작되었을 것으로 생각된다. 독고저를 든 보살의 왼발 아래쪽에 금니로 '伯全畵'라고 쓴 명문이 남아 있는데, 여기것의 백전은 화사의 이름으로 추정된다.(양)



아미타 팔대보살도(阿彌陀八大菩薩圖)


고려후기,비단에 색,143x87cm, 일본도쿠가와미술관 소장















아미타 팔대보살도(阿彌陀八大菩薩圖)


고려 1307년. 철 위에 금. 22.5 x 13.0cm. 국립중앙박물관 소장.



(뒷면) 담무갈보살 및 지장보살도,
<고려 1307년>, 칠 위에 금








앞면에 그려진 아미타팔대보살도의 불보살은 모두 측면으로 살짝 몸을 돌리고 있어 얼굴이 갸름하게 묘사 되었다.

다른 아미타팔대보살도에 비해 큰 지물을 갖고 있는 것이 특징이며, 앞줄 중앙 좌측의 보살은 왼손에 발<鉢>을 받쳐 들고 오른손으로는 버드나무 가지를 잡고 있다.

관음보살의 도상으로 정병 대신 이러한  지물이 채택된 것은 고려시대 수월관음도의 도상에서 영향을 받았다고 생각된다.
 
세로 22.5cm, 가로 13cm, 두께 1cm의 목판에 옻칠을 하고 금선묘로 앞면에 아미타팔대보살도, 뒷면에 금강산담무갈보살<金剛山曇無竭菩薩>및 지장보살을 그린 독특한 형식의 불화이다.

어딘가에 꽂아두고 봉안했던 것으로 보이며 하단 가장자리에 2개의 촉이 남아 있다.

촉과 촉 사이 공간에 "대덕십일년정미팔월일 근하노 영동원 □ 득 □ 大德十一年 丁未 八月 日 謹畵魯 英同願 □ 得 □ " 라는 발원 명문이 있어

이 불화가 충렬왕 33년인 1307년 8월에 노영<魯英>이라는 화사<畵師>가 그린 것임을 알 수 있다. 이는 연대가 확실한 아미타팔대보살도 중 가장 이른 예이다.


(출처 : 아름다운 사람)





아미타 여래도(阿彌陀 如來圖)


고려후기. 비단에 색. 190 * 87.2 cm. 일본 교토 쇼보지(正法寺) 소장, 일본 중요문화재

보존 상태가 좋아 당당하면서도 균형잡힌 부처의 모습이 생생하게 느껴지는 작품입니다. 붉은색 가사속에는 금니로 여러가지 연화원문을 세밀하게 그렸으며, 승각기에는 파도문을, 오른팔에 걸친 대의에는 운봉문을 그렸습니다.

아미타여래도(阿彌陀如來圖) 세부도

<아미타불도>, 중국 남송,
112,5×48.5cm, 일본 곤렌지소장

<아미타내영도>, 일본 가마쿠라 시대
160×85cm, 일본 나라국립박물관

세부 그림과 함께 중국과 일본의 아미타여래도를 비교해보시기 바랍니다.



내영도 형식의 아미타불도이다. 왼손을 가슴 높이에 올리고, 오른손을 아래로 내린 채 앞으로 진행하는 자세를 취하고 있다.
부처의 신체는 균형이 잡히고 꼿꼿이 선 채 허리를 앞으로 약간 내밀고 있어 당당한 느낌을 준다. 부처의 가슴에는 卍자가 있으나 손 바닥의 법륜은 없다. 부처의 육신부는 살구색, 가사는 붉은색 선을 그어 입체감을 주었다. 이마의 경계선과 귀 주변, 귓바퀴 안쪽, 눈썹, 수염 부분에는 가는 먹선으로 터럭의 올까지 세심하게 표현하였다. 눈썹은 윗부분을 청색, 아랫부분을 녹색으로 그려 이중선을 구사하였다. (출처 : 아름다운 사람)


佛像 배에 넣는 유물, 佛畵 뒤에도 붙였다
'아미타독존圖'서 발견… "예배의 대상" / '고려불화대전' 국제학술심포지엄 열려

박 은경 동아대 교수는 "일본 교토 쇼보지(正法寺) 소장 '아미타독존도'의 1999년 수리보고서에 따르면 화면 뒤쪽의 배접지를 제거하자 아미타여래상의 가슴 부근에 붙어 있는 종잇조각이 발견됐고, 거기에는 지름 10.6㎝ 크기의 원형을 중심으로 외곽에 보협인다라니경(經)이 범어(梵語·산스크리트어)로 적혀 있었다"고 발표한다. 박 교수는 "복장물은 불상에 생명을 불어넣는 오장육부(五臟六腑)와 같은 것으로 이는 고려시대 불화가 불상처럼 예배의 대상으로 모셔졌다는 것을 의미한다"고 말한다. (조선일보 아트, 2010.10.27)



아미타불도(阿彌陀佛圖)


고려 후기 견본채색, 163×87cm, 일본 교쿠린인 소장, 일본 중요문화재



보현보살도

문수보살도


▲ 이 아미타불도는 일본에서는 석가모니불을 그린 그림으로 인식되어 일본에서 새로 그려진 문수보살도, 보현보살도와 함께 석가모니삼존도로 전해지고 있다.

이 삼존도를 보시면 두 나라의 문화적 차이를 확연히 느낄 수 있을 것이다.

▲ 우측 그림이 일본에서 그려진 것으로
문수보살은 여의를 들고 사자를 타고 있으며, 붉은 치마에는 초화문이 그려져 있다. 사자의 곱슬거리는 털은 가는 먹선과 금니로 정리하였다.

보현보살은 두루마리를 들고 코끼리를 탄 모습으로, 푸른 옷을 둘러 입었으며 옷주름은 매우 굵은 먹선으로 정리되어 있다.

이처럼 도교적이며 민속적인 분위기를 띠는 문수보살과 보현보살의 도상은 중국 원대 불화 혹은 그것을 모본으로 하여 그려진 일본 불화에서도 볼 수 있는데,

교토 로쿠오인 소장의 원대 <석가삼존도>, 교토국립박물관 소장 <석가삼존,나한도>등에서도 같은 계열의 도상을 볼 수 있다.(박)



아미타불은 화려하게 장식된 높은 연화좌 위에 앉아 설법하는 자세이다. 머리에는 나발을 표현하고, 가슴에는 卍자, 양 손과 발바닥에는 법륜을 그렸다.

신체의 윤곽선은 붉은 선을 사용하고 음영을 주어 색감을 잘 살렸으며, 법의의 금니 문양도 매우 세밀하게 표현했다.





아미타불도(阿彌陀佛圖)


고려후기, 비단에 색, 우학문화재단 소장 *보물 1238호











대의자락이 바람이 부는 것처럼 화면 오른쪽으로 날리도록 하여 화면에 운동감을 주려 하였으나 자연스러운 느낌은 다소 떨어진다.

육계가 낮은 편이고, 대의 자락을 어깨로 넘기지 않고 팔에 두른 점이 특징적이다. 가슴에 卍자, 오른손 손바닥에 법륜이 표현되어 있다.


연화원문을 사용하고 끝단에는 별도의 당초문을 사용하여 장식하였다.
치마와 대의에는 운문과 봉황문을 구사하였고 치맛단은 풍성한 꽃무늬로 장식 하였다.





아미타불도(阿彌陀佛圖)


고려 후기, 비단에 색, 일본 교쿠린인 소장. 일본 중요문화재














아미타여래도(阿彌陀如來圖)


아미타여래도(阿彌陀如來圖) 고려(高麗), 비단에 채색, 프랑스 기메박물관 소장











석가모니불도


고려후기 또는 중국 원, 비단에 색 2178x1127mm, 미국 클리블랜드박물관 소장


문수보살도<고려후기 또는 중국 元>
일본 세카도문고미술관 소장

보현보살도<고려후기 또는 중국 元>
일본 세카도문고미술관 소장



높은 대좌에 결가부좌한 석가모니불의 모습을 그렸다. 문수보살도, 보현보살도와 함께 삼존을 이루었던 작품으로 추정된다.

석 사모니불의 두광은 붉은색과 금으로 칠하고, 내부에도 약간 바림을 하듯 금으로 두텁게 표현하였다.

석가모니불의 법의에는 백색 안료로 하이라이트 효과를 주었고, 대과 및 아난(그림의 왼쪽)과 가섭(그림의 오른쪽)으로 보이는 승려도 밝고 반짝이는 느낌의 다채로운 색채로 표현하였다.


석가모니불의 붉은색 가사에는 용과 구름으로 이루어진 원형문향을 그려 장식하였다.

눈에 뛸 정도로 가늘고 긴 손가락과 희고 긴 손톱, 대좌의 다양한 장식, 석가모니불의 얼굴형과 이목구비 표현 등도 특징적이다.

이는 대부분의 고려불화가 공유하는 특징과는 다소 다른점이며, 이런 이유를 들어 이 작품을 중국 원대 불화로 보는 견해도 있다.


출처 : 도록의 해설서


<석가모니불>
석가불(釋迦佛)이라고도 한다. 석가모니란, 산스크리트의 발음을 따서 중국어로 옮긴 음역인데, 그 뜻은 능인(能仁)·능적(能寂) 등으로서 불타(佛陀), 즉 석존(釋尊)을 가리킨다.

탄생불(誕生佛)·사유상(思惟像)·고행상(苦行像)·출산상(出山像)·항마상(降魔像)·설법상(說法像)·열반상(涅槃像) 등 여러 종류의 형상이 있다.
한국 불상 유물들의 대부분은 이 석가모니불로서 약왕보살(藥王菩薩)과 약상보살(藥上菩薩), 문수보살(文殊菩薩)과 보현보살(普賢菩薩), 관세음보살(觀世音菩薩)과 허공장보살(虛空藏菩薩) 등 3유형으로 나누어진다.

권속신(眷屬神)은 사천왕(四天王)이다. 유물 중에서 석굴암 본존상은 가장 널리 알려진 예이다. 한편, 석가여래를 봉안한 법당을 대웅전이라고 한다.





석가삼존, 십육나한도


고려후기, 비단에 색, 935 x 445mm. 삼성미술관 소장

연꽃 모양 향로
고려 1077년 높이 147mm, 국립중앙박물관 소장


이 연꽃 모양 향로의 손잡이는 일부만 남아 있지만, 삼성미술관 리움 소장품인 <석가삼존.십육나한도>의 나한이 든 비슷한 향로를 통해 원래 모습을 추정해 볼 수 있다. 넓은 연잎 모양의 받침 윗부분에는 '大康三年'이라는 명문이 새겨져 있어 1077년에 만들어졌음을 알 수 있다.


상단에는 천개 아래에 구름을 탄 석가삼존을 배치하고, 그 아래로 큰 S자형을 그리듯 구름과 함께 열여섯 명의 나한을 지그재그로 배치한 석가삼존, 십육나한도이다.

이 작품과 크기 및 화면구성이 거의 같은 작품으로는 일본 네즈미술관(根津) 소장 <석가삼존.십육나한도>가 있다.

상단의 삼존 중 본존은 연화좌에 앉아 오른손을 가슴 앞에 들고 왼손은 배 앞에 내려놓았으며 양 협시보살은 모두 선 채로 연꽃 줄기를 받쳐 들고 있어 수인과 持物만으로는 존명을 확실히 구별할 수 없으나, 십육나한과 함께 그려진 것으로 보아 석가모니불과 문수보살, 보현보살의 삼존으로 추측된다. 열여섯 명의 나한은 피어오르는 구름 줄기 사이에 배치하였는데, 석가삼존 앞의 세 명은 공양물을 바치며 경배하는 모습이고, 나머지 나한들도 대부분 공양물을 들고 있어 봉헌할 차례를 기다리는 것으로 보인다. 삼존 중 본존은 육신부 전체를 금으로 칠하였으며, 나머지 인물에는 윤곽선에 금니를 적극적으로 사용하였다. 특히 지물 표현을 금으로 강조하여 빛나는 듯한 인상을 준다.


(국립중앙박물관학예연구사 박혜원)



나한(羅漢)이란 석가모니의 가르침으로 진리를 깨달아 모든 번뇌를 끊고 참지혜를 얻은 성자(聖者)를 말한다. 고려시대에는 비를 기원하거나, 도적을 물리치기를 비는 등등 여러 목적을 갖고 '나한재(羅漢齋)' 를 많이 행하였다. 이런 행사 때에 나한을 그린 그림이 쓰여졌을 것으로 추측된다.


이 작품은 석가여래, 문수보살(文殊菩薩), 보현보살(普賢菩薩)의 삼존(三尊)과 16나한이 합쳐진 그림이다. 대원광을 배경으로 석가가 연화대좌에 결가부좌(結跏趺坐)하고 있고, 좌우에 문수보살, 보현보살이 시립하고 있는데, 각각 원형의 두광을 갖고 있다. 본존은 둥근 무늬가 그려져 있는 가사(袈裟)를 입었고, 왼쪽 어깨에 띠로 묶는 매듭이 있으며, 좌우의 문수와 보현은 각각 연꽃 한 송이씩을 손에 쥐고 있다. 나한들은 화반(花盤)과 지팡이 또는 연꽃을 들고 있거나, 입을 가리고 웃기도 하며, 보자기 위에 서 있기도 하는데, 이들 다양한 모습의 나한들은 개성적이고 자연스러운 자세와 표정을 짓고 있다.



<석가삼존>
석가불을 중앙에 두고 좌우에 협시(脇侍)를 배치하는 삼상(三像)형식. 불상제작의 초기(2세기)부터 있었고 협시를 범천(梵天) ∙ 제석천(帝釋天)으로 하는 경우와 2인의 불자(佛子)를 가진 시자(侍者)로 하는 경우가 있으며, 후자에서는 연화수(蓮花手, 觀音) ∙ 금강수(金剛手, 執金剛)가 짝이 되어 나타난다. 그러나 인도나 중국에서도 보통 석가는 양협시를 특정부처로 하지 않고 단순히 보살형으로 하는 경우가 많다. 부처 이름을 알 수 있는 것으로는 문수(文殊, 騎獅)와 보현(普賢, 騎象)이 있고, 그외 관음과 허공장(虛空藏) 또는 집금강, 선종의 가섭(迦葉) ∙ 아난(阿難)이 짝지워진 것 등이 있다.
 
<십육나한>
부처 열반 때 불법을 위촉하고 그 호위를 담당하라는 명을 받은 16인의 나한. 현장이 번역한 『법주기(法住記)』에 설명 되어 있다. 빈도라발라타자(賓度羅跋蘿惰闍), 가야가벌차(迦諾迦伐蹉), 가야가발라타자(迦諾迦跋曪惰闍), 소빈다(蘇頻陀), 낙구라(諾距羅), 발타라(跋陀羅), 가리가(迦理迎), 버자라불다라(伐闍羅弗多羅), 수박가(戍博迦), 반탁가(半託迦), 라고라(曪怙羅), 나가세나(那伽犀那), 인게타(因揭陀), 벌나피사(伐那婆斯), 아시다(阿氏多), 주다반탁가(注茶半託迦)에 나온다. 한조(組)로서의 16나한의 신앙과 그림은 중국 당대에서 시작되었기 때문에 당~송시대의 회화사에도 종종 보이며, 오대(五代)에는 십육나한화의 명수인 선월대사 관휴(禪月大師, 貫休)가 있고 둔황 막고굴에도 그 시기의 벽화가 있다.
 
- 미술대사전(용어편), 편집부, 2010



<연꽃 모양 향로>
인도에서는 나쁜 냄새를 없애려고 일찍부터 향을 사용하였으며, 불교에서도 승려의 몸을 깨끗이 하거나 부처를 공양하기 위해 향을 피웠다.

단 위에 올려놓고 향을 치울 수 있는 형태의 향로가 가장 많지만, 손에 들 수 있도록 긴 손잡이가 달린 향로도 있다. 이런 형태는 중국 남북조시대부터 나타나지만, 시대에 따라 다양한 형식이 유행했다.

(국립중앙박물관 학예연구사 배영일)

※  참고 - 고려의 나한도





약사삼존십이신장도(藥師三尊十二神將圖)

조선시대 1477년, 85.7×55.9, 비단에 채색. 일본 개인 소장











화면 중앙에는 높은 보단에 결가부좌한 약사여래가 있고, 그 아래 좌우에는 일광과 월광보살이 시립하였으며 다시 그 좌우측에 사천왕을 포함하여 모두 십이구의 신장이 배치된 전형적인 약사설법도 도상이다.

채색은 불은색과 녹청, 군청을 주조색으로 하면서 갈색계의 안료도 적지 않게 사용하여 변색에도 원인이 있겠지만 약간 어두운 듯 한 인상이다.


그러나 배색이 뛰어나고 금니의 사용이 효율적이며 더욱이 묘선이 유려, 섬세하여 매우 안정된 화취를 느낄 수 있다.

구도가 안정되었을 뿐만 아니라 형상에 이지러짐도 거의 없는 화질이 뛰어난 완성도가 높은 보기 드문 우수한 불화이다.

특히 본존의 중심 문양이 당초원문이고 대좌나 그 앞의 불탁의 문양과 묘법 등이 고려불화가 연상될 만큼 유사하다.


이 그림은 화기에 의하면, 1477년 成宗의 누이동생인 明淑公主와 부마인 洪常이 발원한 것으로 이 외에도 “阿彌陀如來圖”, “熾盛光如來圖”, “觀音倚岩圖” 및 “觀音圖” 등을 함께 그렸다 한다.

따라서 이 그림은 절대연대가 있는 조선시대 불화 가운데 가장 빠른 지음원의 1465년 <觀經十六觀變相圖>보다 다소 늦기는 하지만,

특정 여래의 설법도로서는 유일한 15세기 불화이며 고려불화의 전통을 가장 잘 보여주고 있다는 점에서 조선초기를 대표할 수 있는 불화라고 하여도 과언이 아니다.


어찌되었든 이 그림은 고려불화의 전통을 수용하면서도 조선적인 변모 또한 모색하고자 했던 조선시대 초기 궁중화풍의 진면목을 생생하게 전해주는 아주 귀중한 자료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