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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의 문화유산/유적

Tutankhamun


투탕카멘 마스크. 마치 살아있는 것 같은 눈에는 석영을, 눈동자에는 흑요석을 상감해 넣어 무덤에서 발견된 보물 중 최고로 꼽힌다.


투탕카멘(? ~ ?, 재위 기원전 1361년 ~ 기원전 1352년)은 이집트 제18왕조의 파라오이다. 아크나톤의 아들로, 출생 시의 이름은 투탕카텐(아텐의 살아있는 이미지)이었다. 

재위 2년에 투탕카멘(아멘의 살아 있는 이미지)으로 개칭하였다. 투탕카몬이라고도 한다. 투탕카멘의 무덤은 1922년에 처음으로 발견되었다.(왕가의 계곡 KV 62호)


고대 이집트의 수많은 왕들 중에 사실 투탕카멘은 그다지 존재감이 없었다. 10세의 어린나이에 즉위했지만 국정의 실권은 섭정과 장군이 장악했기 때문이다. 

거기다가 투탕카멘은 재위 9년만인 18세로 사망했고, 무덤이 발견되기 전까지는 투탕카멘에 대해 알려진 바도 없었다. 



Luxor 왕가의 계곡(vally of the king)은 이집트 신왕국 파라오들의 공동 묘역이다. 투탕카멘의 유적으로 유명하다. 왕가의 계곡에서 도굴당하지 않은 묘는 투탕카멘 묘밖에 없었다.

아마르나(이집트 제18왕조의 파라오였던 아크나톤 시대의 수도로, 나일 강 동안에 자리잡고 있다. 고대 이집트의 문서에서는 아케타톤(Akhetaton)으로도 불렸다. 이는 "아톤의 지평선"이라는 뜻이다. 아크나톤 시대에 새로운 문화가 싹트면서 번영하였으나, 아크나톤 사후에는 버려졌다.)에서 왕자로 살아가던 투탕카텐은 아버지 아크나톤과 삼촌인 스멘크카레가 죽은 후 멤피스에서 10세의 어린나이로 파라오의 자리에 오른다. 행정관 아이와 장군 호렘헤브가 이 나이 어린 파라오를 보좌하였다. 또한 이미 출산 경험이 있는 누나인 안케센파아텐과 결혼하게 된다.


재위 2년 째에 아크나톤의 아텐 신앙을 철폐하려는 움직임이 공식화되었다. 투탕카텐은 투탕카멘으로, 안케센파아텐은 안케센나멘으로 개명하여 아멘 신앙으로의 복귀를 상징적으로 보여준다. 이를 기념하기 위해 큰 석비가 세워졌는데, 여기에는 아멘 신앙의 부활과 신전의 재건과 개방에 대해 기록되어 있다. 또한 카르나크와 룩소르에서도 갖가지 건축사업이 진행되었다. 훗날 호렘헤브가 파라오가 되었을 때, 이것을 모두 자신의 업적으로 돌렸는데, 이는 이미 이 때부터 호렘헤브 등이 정치에 깊숙이 관여하고 있음을 보여준다.


이후의 치세에 대해서는 정확한 기록은 없지만 몇 차례의 해외원정에 관한 기록이 남아 있다. 투탕카멘의 무덤에는 왕의 사냥, 전쟁 모습이 담겨 있다. 사막에서 사자 등을 사냥하기도 하며, 누비아와 시리아의 적들을 화살로 공격하기도 한다. 훗날 호렘헤브의 무덤이나, 누비아 총독 후이의 무덤을 통해 이러한 그림들이 실제 사실이었던 것으로 밝혀졌다. 그러나 투탕카멘 본인이 직접 원정을 이끌지 않았을 것으로 보인다. 


투탕카멘은 근친상간의 혼인에 의해 태어난 자식으로, 오른쪽 다리에는 골질환과 왼쪽 다리에는 선천성 내반족이 있어서 걷기가 아주 힘들었으며, 선천성 기형인 구개열이 있었으며 이로 인한 언어 장애를 가졌을 것으로 추정된다. 투탕카멘의 미라를 분석한 연구팀은 유전자 검사로 투탕카멘이 치명적인 말라리아의 원인기생충인 열대열원충에 감염되었었던 것을 밝혀내었다. 결국 여러가지 유전적 질환으로 면역체계가 약했던 투탕카멘은 다리 골절상을 입은 상태에서 말라리아에 걸려 재위 9년째에 18세의 젊은 나이로 사망하였다.





투탄카멘 무덤의 발굴


하워드 카터와 투탄카멘


1922년 고고학자 하워드 카터에 의해 왕들의 계곡에서 투탕카멘의 무덤이 발견되었다. 투탕카멘은 황금마스크를 쓴 미라로 발견됐는데, 이 황금마스크는 현재 이집트 카이로 박물관에서 가장 인기 있는 전시품이기도 하다. 훼손된 다른 왕들의 무덤과는 달리 투탕카멘의 무덤은 미라를 비롯해 다량의 부장품이 거의 완전한 채로 남아 있었고, 당시 파라오의 매장관습을 아는데도 귀중한 자료가 되고 있다. 왕의 부활에 필요한 내장을 넣는 카노포스 용기, 왕좌와 침대, 가구, 의류, 장신구, 무기 등이 포함되어 있어 당시의 호화로운 궁전생활과 높은 공예수준을 확실하게 보여 주고 있다.


1922년 11월, ‘왕가의 계곡’이라고 불리는 이집트의 대규모 파라오 묘역지에서 엄청난 발견이 있었다. 발굴된 것은 ‘투탕카멘(Tutankhamen)’으로 알려진 파라오의 무덤이었으며 20세기에 가장 위대한 고고학적 발견이라고 일컬어진다.


20세기 초, 이 무덤의 발견은 전 세계의 뜨거운 관심을 받았다. 3,270년이나 지난 왕의 미이라가 이집트에서 발굴되었다는 소식은 많은 이들의 관심을 받을 수 있는 빅이슈였다. 그리고 고고학자들에게 투탕카멘의 무덤은 매우 희귀한 발견이었다. 전에도 다른 무덤이 발견되었지만, 이토록 화려한 파라오의 무덤은 없었기 때문이었다.

이 파라오의 무덤 속에는, 사후에도 영원히 기억되고 싶었던 어느 이집트 국왕의 꿈이 고스란히 남아있었다. 그리고 값을 따질 수 없는 각종 진귀한 보물들과 투탕카멘의 미이라가 발굴되었다. 이 발굴을 한 사람은 ‘하워드 카터’였다. 그는 왕가의 계곡을 포함한 이집트 유적을 지키는 총감독이었다. 


카터는 왕가의 계곡 전체의 지도를 그렸고 이전까지 한 번도 탐사해보지 않았던, 가운데 지역을 조사하기로 한다. 그리고 사흘도 안 되어서 무덤 입구의 계단으로 추측되는 장소를 발견했다. 그리고 이 계단의 맨 밑은 어떤 문과 이어져 있었다.


그러나 하워드 카터는 이 무덤이, 파라오의 무덤이 아니라 이집트 왕실의 동의를 얻어 매장된 귀족일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먼저, 계단 맨 밑에 석고로 봉해진 문을 제거하고 석회암 덩어리를 들어내자 밑으로 내려가는 통로가 나왔는데, 예부터 도굴꾼들의 침입을 예방하기 위해 막아놓은 돌덩이였다.



11월 26일, 통로의 물건들을 치우고 나자, 무덤 내부의 모습이 서서히 드러나기 시작했다.

이 무덤의 안에서는 이상한 모양의 짐승과 조각상들이 있었고, 온 사방이 번쩍이는 황금으로 가득 차 있었다. 

그리고 발굴이 진행될수록 더 흥미로운 일들이 일어났다.



실제로 본 투탕카멘의 무덤은, 이집트 왕의 묘실 치고는 특이한 점이 있었다. 같은 시대의 다른 무덤과는 달리 투탕카멘의 무덤은 매우 작았다. 동시대 왕들의 호화스러운 무덤과는 크게 다른 것으로 보아 투탕카멘은 미처 성년이 되지 못하고 요절했을 거라는 추측이 대두되었다. 이뿐만이 아니라, 투탕카멘은 다른 사람의 무덤으로 준비된 곳에서 급히 묻혀진 듯 보였다. 


투탕카멘의 무덤은 몇 천 년간, 흙더미 속에 완전히 파묻혀 있었기 때문에 많은 도굴꾼들의 눈을 속일 수 있었다. 그러나 투탕카멘의 무덤에서도 고대의 도굴꾼들의 흔적이 남아있었다. 투탕카멘의 무덤 속의 부장품들은 누군가가 손을 댄 것처럼 뒤죽박죽 뒤섞여 있었던 것이다. 학자들은 이러한 모습이, 투탕카멘 왕이 매장된지 얼마 지나지 않아 침입한 도굴꾼들이 무덤 경비대들에 의해 저지를 당한 흔적이라고 추측했다.


 

도굴이 있은 후, 성급하게 정리했던 흔적이 보인다.


발굴 초기, 하워드 카터는 무덤 주인이 누구인지, 또 얼마나 오래 통치했는지, 몇 살이었는지에 대해 알 수가 없었다. 그러나 예술품들을 꺼내면서 이 무덤의 주인이 매우 어린 나이에 사망했다는 것을 입증해주는 증거들이 나오기 시작했다. 투탕카멘이 소년왕이었다는 것을 알려주는 첫 번째 단서는, 무덤에서 나온 장갑 한 짝이었다. 장갑의 크기로 봐서 성년이 되기 전에 사망했을 가능성이 높았다.


투탕카멘은 기원 전, 1333년부터 9년 동안 이집트를 통치한 뒤에 18세~19세의 젊은 나이에 요절한 것으로 밝혀졌다. 투탕카멘은 소년왕이었기 때문에, 고대 이집트 파라오들에 비해 과소평가를 받아왔고 그다지 중요시 되는 파라오가 아니었다. 그러나 그는 이단적인 선왕이었던 '아케나톤'이 물러난 뒤 나라의 질서를 잡은 왕이었다.



선왕 아케나톤은 이집트의 전통 종교를 거부하고, 태양신 '아톤'을 유일신으로 추앙했던 왕이었고 모든 백성들은 그의 재임 기간동안 이 종교를 강제로 믿어야만 했다. 투탕카멘은 아케나톤 재임 기간 중 파괴된 신들의 사원을 복구하고 새로운 상을 세우는 작업을 하는 일에 재임 기간의 대부분을 보내야만 했으며 전문가들은 백성들이 그의 '과거 복원 정책'을 환영했음을 알려주는 증거가 무덤 안에 있다고 생각한다.


투탕카멘의 무덤은 다른 파라오의 무덤보다 크기는 작았으나, 매우 화려하고 풍요롭게 꾸며졌는데, 전문가들은 무덤 속에서 발견된 화려한 부장품들이, 투탕카멘이 생전에 '다신교'를 부활시켰던 것에 대한 감사의 표시일지 모른다는 추측을 하고 있다.


 


그러나 가장 귀중한 보물은 예술품들이 아니었다. 


발굴단은 파라오의 무덤으로 들어가고 나서 3개월 후인 1923년 2월 16일 투탕카멘의 시신을 발견했다고 공식 발표했다. 그러나 발굴단의 대표 '하워드 카터'는 파라오의 시신을 보기 전까지 많은 어려움에 직면하고 있었다. 3천년이 넘게 그대로 방치되었던 무덤이다보니, 무덤의 내구도는 많이 떨어져 있었으며 헤아릴 수 없을 정도로 많은 보물들은 4개의 방을 가득 채워져 있었지만, 카터는 무덤이 통째로 무너져 내릴까봐 이들을 쉽게 꺼낼 수 없었다. 결국, 온 방에 받침대와 지지대를 설치하고 나서야 유물들을 꺼낼 수 있었다.


그리고 무덤을 발굴하기 시작한지 1년이 되었을 때, 투탕카멘의 미이라가 안치되어있는 마지막 방문을 열 수 있었다.

마지막 방의 문을 열었을 때, 그 안에는 방을 가득 채우는 커다란 규암석의 관이 놓여져 있었다. 

관의 뚜껑은 사제가 3,300년 전에 마지막으로 닫아두었던 상태 그대로 관을 덮고 있었다.



외관(shrines)을 벗겨내고 드러난 석관(sarcophagus)

석관 모서리에는 날개달린 이시스여신으로 보이는 조각상이 있다.


전실에서 유물을 수습한 후, 하워드 카터 와 카나번卿은 1923년 2월 17일 현실을 열었다. 이 방은 하나의 거대한 금박 사당이 방의 대부분을 차지하고 있었다. 사당의 덮개를 열자 내부에는 사당이 3개 더 들어있었다. 4번째인 가장 안쪽의 사당안에서 발굴자들은 무거운 석관을 발견하였는데, 그 안에 3개의 관이 있었다. 석관(sarcophagus)과 관을 열기 위해 사당을 먼저 해체하고 치우는데만 몇 달이 걸렸으며, 비좁은 공간에서의 작업은 상상할 수 없을 정도로 어려웠다. (여기서는 외관을 사당(Shrine)으로 번역하고 있으나 외관(外棺)이 타당할 것 같다.)


외관(사당, shrines) - 석관(sarcophagus) - 관(nesting coffins)의 구조로서 모두 9개로 되어있다. 

(9는 이집트에서 무한대(영원)을 뜻한다고 한다.)


Howard Carter, Arthur Callender and an Egyptian worker open the doors of the innermost shrine 

and get their first look at Tutankhamun’s sarcophagus.



현실, 부활의 장소

투탕카멘의 미라가 있는 무덤의 현실은 목곽 형태의 커다란 사당으로 거의 꽉 차 있었다. 그 안에 세 개의 사당이 더 들어있었고, 하나가 다른 하나를 품은 모양으로 숨겨져 있었다. 그 한가운데 투탕카멘의 석관이 놓여 있었다. 사당들과 석관은 고대의 예배당처럼 생겼는데 이것은 영원의 집을 의도한 것으로, 그 안에서 파라오는 왕벽한 보호 아래 쉴 수 있었다. 사당을 이룬 면은 현실 바닥 위에 수직으로 세워져 있었다. 사당의 각 부분은 분리된 채 현실 안으로 들여 와 하나씩 차례대로 조립돼 제일 바깥쪽 사당으로 마감됐다. 사당의 각 부분은 정확히 조립될 수 있도록 사전에 표시를 해 두었다. 파피루스에 그려진 그림들을 보면 후대 왕들의 장례에도 겹쳐진 사당들이 사용되었음을 알 수 있다. 즉, 투탕카멘 무덤에서 발견된 것과 같은 거대한 사당들은 이집트 신왕국시대 파라오들에게 표준이었다고 할 수 있다. <출처: 신비의 파라오 투탕카멘 특별전> [나의 문화유산 답사기]



러시아 인형같이 4중으로 겹쳐진 상자 형태의 외관(外棺)- 제일 멀리있는 관이 석관이다.


사당은 이집트의 예배당과 같은 모습을 뛰고 있으며, 내부에 3개의 사당과 석관이 겹겹히 놓여 있다. 

사당 앞에는 설화석고 항아리, 장식지팡이, 활과 화살통 등이 놓여 있다.

제일 안쪽에 석관의 모습이 보인다.



카터가 만든 현실의 도면에는 사당과 석관, 바깥관 등을 포함하여 발견된 모든 유물들이 표시되었다.



사당과 석관, 영원을 위한 집

가장 바깥쪽의 첫번째 사당은 이집트 왕이 기념일을 축하하는 장소인 이중 구조의 예배당 모습을 띠고 있다. 사당의 겉면은 푸른색 파이앙스를 상감해 넣은 무늬로 장식됐다. 여기에는 두 개의 도금된 제드 기둥 모양의 부적과 두 개의 이중 매듭 부적이 반복되어 나타나는데 각각 '안정'과 '보호'를 뜻하는 상형문자다. 장인들이 일하는 모습을 그린 벽화를 보면 알 수 있듯, 다른 왕이나 개인들도 또한 이런 식으로 사당을 장식했다. 첫번째 사당의 문을 열면 그 뒤에 설화석고 항아리와 장식 지팡이, 활과 화살통이 놓여 있다. 첫번째와 두번째 사당 사이에는 텐트형 구조물이 있었다. 구조물의 기둥 네 개가 금박의 청동 장미로 장식된 아마포 천을 들어 올려 지탱하고 있었따. 이 천은 장미장식의 무게를 간신히 버티고 있었지만, 카터가 오랜 동안 발굴 작업을 진행하지 못하고 있는 동안 외부에 그대로 노출돼 심각하게 훼손된 상태였다. 세번째와 네 번재 사당 사이의 비좁은 공간에는 활 몇개와 아름답게 장식된 부채가 간신히 놓여 있었다. <출처:신비의 파라오 투탕카멘 특별전> [나의 문화유산 답사기]



  

사당 입구에는 사후세계로 부활을 돕는 의례용 모형들이 놓여 있다.



의례용 모형들, 부활을 돕는 도구



투탕카멘의 묘지는 1922년 '하워드 카터'에 의해 발견되었고, 발굴 1년이 넘어서야 투탕카멘의 관을 열 수 있었다.

그러나 투탕카멘의 관에 대해 재미있는 사실은, 정교하게 새겨진 조각 위에 커다란 금이 가있었는데 이것은 도굴꾼들의 짓일까?



관 뚜껑에 남아있는 균열은, 도굴꾼들의 짓이 아니라 투탕카멘의 장례를 치르는 동안 사고가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좁은 공간에서 석관을 다루다보니 뚜껑을 떨어뜨린 흔적이었다. 이런 점으로 미루어 보아, 투탕카멘의 장례가 매우 급하게 진행되었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발굴단은 무덤을 개봉한 후, 거의 1년이 지나서야 이 석관의 뚜껑을 들어올렸다.

투탕카멘의 미이라는 총 4개의 관 속에 덮여져 있었다.


첫 번째 관 뚜껑을 들어 올리자, 긴 어둠이 보였습니다. 어둠 속에서 곧 서서히 황금색 관이 드러났죠. 

겹겹이 쌓인 3개의 관 뚜껑 중에 첫 번째 관이었습니다.


황금색 관의 뚜껑을 또 들어올리자, 두 번째 관이 나왔고, 

세 번째 뚜껑까지 들어올리고 나서야 마지막 관이 보였습니다.


이제 한 개의 관만 들어올리면, 투탕카멘의 미이라를 볼 수 있었습니다. 

발굴단들은 그의 실제 모습을 최초로 볼 수 있다는 마음에 매우 흥분했죠.


마지막 관 뚜껑을 들어 올리자, 황금관의 내부를 차지하고 있던 것은, 눈에 확 뛸 만큼 말쑥하게 공들여 만든 투탕카멘의 '미이라'가 보였습니다.


발굴을 했던 사람들은, 투탕카멘의 모습에 놀라움을 감출 수 없었습니다. 투탕카멘의 머리 부분에 이제까지 어디에서도 볼 수 없었던 황금마스크가 씌어져 있었던 것이죠.


무려 3천 년 동안 한번도 열리지 않았던 관 뚜껑을 열어서 실제 투탕카멘의 얼굴을 본 것입니다. 이 미이라는 3천 년 전, 인류의 조상들이 만들어 놓은 모습 그대로였습니다.


고대 이집트인들은 고인의 장례를 잘 치르면, 죽은 이가 신의 나라에서 잘 살수 있다고 생각했죠. 황금마스크 뒷면에는 '사자의 서'에 나오는 글귀를 새겨, 고인의 신성을 나타냈습니다.


이 황금마스크의 목적은, 죽은 사람을 천상의 세계로 데려가서 부활을 주재하는 다른 여러 신들의 신체 각 부위와 접촉을 하게 만드는 역할이었습니다.



< 황금마스크 뒷면에 새겨져 있는 글귀 전문 > 


그대 눈썹은 아홉 신의 계보인 에냐드 

그대 정수리는 아누비스 신 

그대 뒤통수는 호르스 신 

그대 손가락은 토트 신 

그대 외침은 태양신인 내가 들었노라. 

그대는 부활의 인증을 받았노라. 

번식의 신 하토르의 아들이여, 그대의 목은 결코 달아나지 않으리. 

평안 속에서 일어나라 그대여.




고대 이집트인들은 파라오의 마지막 변신을 위하여 최선을 다했지만, 투탕카멘의 무덤에서 문제가 발견되었습니다.


그 문제는, 바로 '미이라'였습니다. 당시 미이라를 감싸고 있던 '천'을 풀어야지만, 파라오에 대한 정보를 얻을 수 있었죠.


전 세계의 언론도 투탕카멘의 '얼굴' 모습을 보길 원했습니다. 그래서 하워드 카터는 투탕카멘의 미이라에 붙어있는 천과 마스크를 풀어야 했습니다.


그러나 관 안에 부은 향유 때문에 관에서 시신을 떼어낼 수가 없었죠. 마지못해 카터는 시신을 몇 조각으로 나누어서 꺼낸 뒤에 천을 푸는 작업을 했습니다


미이라를 떼어 내고, 검시를 해보자 미이라의 상태가 매우 좋지 않았습니다. 향유로 인해서 마스크가 투탕카멘의 얼굴에 달라붙어 버린 것이었죠.


결국, 불에 달군 칼을 사용해서 마스크를 떼어내야만 했습니다. 그리고 마스크를 떼어내자 투탕카멘의 진짜 모습이 서서히 나타나기 시작했습니다.



< 투탕카멘의 실제 얼굴 > 

18세의 젊은 나이로 사망했던 파라오 '투탕카멘'. 

머리에 장식이 된 띠를 두르고 있었던 것으로 추정됩니다.


또한, 미이라를 덮고 있던 천 속에는 시신과 함께 100개 이상의 보석이 담겨 있었습니다.












왕가의 계곡


고대 이집트는 약 6천 년의 역사를 가지고 있으며 고대 이집트 왕국은 기원전 4,000년경에 세워졌다. 이 시기는 아직 지구에 ‘매머드’라는 선사시대 코끼리가 존재하던 시기였고, 우리나라 최초의 국가로 일컬어지는 ‘고조선’이 등장하기 약 2천 년 전이었다.

이 B.C 4천 년 경 이집트에서는 ‘파라오’가 등장하며, 파라오는, 고대 이집트의 실질적인 통치자(왕)를 의미한다.

고대 이집트인들은 파라오가 죽으면 ‘미이라’를 통해 영생을 한다고 믿었다. 즉, 지금처럼 ‘사후 세계’라는 개념은 애초부터 없었고 그들이 생각하는 죽음은 ‘영생’ or ‘소멸’ 둘 중에 하나였다.

따라서 죽은 사람을 잘 보존하지 못하면 그 영혼은 곧, ‘소멸’해서 없어진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피라미드는 죽은 파라오들의 ‘영생을 돕는 공간’이라는 인식을 가지고 있었다. 









3000년간 봉인된 입구





이 그림은 프랑스, 미국 및 이집트 연구원으로 구성된 연구팀이 컴퓨터 단층촬영법으로 재구성한 투탕카멘의 얼굴이다. 검사결과 18세의 나이로 사망한 투탕카멘은 말라리아에 감염된것으로 밝혀졌으나 심각한 무릎부상이 사인인것으로 추정된다.




<투탄카멘의 외관(外棺) 내관(內棺)의 구조와 모습>

외관(外棺) 및 내관(內棺)의 구조에 대한 이해





왕의 석관을 감싸고 있는 4중의 사당(Shrine, 외관) 모습


사당 위에는 이집트의 신전 대부분에서 볼 수 있는 태양신을 상징하는 날개달린 태양이 사당입구를 비춰주는 형태를 하고 있으며, 그 아래에 상형문자로 쓰여진 글씨들이 남아 있다.


Cross-section diagram of shrines, sarcophagus, and nesting coffins 

for King Tutankhamun's mummy.



Outermost Golden Shrine (위 구조도의 1번)

내부에 구조도의 2번에 해당되는 기둥들을 볼 수 있다.

가장 바깥쪽의 관으로 카이로 박물관에 전시되어 있다.

5.08m(D) X 3.28m(W) X 2.75m(H)


1번의 외관 문양

이 문양은 오시리스의 등뼈와 이시스의 이중 매듭으로 되어있다.

'안정'과 '보호'를 뜻한다고..



The Pall Frame (위 구조도의 2번)

이 구조물은 9조각의 박공구조로 되어있으며 나무와 금으로 이뤄져 있다.

상부에는 금으로 도금된 꽃문양이 있는 아마포로 덮여있었으나 발굴당시 관리 소홀로 심하게 훼손되었다고 한다.


지붕의 모습에서 발굴당시의 직물과 장미문양을 볼 수 있다.




The Second Shrine (위 구조도의 3번)

이 관은 안과 밖이 모두 금으로 도금되어 있으며 '사자의 서'에 나오는 장례문구로 장식되어 있다. 지붕은 경사져 있으며 16조각의 두꺼운 나무로 이뤄져 있다. 일상생활용품과 주술적인 용품들 그리고 화려한 물건들이 2.3.4번관 사이에 놓여져 있었다. 3.75m(D) X 2.35m(W) X 2.25m(H)


funerary texts from the Book of the Dead



 

The Third Shrine (위 구조도의 4번)


크기만 조금 작을 뿐 Second Shrine과 매우 흡사하다. 지붕은 경사지고 역시 금도금으로 되어 있으며 '사자의 서' 글귀로 장식되어 있다. 

3.4m(L) X 1.92m(W) X 2.15m(H)


The Fourth(Innermost) Shrine (사진은 복제품이다)


위 사진의 5번에 해당되며 이는 선사시대의 북쪽궁전이었던 'Per-nu' 궁전을 본따만든 것으로 추측되며 Isis, Nephthys, Selkis and Neith, Anubis dogs 등이 조각 되어 있다.  2.9m(D) X 1.48m(W) X 1.9m(H)


위 사진의 a에 해당하는 석관(Sarcophagus)


몸체는 규암으로, 뚜껑은 붉은 화강암으로 이뤄져 있다. 이 뚜껑은 아주 딱 맞지않고 더군다나 금이 가 있다. 아마 매장 당시에 실수로 깨진 듯 하다고.. 무게가 1톤에 달한다. 석관 모서리에는 날개달린 이시스여신으로 보이는 조각상이 있다.






출처 : King Tut's Golden Shrines

        King Tut: Nesting Shrines, a Sarcophagus, and Coffins

































투탄카멘 묘 발굴당시 사진들


전실에는 600개가 넘는 유물들이 산처럼 쌓여있었는데 이 방은 3300년 동안 아무도 들어간 적이 없는 곳이었다. 

또 비밀의 방에서는 화려한 설화석 그릇, 동물들이 그려진 소파, 음식을 저장하는 그릇 등이 발견 되었다.



▼ 1922년 최초 발견 되기전까지 3245년간 무덤 달려있던 인장 (봉인)

3000년넘게 저 밧줄 봉인이 유지될수있었던 이유는 무덤의 완벽에 가까운 밀봉에의한 산소 결핍과 건조한 사막기후때문이라고 합니다



▼ 손대기전 그대로의 무덤내 모습. 이곳은 유물만 모여있는 대기실











▼ 매장실로 들어가기위해 벽을 제거하는 모습









▼ 1865년 이집트 길거리에서 미라를 팔던 잡상인



실제로 작업진행하다가 사람들이 많이 죽었는데 입구에 쓰여있던 "내 잠을 방해하는자 죽음을 면치못하라리"이런 문구 비슷한게 쓰여있었다죠. 대체로 누룩곰팡이균인가 그거때문에 죽었다고는 하는데 뭔가 저주비슷한게 있었을거라는 여러 이야기들이 많았다.

클레오파트라 때 일화가 이집트의 위엄을 알려주죠. 씨저가 이집트 원정 왔다가 피라미드를 보고 감탄해서 저건 도대체 어떻게 만든거냐고 하니까 "저거 너무 오래된거라서 우리도 모른다." 라고... 이집트 첫 왕조 건국 당시에 매머드가 멸종 전이었으니 

미라로 만든 약이 있었는데 효과가 너무 좋아서 가정상비약이 되었으니 미라의 수효부족에 그냥 시체를 미라로 만들어서 파는 사건까지 빈번하게 생겼다고 하더군요.

미라가 너무 많아서 상태안좋은건 증기 기관차 땔감으로 쓸 정도였다고....


[출처 : 이토렌트]




'투탕카멘'의 무덤에 얽힌 3가지 비밀에 관한 이야기
허프북스 / 고평석

이집트 역사 속에서 가장 이단적인 시도를 한 군주는 아멘호텝 4세다. BC(기원전) 1353년부터 1335년까지 18년 간 나라를 다스리면서 개혁을 실시했다. 제사장의 권위에 도전을 한 것이다. 다신교 국가였던 이집트를 태양신 아톤만 섬기는 유일신을 섬기는 국가로 바꾸는 시도를 하였다. 


그렇지만 결국 이런 개혁 조치들은 실패에 그친다. 역사 속 이야기들이 그렇듯이, 이런 난리를 치르고 난 뒤에는 유약하고 어린 왕이 등장한다. 제사장의 힘은 더욱 세지고 왕의 처지는 형편없게 된 것이다.

바로 이 왕이 살아서는 불우했고, 죽은 뒤는 가장 유명해진 투탕카멘이다. 그를 제일 유명한 파라오로 만든 그의 무덤과 유물 이야기가 여기 있다.


1. 투탕카멘 황금 마스크는 재료 값만 해도 상상을 초월한다?



무덤에서 발견된 유물 중 하나인 황금 마스크는 보는 사람들의 입을 벌어지게 만든다. 화려하고 정교한 작품이기 때문이다. 11킬로그램의 금이 사용되었고 화려한 보석으로 장식되어 있는데, 지금부터 3300년 전, 즉 우리의 청동기 시대쯤인 기원전 1330년경 제작되었다.


“이 작품은 투탕카멘의 황금 마스크로, 투탕카멘의 미라의 얼굴 위에 얹어 놓을 목적으로 만든 겁니다. 그의 무덤에는 방이 여러 개 있는데 그중 5번 방에서 출토됐고요. 5번 방은 파라오가 누워 있는 방으로 무덤에서 가장 중요한 공간이었죠. 그곳에 5중으로 된 관이 있었는데 그 관을 다 열었더니 황금 마스크를 쓴 투탕카멘의 미라가 누워 있었던 겁니다. …. 마스크를 장식하고 있는 푸른색 돌은 앞서 언급했던 라피스 라줄리입니다. 아프가니스칸에서만 생산되는 귀한 보석이었으니 왕을 위해 먼 속에서부터 이 귀한 재료를 공부해 왔다는 걸 알 수 있습니다.” (책 ‘난생 처음 한번 공부하는 미술 이야기’, 양정무 저)


2. 파라오의 마스크라는 것은 어떻게 알 수 있나?


왕의 무덤은 차별점이 있다. 이집트 파라오의 무덤도 마찬가지다. 특히 중요한 유물에 그 힌트들이 남아있다. 투탕카멘 마스크는 확실히 파라오의 것임이 드러나 있다. 이집트 왕의 마스크였음을 알 수 있는 증거는 무엇이 있을까?


“디테일을 살펴보면 머리에 쓴 관에 코브라와 대머리독수리가 장식되어 있습니다. 코브라는 하 이집트를 지키는 상징이고 대머리독수리는 상 이집트의 상징이라 이 둘을 투탕카멘 파라오의 마스크에 새겨 놓았던 겁니다. 하 이집트와 상 이집트의 상징이 함께 파라오를 보호하는 셈이죠. 이 밖에도 마스크의 주인이 파라오라는 점을 확인해주는 표현은 또 있습니다. 턱수염 주머니인데요. 이집트에서는 왕족만이 수염이 기를 수 있었다고 해요. 투탕카멘도 파라오의 위엄을 뽐내기 위해 턱수염을 길러 수염 주머니에 넣어 정리했습니다.” (책 ‘난생 처음 한번 공부하는 미술 이야기’, 양정무 저)


3. 대단한 유물들이 묻혀있던 투탕카멘 묘는 어떻게 보존이 잘 되었나?


우리나라도 왕릉의 상태가 좋지 않은 경우가 많다. 외적이 침입했을 때 제일 먼저 털어가는 것이 왕릉이다. 또한 자국민 중에도 도굴꾼들은 호시탐탐 노리기 마련이다. 현세에서의 영광과 호사를 내세에도 이어가려는 왕들의 욕심 덕에 값진 보물이 들어있는 경우가 많아서다. 11킬로그램의 금으로 만든 마스크 등 어마어마한 유물들은 어떻게 도굴을 당하지 않았을까?


“…. 투탕카멘 무덤을 빼고는 전부 도굴당했어요. 역설적이게도 투탕카멘은 살아생전 비운에 시달렸기에 죽은 뒤 무덤을 보존할 수 있었습니다. 쿠데타로 정국이 불안하던 시기에 죽은 소년 파라오인 투탕카멘의 무덤은 별로 좋지 않은 곳에 조성되었거든요. 입구 쪽, 눈에 잘 띄지 않는 가려진 곳에 있었던 데다가 크기도 작았습니다. 그래서 모두 ‘여기는 고대 이집트의 인부들이 쓰던 간이 숙소인가 보다.’하고 그냥 지나쳤죠. 심지어 고고학자들도 마찬가지였어요. 위대한 파라오들의 유물도 발굴되지 않는 마당에, 격변기에 2~3년 정도 재위했던 소년 왕의 무덤을 찾을 수 있을 거라고는 생각하지 못했던 겁니다.” (책 ‘난생 처음 한번 공부하는 미술 이야기’, 양정무 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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