클림트는 에곤 쉴레와는 달리 자화상을 그리지 않았으며, 글을 남기는 것에도 인색했다. 그런 그가 남긴 짧은 글이 하나 있다.
"나는 말을 잘하지 못하고, 글을 쓰는 것에도 재주가 별로 없다. 특히 나 자신에 대한 이야기나 내 작품에 관한 내용이라면 더 잘 할 수 없다. 아주 짧은 글을 써야 할 때조차 마치 배를 타기도 전에 배멀리를 걱정하는 사람과 같이 두려움에 사로잡히곤 한다.
그러므로 나에게 예술적이고 문학적인 측면을 절대 기대하지 말기를 진심으로 바란다. 나를 알고자 하는 사람은, 나의 작품을 보면 알게 될 것이다. 내가 어떤 종류의 사람이고 내가 무엇을 원하는 사람인지를 말이다."
- 구스타프 클림트
클림트 - 세기말의 황금빛 관능
대담한 주제와 현란한 색채, 그리고 혁신적인 화면 구성으로 세계의 이목을 끈 오스트리아 화가. 신예술파(Art Nouveau) 혹은 분리파(Secessionist) 화가로 불리우는 구스타프 클림트. 여인의 누드를 가장 완벽하게 표현해 낸 거장 시대를 초월한 에로티시즘의 전위화가
여성을 통해서 시대정신을 표출하고자 했던 클림트
세기말과 세기초, 낡은 전통과 새로운 도전이 혼재된 이 시기에 클림트는 벌거벗은 여성들을 구속과 억압으로부터 해방시킨 화가였고 전해집니다.
일상의 단조로움을 파괴하고자 비엔나 분리파의 선구자를 자처하며 시대정신을 대변했던 클림트. 후기 상징주의 회화의 대표 화가가 뭉크라면 구스타프 클림트는 전혀 다른 양상을 대표하는 화가입니다. 상징주의는 모더니즘의 선구이자 제1차 세계대전으로 파괴된 유럽 문명의 마지막 꽃이었습니다. 그리고 클림트의 상징주의적인 요소는 이 같은 시대적인 흐름과 밀접하게 결부되어 있습니다.
클림트의 작품에는 유난히 많은 여성이 등장합니다. 그리고 클림트에 의해 표현된 여성상은 ‘요부'인 동시에 ‘어머니'라는 대조적인 상징성을 동시에 부여합니다. 이는 클림트가 개인적으로 갖고 있었던 어머니에 대한 고착 현상과 여성을 통한 시대정신의 표출이라는 점에서 기인합니다. 당시 프랑스에선 최초의 여자중등학교가 등장했고, 독일에서도 여성 교육기관이 생기는 등 여성의 지위가 향상되어 가는 분위기였습니다. 여성들은 가부장적인 서양 문명의 오랜 관습을 서서히 벗어 던지기 시작했습니다. ----- (생략) ----
19세기 말과 20세기 초를 황금빛 섬광으로 물들인 구스타프 클림트는 그 황홀경의 그림으로 교접을 꿈꾼 화가다. 그가 새삼 주목받는 까닭은 시대를 뛰어넘는 영원한 에로티시즘의 화신이기 때문일 것이다.
젊은 시절의 클림트는 보수적인 이들에게 환영받는 화가로, 고대 고전기 미술을 모방하던 19세기 후반의 전형적인 아카데미 화풍으로 각광받던 청년이었다.
그러나 프로이트의 이론 그리고 작가 무질, 슈니츨러, 호프만스탈의 작품과 함께 상징의 몽환적 세계를 향한 문을 열던 세기말 빈의 분위기 속에서 그의 그림은 아르누보 양식의 우아함과 추상과 구상의 통합, 평면적이고 장식적인 색채와 시공을 초월한 듯한 구성으로 바뀌게 된다.
비엔나 분리파를 창시하여 종래의 미술 개념의 지평을 넓히는 진보적인 미술 운동을 지배했으며, 에곤 쉴레, 오스카 코코슈카의 선배이자 스승으로 그들과 더불어 오스트리아 현대 화단을 대표하는 가장 탁월하고 혁신적인 화가로 평가된다.
빈 외곽의 바움가르텐에서 금속 세공사인 아버지와 오페라 가수인 어머니 사이에서 1862년 태어났다. 금속 세공사인 아버지의 영향으로 〈아델레 블로흐 바우어의 초상 I〉을 비롯해 많은 작품에 금이나 은을 사용했다.
1876년 빈의 응용 미술 학교에 입학하여 다양한 소재와 기법에 대해 연구했다.
1883년 동생 에른스트 클림트와 함께 벽화를 주로 그리는 스튜디오를 개업해 왕궁이나 저택, 극장 등에 장식화를 그렸다.
1888년 아카데미 화풍으로 그린 빈 시립 극장 벽화는 세밀하고 섬세한 그림이라는 호평을 받았으며 덕분에 황제에게 훈장을 받았다. 이 작품을 계기로 그는 일약 스타 작가로 발돋움한다.
1892년 아버지와 동생이 죽은 후 그 충격으로 1895년까지 약 4년간 작품 활동을 중단했다.
그 이후에는 예전과는 다른 상징주의 스타일로 그림을 그렸다.
1894년 빈 대학교로부터 새로 짓는 대강당에 철학, 의학, 법학을 주제로 한 세 점의 천장 장식화를 의뢰받고 5년여의 구상 끝에 시안을 제출했다. 학교 측은 학문과 진리를 찬양하는 고전주의 스타일의 그림을 기대했으나 클림트는 벌거벗은 인간들이 불안과 고통 속에서 떠도는 파격적인 시안을 제출했다. 이 시안은 의학계, 법조계 등 모든 분야의 사람들에게 외설적이라는 지탄을 받았다.
자국에서 큰 논란을 일으켰던 〈철학〉은 1900년 파리 만국 박람회에 출품하여 금상을 받았다.
클림트는 이 사건 이후 공공 기관의 의뢰를 받지 않았고, 기성세대들의 사고방식과 당국의 검열에 반감을 갖게 되었다. 그래서 빈 미술 아카데미로부터 교수직을 세 번이나 제안 받았지만 프란츠 요제프 황제까지 나서서 중재했음에도 끝내 수락하지 않았다.
1902년 제14회 분리주의 전시회는 요제프 호프만, 구스타프 말러 등이 참여하여 분리파의 정점을 보여 준 전시였다. 이때 클림트는 베토벤의 교향곡 〈합창〉을 모티브로 한 〈베토벤 프리즈〉라는 벽화를 발표했다. 이 작품은 클림트 특유의 군더더기 없는 선, 대담하고 자유로운 면, 화려한 색 패턴, 금박 등 새로운 소재 등을 모두 보여 주는 상징주의적 장식 미술의 백미로 평가받는다.
그 이후 분리파가 순수 예술을 옹호하는 파와 응용 예술을 옹호하는 파로 분열되면서 자신의 의도와는 다르게 흘러가자 1905년에 탈퇴했다. 이후 공식적인 활동을 중단하고 주로 자신의 후원자들에게 의뢰받은 초상화를 그리면서 지극히 개인적인 작품 활동을 이어갔다.
평생 독신으로 지냈지만 《세상에서 가장 비싼 그림 100》에 실린 작품의 모델인 아델레 블로흐 바우어 부인을 비롯해 사교계의 여인들, 작품의 모델 등 여러 여인과 깊은 관계를 맺었다. 그가 사망했을 당시 14명의 여인이 친자 확인 소송을 냈을 정도였다. 그는 생전에 연인 중 한 사람이었던 마리아 짐머만이 낳은 두 아들만을 자신의 자식으로 인정했다.
클림트는 평생 동안 대중들과 주류 미술계의 입에 오르내렸다.
그의 작품에는 주로 부스스한 머리카락, 유혹적인 눈빛을 한 인물들이 등장하는데 이런 그림이 젊은이들에게 안 좋은 영향을 미친다는 이유로 전시 중인 작품에 장막을 덮는 일도 자주 있었고, 지나친 성도착을 이유로 외설 시비에도 자주 휘말렸다.
성욕을 중시하는 그의 주장을 당시 사람들은 충격적으로 받아들였지만, 이는 당시 전 세계를 뒤흔들던 프로이트의 정신 분석학과 맞닿아 있었다. 그의 예술은 에곤 실레를 비롯한 여러 화가에게 강렬한 인상을 주었으며 표현주의와 초현실주의 작품에 등장하는 에로티시즘에 영향을 주었다.
1897년 보수적이고 폐쇄적인 기존 미술계에 반기를 들고 진보적인 미술가들과 함께 ‘빈 분리파’를 창설하고 의장으로 활동했다. 빈 분리파는 해외 미술계와의 교류를 통해 새로운 양식의 미술을 시도하고, 전시 공간을 확보하여 진보적인 작가들에게도 전시 기회를 제공하겠다는 취지의 예술 운동이었다.
1898년경 빈 분리파의 창시자들과 함께 찍은 사진
1918년 1월 뇌졸중으로 쓰러진 뒤 다음 달 폐렴으로 인한 합병증으로 숨을 거두었다.
그가 죽은 이후 한동안 주목받지 못하다가 1980년대 이후 〈키스〉, 〈아델레 블로흐-바우어의 초상〉 등의 대표작들이 세기말적인 분위기 속에서 새롭게 부각되면서 세계적인 인기 작가로 떠올랐다.
미완성 유작으로 <유람>,<신부>,<아담과 이브>를 남겼다.
Belvedere Museum (오스트리아 벨베데레 박물관)
‘벨베데레’는 ‘아름다운 전망(Beautiful View)’이란 뜻의 이탈리아 말. 바로크 건축의 대표작으로 꼽히는 이 미술관은 정원을 사이에 놓고 상궁과 하궁으로 나눠져 있으며 1923년부터 국립미술관으로 사용되고 있다. 세계 최대의 클림트 컬렉션으로 이름 높은 이곳은 클림트를 사랑하는 젊은이들의 순례코스로 떠올랐다.
클림트 가족은 빈곤한 생활을 했으며, 1873년의 경제 공황은 그들을 경제적으로 힘든 상태로 몰아넣었다.
1874년 8월 30일 에밀리 플뢰게 출생.
1876년 빈곤에 허덕이며 어린 시절을 보냈지만 그의 데생 솜씨를 눈여겨 본 친척의 도움으로 미술의 길에 들어선다.
우수한 성적을 보이던 클림트는 오스트리아 미술산업 박물관 (현재의 오스트리아 응용미술 박물관)에서 새로 설립한
비엔나 미술공예학교(쿤스트게베르베슐레, Kunstgewerbeschule)에 입학하였다. 여기서 1883년까지 수업한다.
동급생 프란츠 마치(1861-1942)와 일년 뒤 입학한 동생 에른스트(1864-1892)와 함께 2년간의 준비반을 거친 후
미술 학교로 옮겨가 페르디난트 라우프베르거(1829-1881)와 빅토르 율리우스 베르거(1850-1902)의 지도를 받았다.
그는 교회 창문 디자인, 천장화 제작 같은 일들을 주문받아 학비를 조달하기도 했다.
그가 비엔나 미술 공예학교를 졸업할 무렵에는 이미 화가로서 나름의 명성을 얻고 있었다.
1879년 페르디난트 라우프베르거는 클림트 형제와 프란츠 마치에게 자신이 맡은 일을 나누어주었다.
그들은 예술사 박물관 장식을 도왔고, 한스 마카르트 (Hans Makart 1840 - 1884)의 지휘아래
황제와 황후의 은혼식 축하연 준비작업에도 참가하였다.
클림트의 초기 작품들
Portait of a Girl, Head Slightly Left
1879. Charcoal on Paper. Private Collection
Girl's Head Turned Left
1880. Gustav Klimt, w16.8 x h24cm
클림트가 18 살 때의 작품.
그린 계열의 차분한 색조로 정리 된 화면에서 한층 눈을 끄는 소녀의 파란색 눈동자와 빨강 입술, 그리고 가슴을 장식하고 있는 빛나는 흰색 목걸이가 인상적이다.
젊은 날의 소품이지만 이후 클림트의 그림을 특색 짓는 장식성을 느낄 수있는 귀중한 작품이다.
Study of a Girl’s Head
1880. 캔버스에 유채, 43x30cm, 개인소장
클림트와 마츠는 같은 학교에서 미술을 공부 하였기에 같은 모델을 앞에 두고 서로 다른 시각에서 이 소녀를 그린 것으로 보인다.
두 사람 모두 시선을 아래로 둔 소녀를 그렸지만 마츠는 소녀가 입고 있는 옷과 소녀가 앉아있는 의자의 디테일에 심혈을 기울인 반면, 클림트는 1896/97년 그가 자주 보여준 보다 여유롭고 흘러가는 듯한 화법을 보여주고 있다.
Portrait of Klara Klimt
1880. 캔버스에 유채, 29x20.5cm, 개인소장
클라라 클림트는 구스타프 클림트의 누이로 1862년 생인 클림트보다 2년 빠른 1860년에 태어나 1937년에 사망 (클림트는 1918년에 사망).
그녀는 사망할 때까지 미혼으로 지냈으며 클림트의 또 다른 자매 헤르민과 평생 같이 살았다. 클림트는 본 작품 외에도 그녀의 초상화를 여러 점 그렸다고 한다.
Female Nude Study
1883, 86.5x42.5cm, 개인소장
클림트가 유화로 그린 유일한 여성 누드 작품. 본 작품은 클림트가 응용 미술 학교를 다닐 시기에 작업된 것이고 다른 사진이나 작품을 보고 그린 것이 아니라 눈 앞의 실제 모델을 두고 그린 것으로 보인다.
작품에 등장하는 젊은 여성은 하단 코너에 보이는 의자에 올라 서 있다. 좌측으로는 천으로 덮인 대좌 위에 놓여진 조각상이 보인다. 당시 응용 미술 학교에서 누드 스터디를 위해 제공한 환경이 얼마나 열악했는지 우리에게 알려준다.
Male Nude Study Facing Right
1883. 75x48.5cm, 쎄인 에띠엔느 갤러리, 뉴욕
1883년에 완성한 이 작품은 클림트가 세 번째로 그린 남성 누드이다. 이 작품은 팔을 들어 올리는 모습과 회전을 포함한 모델의 전체적인 움직임을 표현한다. 걸상에 앉아있는 모델은 뒤 편으로 왼손을 뻗고 오른손으로는 가슴근육 운동을 하는 듯 매우 움직임이 강한 포즈를 취하고 있다.
이 작품에서 클림트가 가장 집중적으로 작업한 부분은 모델의 근육으로서 해부학에 근거한 근육의 변화를 연구한 작품이라 할 수 있다. 클림트는 이 남성 모델의 복근과 어깨 근육을 특별히 세심하게 연구했음을 알 수 있다.
사보이 소년 Savoyard Boy
1882, 84x40cm, 개인소장
유럽에서는 20세기 초 만해도 출생률이 비정상적으로 높았다. 19세기 말에서 20세기 초에 이르는 시기에는 거리의 여인들과 신사들의 부정한 관계에 의해서 태어난 아이들이 많았는데, 이렇게 태어난 아이들은 대부분 길거리로 내몰렸었다.
이런 아이들을 사보이라고 불렀으며 이들은 적은 돈이라도 벌기 위해 종종 마멋이라는 동물을 데리고 큰 도시의 장터를 떠돌곤 했다. 당시 비엔나의 응용미술학교 학생들은 이런 사보이라고 불리던 아이들을 모델로 하여 자주 그렸었다.
1880년 극장 건축가 펠너와 헬머로부터 최초의 주문을 받아 카를스바드의 온천장에 천장화를 그렸다.
당시 빈 미술계는 한스 마카르트(1840~1884)가 절대적인 영향력을 가진 화가였다
아르누보 화가인 알폰스 무하가 처음 빈에 왔을때도 한스 마카르트 작품을 보았을 것이다
거장 한스 마카르트는 19세기 인기화가로 그의 화려한 역사화는 젊은 클림트에게 하나의 모범이 되었다.
국가의 주문을 받아서 활동했던 마카르트는 여인의 누드를 검열관을 자극하지 않고 관람자도 만족하는 그림을 그렸다.
노골적인 성적 표현을 지극히 자제했지만 클림트는 이런 규범에 전혀 구속되고 싶지 않았다.
클림트 형제와 프란츠 마치는 학생 때부터 함께 작업실을 사용하였다.
그들의 "미술가 조합"은 최초의 주문으로 마르틴 게를라흐가 1882-84년과 1895-1900년에 편집한
작품선집 <알레고리와 상징(Allegorien und Embleme)>을 위한 디자인 준비작업을 했다.
그들은 다음해까지 계속해서 그 작품선집을 위한 작업을 했다.
또한 펠너와 헬머로부터도 극장 장식(천장화, 커튼, 등)을 위한 주문을 수차례 받았다.
그들은 세명 중 누구도 개인적으로 구별되는 특징적인 양식을 개발하지 않는다고 공언했다.
이 말은 서명이 되어있지 않은 작품이 그들 중 누구의 것인지 확실히 밝히는 일이 불가능함을 뜻한다.
1883년 '비엔나 장식 미술학교' 졸업. 에른스트, 마츠와 <쿤스틀러 콤파니> 설립.
개인의 양식적 차이가 허용되지 않는 역사적 양식으로 작업하며 한쪽이 완성할 수 없는 일을
다른 쪽이 맡아서 해줄 수 있다는 그들의 특징은 더 중요한 주문을 얻는데 도움을 주었다.
이무렵부터 오랫동안 클림트 형제가 가족을 경제적으로 부양하게 되었다.
1885년 빈 예술가들의 왕자 한스 마카르트의 죽음 이후, 미술가 조합은
Lainz 교외에 있는 헤름스빌라에 천장화를 그리기 위해 그가 준비해둔 스케치들을 기반으로 그림을 완성하였다.
Fable 우화
1883. Oil on Canvas, 84.5 x 117 cm,
Historical Museum of the City of Vienna
클림트가 운영하는 예술가 컴퍼니가 성공하자 출판사에서 도판물을 의뢰한다. 당시 유행하던 출판 프로젝트다.
실질적으로는 클림트 최초의 본격적인 작품이라고 할수 있는 이 <우화>는 클림트가 21세때에 당시 빈에서 간행된 도판집 [우의와 상징]을 위해 제작되었다. 클림트는 <우의와 상징>에서 11개의 주제를 의뢰 받았다.
어두컴컴한 숲그늘에는 한가로이 자는 사자, 그위에 흰쥐, 개구리를 입에 물고 있는 황새, 이것을 분해하는 여우 등 <이솝우화집>에 등장하는 동물들이 묘사되었다.
클림트 초기의 작품으로 기술적으로는 능숙하지만 아카데믹한 자연주의에는 아직까지 물들지 않은 작품이다.
Idylle (Idylls) 목가
1884. 49.5 x 73.5 cm.
Historical Museum of the City of Vienna
<우의와 상징>도판집에 나오는 그림이다. 중앙에서 무릎을 꿇고 두명의 아이들에게 둥지 속의 새 얼굴을 보여주고 있는 <목가>는 <우화>의 의인상의 연장으로 그려진 작품이다.
중앙의 화면과 그 주변을 장식하는 장식적인 꽃과 나뭇잎은 바로크적 장식이 강하다. 자연을 모티프로 한 배경의 장식적인 패턴은 클림트가 존경하던 당대의 유명한 장식화가 한스 마카르트의 바로크 취미를 반영했다.
중앙 화면 양쪽에 앉아 있는 나체의 청년은 좌우대칭에 있으면서도 각각의 포즈는 대조적인 변화를 보여주고 있는데 미켈란젤로의 시스티나성당 천장화에 묘사된 청년상을 많이 닮아 있다. 이 작품의 전체적인 구도는 로마의 파르네제 궁에 있는 안니발레 카라치의 천장화 영향을 받았다.
신화의 한 장면 Mythological Scene 1885. 35.5x49.8cm,
루마니아 국립미술관
1884년 클림트가 속해 있던 ‘예술가 회사’는 리예카의 시립 극장 장식을 맡게 되었다. 클림트와 프란즈 마츠는 각각 세 개의 천장 벽화를 담당하였고 에른스트는 무대 앞 부분의 벽화를 맡았다.
본 작업에서 클림트는 처음으로 고전 문학을 주제로 작업하였고 그는 고전적인 건물 안에 있는 한 젊은 가족을 그렸다.
누워있는 사람의 머리 1886∼88년. 검정 색연필, 28 x 43cm
1886년 클림트 형제와 프란츠 마치는 빈에 새로 건설된 부르크 극장의 층계에 천장화를 그리는 최초의 중요한 주문을 받았다.
1888년 이 부르크 극장 천장화들이 완성되었고 미술가 조합은 오스트리아 제국 왕실로부터 금메달을 받았다.
In 1886 the members of the “Künstlercompagnie” (Artists’ Company), Gustav and Ernst Klimt as well as Franz Matsch, were commissioned to adorn the ceilings of the two grand staircases of the Vienna Burgtheater, newly built by Karl von Hasenauer (1833–1894), with depictions of the theater’s history. This first public commission represented a major step forward in the artist’s career and was crowned by the Golden Cross of Honor awarded by Emperor Franz Joseph I in 1888.
The cycle, which consists of ten paintings, comprises four works by Gustav Klimt: The Cart of Thespis, Shakespeare’s Globe Theatre, The Altar of Dionysus and Theatre in Taormina. The renderingShakespeare’s Globe Theatrefeatures the artist’s only known self-portrait. In 1990 the design drawings for the paintings were discovered in the attic of the Burgtheater. Following intensive restoration, they are now exhibited as part of a permanent presentation at the Burgtheater’s “Angelika Prokopp Foyer-Klimtraum”.
The State Staircase Volksgartenseite
Altogether there are ten autonomous paintings, one in each of the tympana that adorn the state staircases and five in each of the two wings. While the cycle of paintings in the right staircase represents the evolution of the theatre and three classical playwrights, the left-hand side focuses on the themes of music, dance, medieval mystery plays and the ex-tempore stage.
All the scenes depict actors together with their audiences. In keeping with the spirit of the times the artists strove for historical accuracy, which manifests itself in such details as clothing, etc. In the staircase on the right, starting from the entrance and with the painting in the tympanum, there is the "Altar of Dionysos", "Thespis' Cart" (both by Gustav Klimt), "Ancient Theatre Scene" (Franz Matsch), "Shakespeare's Globe Theatre" (Gustav Klimt), and "Scene from Molière" (Ernst Klimt).
The State Staircase Landtmannseite
The cycle in the left-hand staircase consists of the "Altar of Apollo", "Ancient Ex-Tempore Actor" (Franz Matsch), "The Theatre at Taormina" (Gustav Klimt), “Medieval Mystery Play” (Franz Matsch) and "Clown on a Fairground Stage" (Ernst Klimt).
BrugTheather (부르크극장)
1741년 마리아 테레지아가 창설한 궁정무대로, 고트프리트 젬퍼와 카를 폰 하제나우어가 설계하였고, 요제프 2세가 1776년 '궁정국민극장'이란 명칭을 내리고 스스로 총감독을 겸했다. 국립 오페라단, 필하모닉 관현악단과 함께 빈 3대 문화기구로 꼽히며, 왕궁 부르크(Burg) 근처 미하엘광장에 있었기 때문에 부르크극장으로 통칭하게 되었다.
빈 회의(1811)에서 프로이센 ·오스트리아 전쟁(1866)에 이르기까지 J.슈라이포겔과 H.라우베 같은 명감독의 지도를 받으면서 유럽 일류극장으로 이름을 떨쳤다. 표준 독일어 발음 공연으로 유명하며, 각국의 유명극단이 공연을 하기도 하는 독일어권 내에서 가장 권위 있는 극장으로서, 현재까지 그 명성을 유지하고 있다.
2차세계대전 당시인 1944년 공습당한 건물을 1955년 국가 보조를 받아 수리·복구하였는데, 내부는 필요에 따라 오케스트라 박스를 떼어내고 무대를 만들 수 있도록 하였고, 크림트가 제작한 '디오니소스의 제단' 등 천장화로도 이름이 높다.
디오니소스(Dionysus) (Διόνυσος)는 고대 그리스 신화의 술과 풍요, 포도나무, 광기, 다산의 신이다.
제우스와 세멜레의 아들이고 아리아드네의 남편이다. 로마 신화의 바쿠스(Bacchus)에 해당한다.
그가 지닌 티르 소스라는 지팡이 내지는 이 지팡이 이상으로 그의 상징인 술잔을 든 모습으로 표현되는 일이 많고,
술이 포도주다 보니 포도 자체나 포도덩굴과 어울어진 모습 또한 많이 표현된다.
The Theatre at Taormina (Gustav Klimt)
Oil on Marble, 750 x 400 cm. Northern staircase Landtmannseite, Burgtheater, Vienna, 1886-1888.
클림트는 초기에 Hans Makart(1840~1884)의 영향을 많이 받았다.
Hans Makart가 작업을 하던 것을 클림트가 완성한 '타오르미나극장'은 안정된 구조와 색감, 풍만한 분위기 등이 조화롭게 이루어져 있다.
타오르미나 극장 (Ancient theatre of Taormina)
기원전 3세기에 그리스인에 의해 지어졌으며 로마인이 도시를 점령한 후에 검투사의 결투를 주최하기에 적합하도록 개조된 타오르미나 그리스 극장은 이탈리아 남부에 있는 시칠리아 최대의 휴양지이다.
이 그리스 극장은 타우로 산의 전망 좋은 곳에 서 있어서, 남서쪽으로는 에트나 산의 웅장한 모습이 한눈에 바라다보이고 북쪽 바다 건너편에는 칼라브리아 산맥이 보인다.
The Cart of Thespis (시지푸스의 마차)
고대 그리스연극의 초창기 시절을 그리고 있다.
시지푸스가 아티카지역을 돌아다니며 그의 마차에서 비극 배우로 분장을 하고 연극을 하는 장면이다.
아티카에서는 매년 <디오니소스>를 위한 네 번의 정기적인 축제가 있었다. 도시 디오니시아 축제, 시골 디오니시아 축제, 레나이아 축제, 안테스테리아 축제가 그것이다.
처음에는 도시 디오니시아 축제에서만 연극이 공연되었으나 5세기 후반에 이르면 다른 축제들에서도 연극이 중요한 행사로 되었다.
그리스 연극에서는 플룻 연주자를 제외한 모든 출연자들이 가면을 썼다. [류성의 삶과 예술]
The painting’s subject draws on the legendary beginnings of Greek theatre, when, as Horace would have us believe,
Thespis journeyed round Attica with a cart doubling as a stage on which to perform his plays.
Ancient Theatre Scene (Franz Matsch)
이 작품은 프란츠 마치의 작품이며 그리스 아테네에 있는 고대 <디오니소스 극장>에서 연극 'Sophocles’ Antigone'의 한 장면을 그리고 있다.
The central panel is a scene from Sophocles’ Antigone performed in Athens’ Theatre of Dionysos.
무대 위에 가면을 쓴 3명의 배우와 플룻 연주자 등이 보인다.
부루크극장의 간판 여배우 Charlotte Wolter (1834-1897)의 초상이라고..
무대 앞 오르케스트라의 자리에 있는 디오니소스의 제단 위에 화병과 월계관이 놓여있다.
소포클레스 동상
디오니소스 극장(Theatre of Dionysus)
디오니소스 극장은 아크로폴리스 기슭에 세워져 있던 대형 야외 극장으로, 디오니소스제의 개최지였다. 현재는 초라하고 황량하기까지 한 모습의 이 디오니소스 극장은 사실 서양 문학사에서 대단히 의미 깊은 장소이다. 그리스 문화가 한창 꽃피던 시절 이 극장에서는 매년 유명한 비극 경연대회가 열렸다. 기원전 5세기에는 우리에게도 널리 알려진 아이스킬로스(Aeschylos), 소포클레스(Sophocles), 에우리피데스(Euripides)와 같은 3대 비극 시인들이 정성들여 지은 걸출한 비극작품들이 바로 이곳 디오니소스 극장에서 경쟁적으로 공연되며 문학적 자웅을 겨루었다.
당시의 디오니소스 극장에는 약 1만 4000명에서 1만 7000명 정도의 관객이 들어갈 수 있었다고 한다. 아테네의 황금 시대라 불리는 기원전 5세기 아테네의 전체 시민의 수가 약 3만 5000명 정도였다고 하니, 사실상 아테네 시민들 대다수가 이 디오니소스 극장에 모여 비극을 관람했던 것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또한 극장의 구조 자체가 거대한 확성장치의 역할을 했던 것으로도 유명하다.
From antiquity we now move to the golden age of the theatre in Elizabethan England.
As spectators in Shakespeare’s Globe Theatre we witness the scene in the Capulets’ tomb in which a suicidal Romeo has collapsed beside Juliet, whom he believes to be dead.
영국 런던에 있는 Globe 극장에서 공연중인 '로미오와 줄리엣' 비극의 장면을 묘사하고 있다.
목털 카라를 한 멋진 신사는 클림트 자신이고 그 뒤의 젊은남자가 동생인 에른스트 그리고 테없는 모자를 쓴 우아한 남자가 바로 Franz Matsch 라고 한다. 클림트 자신의 초상화가 들어간 이 부분 때문에 유명한 그림이라고...
“Romeo and Juliet”
Sketch of Romeo and Juliet
▲ Burgtheater: Klimt at Angelika Prokopp Foyer
1990년 부르크극장의 다락방에서 이 세익스피어의 작품을 그리기 위해 사전작업을 한 풀스케일의 스케치가 발견되었다.
이 값을 메길 수 없는 보물은 현재 잘 복원되어 부르크극장내 Angelika Prokopp Foyer(휴게실)에 방문객을 위해 공개되고 있다.
▼ The Shakespeare Globe Theatre in London
글로브 극장(Globe theatre)은 1598년 버비지 형제(Cuthberg, Richard Burbage)가 런던의 탬스강 남쪽 사우스 워크(Southwark)에 지은 극장이다.
윌리엄 셰익스피어의 작품이 다수 초연된 극장으로 알려져 있다. 1613년 6월 29일 헨리 8세 공연 도중 발생한 화재로 소실되나 이듬해 6월에 재건되었다.
1642년에 청교도 혁명의 영향으로 폐쇄되고 1644년에 철거되었다. 현존하는 건물은 1997년에 17세기 원형대로 복원된 것이다. 857석의 객석이 있다.
The Old Burgtheater (구 부르크 극장 관람석)
1888-89. Gouache on paper. 82 x 92 cm. Historical Museum of the City of Vienna, Vienna, Austria.
클림트는 1888년 구 부르크극장이 철거되기 전 이를 기록으로 남기는 작업을 빈 시위원회로부터 의뢰 받았다.
궁정극장의 위용을 잘 묘사한 이 작품은 클림트 초기의 사진적 리얼리즘의 전형적인 예라 할수 있다.
무대가 중심이 아니라 관람석을 그린 이 작품은 150여 명의 작은 초상화로 이루어져 있는데 초상화에 등장하는 인물들은 당시 사교계의 유명 인사들이었다.
황제의 애인이자 배우인 카테리나 슈라트, 작곡가 브람스와 골드마르크 등을 볼수 있는데 이는 부르크극장이 사회에서 차지하고 있는 중요성을 의미하기도 한다.
또한 이 초상화에 나오는 사교계의 인사들이 클림트에게 초상화를 의뢰함으로써 재정적으로 안정될수 있게 만들어 준 작품이기도 하며 클림트의 출세작이다.
사진처럼 정밀하게 묘사된 이 그림은 완성되자마자 역사적 의미를 가지게 되었다.
프란츠 마치와 구스타프 클림트는 서로 다른 관점에서 옛날의 부르크 극장 실내 전경을 그렸는데, 클림트는 무대에서 바라본 관람석의 모습을 그렸다.
1890년 이 그림으로 400길더의 상금이 수여되는 상을 받아 그 돈으로 뮌헨과 베니스로 첫 여행을 떠났다.
Allegory of Sculpture (조각의 유화)
Gustav Klimt’s contribution to the masterpiece of the festschrift on the occasion of the 25th anniversary of the Imperial Royal Austrian Museum of Art and Industry (today MAK) is Allegory of Sculpture. This watercolor painting represents the symbolism of his early work: In the center, the naked personification of the sculpture, adorned with hair ornaments that appear Hellenistic, a snake bracelet, earrings, and a golden, delicate necklace.
In her left hand she holds a Victoria with a laurel wreath who is balancing on the globe. The background of the picture features common sculptural motives from antiquity such as the Boy with Thorn, Athena Parthenos, as well as Juno Ludovisi—enthroned above all. In 1897, Martin Gerlach’s Allegorien. Neue Folge [Allegories. New series] was published in which Klimt again refers to the theme of allegorical depiction of sculpture but strongly breaks up the antique-like depiction.
by Gustav Klimt. 1889. Pencil and watercolor heightened with gold on cardboard. 43.5 x 30 cm. Austrian Museum of Applied Arts, Vienna,
빈 미술사 박물관의 계단실 천장화
Paintings in the Kunsthistorisches Museum, Vienna 1890~1891
학생 때부터 함께 작업실을 사용하던 클림트 형제와 프란츠 마치는 빈 예술가들의 왕자 한스 마카르트의 도움으로 "미술가 조합"을 결성하였다.
그리고 그들은 '빈 미술사 박물관' 층계의 기둥 사이나 세모꼴 공간에 40점의 그림을 그렸는데
그 중 고대에 대해 묘사하고 있는 그림 <타나그라의 소녀>는 그의 양식적 변모를 드러내는 최초의 징후를 보여준다.
그림 중앙에서 멀리 떨어져 왼쪽에 위치한 이 인물은 고대사 속의 인물이라기 보다는 현대적인 인물의 느낌을 더 많이 가지고 있다
클림트는 평생 에밀리 플뢰게의 모습을 네 번 화폭에 담았다. 그녀를 처음 만난 1891년에 그녀를 처음 화폭에 담았다. 클림트가 직접 짰다는 그녀를 담은 첫 작품의 액자를 보면 클림트가 그녀를 바라보는 시선이 확실하게 보인다. 꽃이 피어져 있는 버찌 나뭇가지와 풀들은 일본풍을 빌리는 교묘함으로 가렸을 뿐, 그녀를 꽃과 같이 찬양하는 클림트의 속내를 느낄 수 있다.
작품 속의 그녀는 정말 꽃과 같다. 꽃다운 나이인 17살의 그녀지만 기품마저 갖춘 모습이다. 그녀의 눈망울은 꿋꿋함과 단호함을 담은 듯하다. 그녀의 머리와 얼굴은 뚜렷하게 채색해서 분명하고 강렬하다. 그리고 그녀의 의상과 배경을 단조로운 톤으로 만들어 인물을 더욱 부각시키고 있다.
Portrait of Emilie Flöge. 1893. 24 x 41 cm
Oil on cardboard. 24 x 41 cm.
Galerie bei der Albertina, Vienna, Austria.
1893년 클림트는 그녀를 역사화의 한 장면으로 옮겨와 놓았다. 이 초상화와 1894년에 완성한 〈로텐부르크 야외무대의 광대〉에서 광대를 구경하던 그녀의 모습과 비교하면, 이 작품이 원형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서양협죽도(Oleander)와 우물이 있는 정원에 서 있는 그녀의 모습을 보면 이제 숙녀가 되었음을 알 수 있다.
로텐부르크 야외무대의 광대, 1894
Klimt completes his brother's Ernst's easel painting, "The Clown on the Improvised Stage at Rothenburg." He gives one of the central figures in the painting Emilie's face.
그의 동생 에른스트 클림트는 부르크 극장의 천장화를 담당하고 있던 중 천정화를 이젤에 담은 이젤화를 만들어 달라는 주문을 받았다. 그러나 에른스트는 이젤화를 구상하던 중 심낭염으로 사망하였다.
클림트는 이 미완성의 이젤화에 변화를 주었다. 전체적인 틀 속에 담겨져 있는 군중들 속에서 에밀리 플뢰게와 그녀의 어머니를 담은 작품이〈로텐부르크 야외무대의 광대〉이다.
Portrait of Emilie Flöge 1902, 178 x 80 cm
Historical Museum of the City of Vienna,
에밀리 플로게의 마지막 초상화
왼손을 허리춤에 받치고 어깨를 당당하게 쫙 편 자세로 우리를 내려보고 있는 에밀리. 그녀는 상류층의 오만함을 결코 숨기지 않습니다. 약간 도톰한 볼에 얇은 입술, 눈빛에는 총기가 가득하죠. 가늘고 섬세하지만 많은 것을 보여주는 그녀의 손가락, 그녀는 감각적이면서 지적이었습니다.
클림트는 에밀리에게 온통 푸른빛을 입혀놓았습니다. 화려하고 괴기스럽기까지 한 장식들로 과장하는 관능도 이 그림에서만은 예외였습니다. 아주 차분하고 감정을 절제하는 갈색 배경은 그녀의 기품있고 도도한 푸른빛에 묻혀있습니다.
핑크빛으로 물든 통통한 볼과 얇지만 매력적인 입술, 크고 아름다운 두 눈의 우아한 에밀리가 무척 자신감 넘치는 포즈로 우리를 내려다 보고 있습니다. 기하학적인 무늬로 장식된 화려한 푸른빛의 드레스는 그녀를 더욱 신비롭고 환상적으로 보이게 만듭니다. [불여우아빠]
클림트는 작품 속 에밀리를 위해서 2차원으로 표현된 그녀와 그녀의 의상 속에 다양한 상징기호를 넣고 많은 공을 들였다.
푸른색의 긴 원피스는 에밀리가 만든 개량 의상이다. 의상을 입은 에밀리의 모습은 일본 목판화에서 보이는 아름다운 기모노를 입은 여인처럼 보인다. 그리고〈키스〉에서 도입한 클림트만의 상징체계를 적용하였다.
배경으로는 비잔틴 미술의 신비로운 화환(花環)을 넣어서 성숙한 여인이 된 에밀리 플뢰게의 여성성을 찬미했다.
에밀리 플로게..
평생 클림트와 플라토닉 사랑만을 나누었던 그의 애인이다.
여느 에로틱한 작품과는 다르게 작품 속 에밀리 플로게는 고고하고 정숙해 보인다.
여성편력과 성욕이 강했던 클림트에게.. 그녀는 여성 그 자체를 뛰어넘은 사랑의 대상이었다.
평생을 동반자로 함께 했던 에밀리 플로게는 클림트가 죽는 순간까지 찾았던 사람이다.
또한 클림트의 많은 작품에 주인공이 되었고, 클림트는 그녀의 사진을 찍는 것도 즐겨했다고 한다.
그들은 서로 사랑했으며 상호간의 정신적 지주로서 항상 곁에 머물렀고 관계의 선을 절대로 넘지 않았다고 전해진다.
달콤한 사랑의 말도 오가지 않았으며 때론 사업의 동반자로서 때론 여행의 동지로서 만족했다는 것이다.
글쓰는 것을 극도로 싫어했던 클림트가 400회가 넘는 서신을 보냈다고 하니 얼마나 그녀를 사랑했는지 알만하다.
클림트가 사랑한 여인들
Gustav, Helene and Emilie, 1914
구스타프 클림트를 떠올리면 관능적이고 화려한 황금빛 회화를 제일 먼저 떠올리게 됩니다.
하지만 사실 그는 의외로 과묵하고 내성적인 성격의 소유자로, ‘예술가’라는 단어에서 느껴지는 카리스마나 괴팍함과는 거리가 멀었습니다. 그가 내면의 정열과 격정을 풀어놓을 수 있었던 곳은 오직 캔버스뿐이었습니다.
어린 시절, 그는 지독한 가난과 정신병으로 형제들을 잇따라 잃었고, 장학금으로 미술학교를 다니면서 돈을 벌며 살아남은 가족들의 생계를 떠맡았습니다. 특히 어머니와 누이들을 끔찍하게 위했으며, 수많은 애인을 만들었으면서도 끝내 결혼은 하지 않았다고 합니다.
황금빛 에로스가 가득한 화려하고 관능적인 아르누보 스타일의 클림트는 전 세계인들의 사랑을 가장 많이 받고 있는 화가 중 한 사람입니다. 섬세한 기교와 화려한 장식, 아찔한 관능과 상징이 가득한 작품을 통해 클림트는 에로스와 타나토스를 그 어떤 화가보다 매혹적으로 표현했습니다.
이러한 클림트의 작품은 600년 넘게 전 유럽을 지배했던 합스부르크 제국의 몰락과 산업화에 따른 갈등, 그리고 세기말의 공포와 새로운 세기에 대한 흥분과 긴장감 속에서 쾌락적 탐미주의에 빠진 오스트리아 빈의 중상류층 사회의 종말론적 분위기와 완벽하게 어울렸습니다. 눈부시게 화려한 관능이 가득찬 찬란한 황금빛의 작품 그리고 그 속에 담겨 있는 광기에 사람들은 열광했고 클림트는 화가로써 최고의 명성을 누릴 수 있었지요.
클림트는 파괴적인 열정에 사로 잡혀있던 시대에 자신만의 에로티시즘을 창조했습니다. 그리고 그 바탕에는 그의 뮤즈였고, 사랑이었으며, 전부였던 여인들이 있었습니다.
클림트의 작품에는 참으로 많은 여인들이 등장합니다. 그 중에는 신화 속 여인을 그린 그림도, 상류층 귀부인을 그린 그림도, 클림트의 상상에서 창조된(혹은 우리가 모르는 누군가가 모델이 되어) 관능을 상징하는 여인을 그린 그림도 있습니다. 그의 작품에 등장하는 여인들은 클림트의 손에서 재창조되어 때론 아름답게, 때론 화려하게, 때론 아찔하게 다가옵니다. 하지만 뭐니뭐니해도 저의 호기심을 자극하는 것은 클림트와 그 여인들간의 사랑이야기입니다.
Portrait of Emilie Floge, 1893
에밀리 플뢰게(Emilie Floge 1874~1952)
살바도르 달리에게 갈라 달리, 존 레논에게 오노 요코가 있었다면 클림트에게는 에밀레 플뢰게가 있었습니다. 에밀리 플뢰게, 그녀는 클림트의 정신적 사랑의 주인공이었습니다.
에밀레 플뢰게와 클림트의 관계는 사돈 관계로 출발했습니다. 클림트의 동생 에른스트와 에밀레의 언니 헬레네가 결혼하면서 클림트와 에밀레는 자연스럽게 친분을 쌓았죠. 클림트보다 17살이 어렸던 에멜리는 1891년 그의 첫 모델이 됩니다. 클림트는 17살 꽃다운 나이의 에밀리의 화사하면서도 기품 있는 외모에 반해 그를 모델로 한 작품을 4점이나 남겼습니다.
둘의 관계가 급속도로 가까워진 계기는 결혼한 지 1년도 안 돼 클림트의 동생 에른스트가 뇌일혈로 사망한 후부터입니다. 동생의 이른 죽음 후 클림트가 조카딸인 헬레네의 후견인이 되었지요. 둘은 서로 깊이 사랑했지만 정신적인 관계 이상의 선을 결코 넘지 않았던 기묘한 동반 관계였습니다.
그가 에밀리에게 보낸 편지와 엽서는 발견된 것만 399통에 이릅니다. 하루에 8통을 보낸 날도 있었죠. 1918년 치명적인 심장 발작으로 죽음을 눈앞에 둔 클림트가 마지막으로 애타게 외친 여인의 이름은 바로 에밀리 플뢰게였습니다. 그녀 역시 클림트 생전은 물론 사후에도 다른 남자와는 사랑을 나누지 않고 영원한 클림트의 여인이 됩니다. 또한 그의 사후 14명의 사생아에게 재산을 분배한 이 역시 그녀입니다.
클림트와 에밀리는 사돈 지간입니다. 1891년 클림트의 동생 에른스트와 에밀리의 언니 헬레네가 결혼을 하면서 둘은 자연스럽게 만났죠. 이제 막 빈에서 화가로 이름을 날리기 시작했던 29살의 클림트는 17살의 꽃다운 에밀리에게 첫 눈에 빠져 들었습니다. 클림트는 에밀리를 처음 만난 그 해 그녀의 초상화를 그렸고, 평생 4번에 걸쳐 화폭에 담았습니다.
하지만 둘의 사이는 우리가 생각하는 일반적인 연인의 사이와는 조금 달랐습니다. 둘은 서로를 깊이 사랑했지만 정신적인 관계 이상의 선은 결코 넘지 않았던 기묘하고도 특별한 관계였습니다. 클림트와 에밀리는 가장 가까운 곳에서 서로가 원할 때는 언제나 곁을 지켰고, 여름이면 함께 빈 근교의 호숫가에서 함께 휴가를 보냈고, 서로 수백통의 편지와 엽서를 주고 받았습니다.
이렇게 서로를 아끼며 함께 보낸 세월이 무려 27년, 하지만 이 둘 사이에 육체적인 관계를 없었습니다. 그저 연인도 아니고 친구도 아닌 그런 애매모호한 사이였습니다. 사실 둘의 관계에 대해 규정짓기는 매우 어렵습니다. 다만 확실한 것은 둘 사이가 매우 특별하고 친밀했다는 것입니다.
클림트는 평생 결혼을 하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클림트의 모델이 되려면 그와 섹스를 해야 한다는 소문까지 돌았을 만큼 그는 빈의 카사노바였습니다. 실제로 클림트가 죽은 뒤 14명이나 되는 사생아가 클림트의 친자임을 주장하는 소송을 내기도 했습니다. 하지만 1918년 죽음을 눈 앞에 둔 클림트가 마지막으로 애타게 찾은 여인은 바로 에밀리 플뢰게(Emilie Floge)였습니다.
클림트는 에밀리에 플뢰게의 초상화를 4점 그렸는데, 1902년에 그린 이작품이 가장 유명합니다. 1903년 빈 분리파전에 전시되었던 작품입니다. 에밀리에 플뢰게의 초상화는 의뢰받지 않은 작품이었기에 초상화로서 지켜야 할 의뢰인의 의도를 따르지 않아도 되었으므로 클림트는 구성의 장식적인 요소를 극대화 시킬수 있었습니다.
왼손을 허리춤에 받치고 어깨를 당당하게 쫙 편 자세로 우리를 내려보고 있는 에밀리. 그녀는 상류층의 오만함을 결코 숨기지 않습니다. 약간 도톰한 볼에 얇은 입술, 눈빛에는 총기가 가득하죠. 가늘고 섬세하지만 많은 것을 보여주는 그녀의 손가락, 그녀는 감각적이면서 지적이었습니다. 클림트는 에밀리에게 온통 푸른빛을 입혀놓았습니다.
화려하고 괴기스럽기까지 한 장식들로 과장하는 관능도 이 그림에서만은 예외였습니다. 아주 차분하고 감정을 절제하는 갈색 배경은 그녀의 기품있고 도도한 푸른빛에 묻혀있습니다. 핑크빛으로 물든 통통한 볼과 얇지만 매력적인 입술, 크고 아름다운 두 눈의 우아한 에밀리가 무척 자신감 넘치는 포즈로 우리를 내려다 보고 있습니다.
기하학적인 무늬로 장식된 화려한 푸른빛의 드레스는 그녀를 더욱 신비롭고 환상적으로 보이게 만듭니다. 허리 춤에 살짝 걸치고 있는 가늘고 긴 손가락은 섬세하고 지적인 그녀의 또 다른 모습처럼 느껴집니다.
추상적이고 장식적으로 그려진 의상이 당시 유행하던 스타일과는 너무나 동 떨어져 있어 빈에서 유명한 의상실을 운영하고 있던 에밀리에의 마음에 들지 않아 클림트에게 다시 그려 달라고 요청을하지만, 결국 클림트는 이 작품을 다른 사람에게 팔았고 이 작품을 끝으로 에밀리에 플뢰게의 초상화는 더이상 그리지 않았습니다.
Emilie Floge,Aged 17, 1891
Portrait of Emilie Floge, 1902
Nuda Veritas, 1899
마리아, 미치 짐머만(Maria, Mizzi Zimmermann,1885~?)
정신적 사랑이 에밀리 플뢰게였다면, 어두운 밤의 육체적 사랑은 마리아 짐머만의 것이었습니다. 노동자 출신으로 자신의 아이를 둘이나 낳았지만 결코 결혼할 수 없었던 육체적인 사랑...
'미치'라는 애칭으로도 더 잘 알려진 그녀는 16살 때 모델과 작가로서 클림트와의 운명적 첫 만남을 가졌습니다. 둘은 곧 연인관계로 발전해 구스타프와 오트 두 아들까지 두게 되었죠.
클림트가 자신의 자식으로 유일하게 인정한 아이가 바로 미치 짐머만이 낳은 이 두 아들이었습니다. 비록 둘째 아들 오트의 죽음으로 둘은 결별하지만, 짐머만에 대한 클림트의 애정은 평생 지속되었습니다. 그녀는 한 여인에게 정착하지 못했던 클림트의 기질을 눈감아 준 여인이죠.
클림트는 자신의 모델이 되어 준 여성들에게 이분법적인 태도를 취한 것으로 유명합니다. 먼저 클림트에게 초상화를 주문했던 상류층 여인들은 클림트에게 이성적인 아름다움을 느끼게 해주고 정신적 교감을 함께 나누는 여인들이었습니다.
반면에 클림트의 요구에 따라 관능적으로 때로는 외설적이기까지 한 포즈를 취해주는 직업 모델의 여인들은 클림트에게 단순히 성적 욕망의 대상이 되는 여인들이었지요. 때문에 클림트는 많은 모델들에게서 육체적 욕망을 채웠습니다. 그는 결코 그 이상을 원하지도, 허락하지도 않았습니다. 이러한 클림트에게 정신적인 사랑이 에밀리 플뢰게였다면 육체적인 사랑은 미치 짐머만이었습니다
노동자 출신으로 16살의 나이에 클림트의 모델이 되어 클림트가 생전에 자신의 자식으로 인정한 아들을 둘이나 낳은 여인 미치, 그녀는 도도했던 에밀리와는 반대로 클림트에게 헌신적인 여인이었습니다. 그녀는 한 여인에게 정착하지 못했던 클림트의 바람기를 눈감아 주었고, 클림트는 1주일에 한 번씩 미치의 집에 찾아와 욕망을 풀고, 미치와 아이들에 대한 경제적인 지원을 해주었습니다.
<희망 1>은 미술사에서는 찾아보기 힘든 임산부를 모델로 한 누드 그림으로 미치는 둘째 아들을 임신했을 때 이 작품의 모델이 되었습니다.
만삭의 그녀가 고개를 돌려 우리를 바라보고 있습니다. 그녀는 해골과 검은 괴물, 그로테스크한 존재들에게 둘러 쌓여 있습니다. 여기에서 임신한 여인은 희망을 그녀 주위의 존재들은 죽음을 상징한다고 합니다. 만삭의 여성은 해골과 악마, 적대적인 남성들 사이에 둘러싸여 있지만 눈동자는 강렬하며 자신감이 넘칩니다. 앞으로 ‘책임져야 하는’ 새 생명을 품고 있는 어머니의 힘이 얼마나 고귀한 것인지 단 한 장의 그림으로 보여주는 것입니다. 두려움 없는 시선에 모성에 대한 경외감마저 느껴집니다. 이 작품은 인류의 희망, 임신이라는 위대한 주제를 담고 있지만 클림트의 에로틱한 감정을 그대로 드러내고 있습니다.
클림트는 미술사에서도 보기 드문 소재인 임산부를 대담하고도 노골적으로 묘사했죠. 그녀는 부끄러움 없이 붉은 머리카락과 음모를 당당히 드러내고 있는데요. 이것은 임신이라는 것은 섹스에 의해 이루어지는 일이라는 성적 암시라고 합니다. 하지만, 뭔가 불편하고 외설스러운 느낌은 지울 수 없습니다. 아니나다를까, 1909년 이 작품이 공개되자 빈은 한바탕 난리가 났었다고 합니다. 클림트의 퇴폐적이고 파괴적인 열정이 엿보이는 작품이 아닐 수 없습니다.
Hope I, 1903
알마 말러(Alma Mahler 1879~1964)
클림트가 알마를 처음 본 것은 그녀가 19세 때였습니다. 알마는 동료화가의 딸이었죠. 처음 보자마자 그녀의 미모에 반한 클림트는 알마를 모델로 많은 작품을 제작합니다. 클림트는 알마를 만난 후 우아하면서도 에로틱한 표정의 관능미 넘치는 독창적인 스타일을 완성했습니다. 이 점은 클림트가 세계 미술사의 독보적 존재로 발돋움하는 그만의 미술적 특징입니다. 알마가 처음으로 키스한 남자가 클림트였다고 하는데, 알마의 일기를 훔쳐 읽은 어머니에 의해 클림트는 쫓겨나고 말았다고 하네요.
알마 말러는 19세기말에서 29세기 초 오스트리아 빈의 가장 아름다운 여인으로 수많은 예술가들에게 예술적 영감을 불러 일으킨 금발 미녀입니다. 그녀는 타고난 재능을 소유한 피아니스트이자 작곡가였지만 동시에 남성들의 꿈과 악몽을 동시에 구현하는 여인이었습니다.
알마는 치명적인 매력으로 빈 사교계의 여왕으로 군림하며 수많은 남자들의 마음을 빼앗았습니다. 그녀는 20세기 최고의 교향곡을 작곡한 구스타프 말러를 시작으로 미술과 산업을 연결한 미술 운동 바우하우스의 창시자 발터 그로피우스, 문학가 프란즈 베르펠, 그리고 클림트와 함께 빈 분리파를 이끌었던 오스카 코코슈카와도 염문을 일으켰습니다.
당시 그녀와 스캔들이 난 빈의 예술가와 작가들은 무려 9명에 이른다고 하니 그녀의 매력이 얼마나 치명적이었는지 상상이 되네요. 특히 그녀가 55세에 만난 연인인 신학자 호렌 슈타이너는 알마 때문에 추기경 지위를 버리고 사랑을 선택하기도 했습니다.
여성안에 숨겨진 욕망을 어느 작가보다 잘 이끌어낸 클림트의 자유분방한 시선에서 기존 체제에 종속되지 않는 진정한 예술가를 만날수 있습니다. <다나에>는 그녀를 가둔 탑 안에서 황금비로 변한 제우스를 맞이합니다. 이 작품은 다나에에 대한 사전 지식이 없다면 도저히 이해하기 어렵습니다. 다나에가 태아처럼 웅크린 자세로 황금비로 변한 제우스를 맞이합니다. 이 그림속에서 남녀의 관계를 나타내는것은 전혀 없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그림이 관능적인 이유는 바로 다나에의 도취한 듯 감고 있는 눈과 얼굴의 홍조때문이죠.
<다나에>는 알마를 모델로 한 많은 예술가들의 작품 속에서 가장 매혹적인 작품입니다. 그리스 신화 속 제우스가 황금비로 변해 다나에와 사랑을 나눈다는 이야기를 클림트는 특유의 우아하고도 아찔한 관능미로 너무나도 짜릿하게 그려냈습니다. 터질듯 풍만한 여인의 허벅지가 화면을 가득 채우고 있습니다. 그 부드럽고 육감적인 여인의 허벅지 사이로 황금 소나기로 변한 제우스가 쏟아져 들어옵니다. 살짝 벌어진 입술, 붉게 상기된 볼, 풀어헤친 가슴과 잔뜩 긴장된 허벅지, 다나에는 지금 쾌락에 몸부림치는 중입니다. 게다가 그녀는 왼손으로 자신을 애무하고 있는 중입니다.
하지만 클림트는 이 퇴폐적 아름다움을 예술적으로 승화시켰습니다. 그야말로 황금빛 에로스가 쏟아지는 작품입니다.
Danae, 1907
Judith I, 1901
Portrait of Adele Bloch-Bauer II, 1912
아델레 블로흐 바우어(Adele Bloch-Bauer 1881~1925)
클림트의 여성들 가운데 어느 한쪽으로도 명쾌히 분류되지 않는 여성이 있었느니, 그녀가 바로 아델레 블로흐 바우어입니다. 그녀는 상류층 출신의 여성이면서도 클림트를 위해 매우 관능적인 그림의 모델이 되어주었고, 또 그와 정신적인 사랑뿐만 아니라 육체적인 사랑도 나누었습니다.
아델레 바우어는 1881년 매우 부유한 오스크리아의 유대인 금융업자의 딸로 태어났습니다. 이른 나이에 자신보다 열 여덟 살이나 많은, 역시 유대계 부호인 페르디난트 블로흐와 결혼했죠. 명문가의 여인으로 아델레는 무척 교양있고 지적인 여인이었습니다. 그녀는 살롱을 열어 문학인들, 예술인들, 정치가들과 교류를 했습니다.
그녀는 당시 빈의 스타화가로 떠오른 클림트와 컬렉터와 화가로서 인연을 맺었습니다. 클림트와 아델레 사이에서 특별한 관계의 징후가 나타나기 시작한 것은 클림트가 그녀의 초상을 주문 받은 1899년부터 입니다. 이때 아델레의 나이가 열 여덟, 클림트의 나이는 서른 일곱이었습니다.
당시 아델레는 나이는 어렸지만 그렇게 아름다운 여인은 아니었다고 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클림트의 작품 속 그녀는 상당히 매혹적이고 뇌쇄적입니다. 클림트는 그녀를 모델로 그 유명한 <유디트>연작을 그리죠.
유디트는 구약 시대에 유명한 이스라엘 애국 여걸입니다. 그녀는 백성을 구하기 위해 자신의 매력으로 적장 홀로페르세스에게 접근했고, 그와 정사를 나눈 뒤, 그가 골아떨어지자 그의 목을 베어버렸죠.
클림트는 유디트를 팜므파탈의 요부 이미지로 표현했습니다. 클림트의 유디트의 에로티시즘은 단지 그녀의 몽롱한 표정뿐 아니라, 풀어헤친 젖가슴과 속이 비치는 옷, 그리고 죽은 적장의 머리를 애인 얼굴 쓰다듬듯 어루만지는 제스처에서 뚜렷이 드러납니다. 클림트는 유디트의 애국심보다는 남자를 유혹해 파멸에 빠뜨릴 수 있는 여성의 성적 매력에 주목했죠. 그리고 그 모델로 아델레를 선택했습니다.
<유디트 I>에서 유디트의 목에 두른 넓적한 황금빛 초커는 <아델레 블로흐 바우어>의 초커와 같은 것이었습니다. 유디트 초상에서는 이 초커가 좀더 거칠게 표현되어 있지만, 자세히 보면 같은 종류의 것임을 알 수 있죠. 이 초커만 보더라도 모델이 누군지 금세 확인 할 수 있습니다.
재미있는 것은 이 초커가 아델레의 남편 페르디난트가 그녀에게 선물한 것이라는 사실이죠. 페르디난트도 이 그림이 처음 전시되었을때 전시장을 찾은 바 있습니다. 그는 아내를 닮은 그림 속 여인과 자신이 선물한 것과 비슷한 초커에서 아내의 부정을 알아차렸을까요?
특히 <아델레 블로흐 바우어 I>은 7년 이상이나 걸려 완성된 작품으로 제작의 어려움 때문이라기보다 서로의 관계를 유지하기 위해 두 사람의 필요에 따른 것 아니었냐는 분석이 지배적입니다.
2004년 미국 소더비 경매에서 세계적인 화장품 회사 에스티로더의 회장인 로널드 로더에게 회화 경매 역사상 최고가인 1억 3500만달러(약 1300억원)에 낙찰되어 화재가 되기도 했던 작품입니다.
몽환적이면서도 관능적인, 그러면서도 처연한 느낌의 화풍으로 지금까지 많은 사랑을 받고 있는 작가 구스타프 클림트, 황금빛 에로스가 뚝뚝 떨어지는 클림트의 그림은 보는 이를 아찔하고 몽롱하게 만듭니다.
섬세한 기교와 화려한 장식과 상징으로 가득 찬 그의 작품은 탐미주의와 쾌락예찬에 빠진 빈의 상류층 사회의 종말론적인 분위기를 에로틱하게 보여줍니다. 클림트의 에로스...그 바탕에는 그의 영감이었고, 사랑이었으며, 전부였던 여인들이 있었습니다.
그의 작품에 등장하는 여인들의 아름다움은 때로 풍성함으로, 때로 앙상함으로 드러나지만 그것이 어떤 양감을 지녔던 클림트의 그림이 묘사하는 여인들은 아름답습니다. 그도 그럴 것이 클림트만큼 여성을 사랑한 화가가 또 있을까요? 오죽하면 그의 별명이 '빈의 카사노바'였겠어요. 자신의 모델이 된 여성과는 꼭 잠자리를 했다는 풍설이 있을 만큼 그를 둘러싼 여성 편력에 대한 이야기들은 풍성합니다.
하지만 클림트는 여성들에 대해 매우 뚜렷한 이분법적 태도를 취했습니다. 그에게 여성은 성녀 아니면 요부였죠. 직업모델들은 클림트의 요구에 따라 매우 관능적이고 때로 외설적이기까지 한 포즈를 취해 주었습니다. 하지만 클림트가 이들 모델들과 주고받은 것은 철저히 육체적인 사랑에 국한된 것이었습니다.
클림트가 마음에서 우러나오는 사랑을 느끼고 이를 실천한 대상은 지체 높은 사교계 여성들이었습니다. 그는 그들에게서 구원의 여인상을 보았죠. 클림트는 이들과 육체적인 관계를 갖지 않았습니다. 오로지 '플라토닉 러브'만을 추구했습니다.
하지만 플라토닉 러브와 에로틱 러브를 넘나들었던 여인이 있었으니 <아델레 블로흐 바우어의 초상 I> 속 주인공 아델레 블로흐 바우어입니다. 그녀는 상류층 출신의 여성이면서도 클림트를 위해 매우 관능적인 그림의 모델이 되어주었고, 그와 정신적, 육체적 사랑을 나눴습니다.
어쨋든 이 작품은 상당히 사회적 파장을 몰고왔습니다. 눈썰미 있는 빈의 사교계 인사들은 모델이 상류층 여성이라는 사실을 알아차렸죠. 상류층 여성이 이런 요부 상의 모델이 되었다는 것, 그것은 상당한 스캔들의 요소를 갖추고 있는 것이었습니다. 하지만 남편 페르디난트는 침묵했고, 사랑과 예술로 얽힌 두 사람의 관계는 12년간 유지되었습니다.
클림트의 작품 가운데 가장 사랑을 많이 받는 작품은 <키스>입니다. 사랑의 한 표현으로서 키스의 이미지가 무척이나 아름답게 표현된 작품이죠. 작품의 모델은 누구인지 확실하지 않습니다. 에밀리가 모델이라는 주장과 아델레가 모델이라는 주장이 대립하는 중입니다.
아델레는 상류층 여성이면서도 클림트를 위해 관능적인 모델이 되어 주었고, 클림트 역시 아델레와는 정신적인 사랑뿐만 아니라 육체적인 사랑도 나누었습니다. 그녀는 훗날 자신이 클림트의 <키스>의 모델이라고 말하기도 했습니다. 두 사람은 12년 동안 깊은 교류를 했다고 전해집니다.
Portrait of a Lady 1894. 30 x 23cm.Historical Museum of the City of Vienna.
1894년 구스타프 클림트와 프란츠 마치는 빈 대학 대강당 벽화를 위한 스케치를 준비하라는 주문을 받았다.
클림트의 양식적 변모는 미술가 연합의 점진적인 해체로 이어졌다.
클림트는 에른스트의 이젤화 <로텐부르크의 임시무대에 오른 광대>를 완성하였다.
그는 그 그림의 중심인물들 중 한명의 얼굴에 에밀리를 그려넣었다.
1895년 새로 준비된 <알레고리와 상징> 시리즈를 위한 디자인 작업을 했고,
그의 그림 <사랑>에서 그가 상징주의로 변모하는 것이 분명하게 보인다.
플뢰게 자매들의 장녀 폴린(1866-1917)이 의상 관련 교육기관을 열었고, 거기서 헬렌과 에밀리도 일한 것으로 보인다.
Die Liebe (Love) 1895
Die Liebe (Love) 1895, oil on canvas, 60 x 44 cm, Historical Museum of the City of Vienna
어두움 속에서 자신들을 드러내지 못하는 한 커플의 애닯기도 하고, 불안하기도 한 사랑을 그려내었다.
자신을 포기한 듯 남성에게 매달린 여자의 표정에서 축복받지 못하는 사랑의 쓸쓸함이 느껴진다. 클림트의 대표적인 초기 작품으로
마치 클림트의 작품처럼 보이지 않고, 신고전주의풍으로 보인다. 하지만 자신의 세계가 확고해지지 않은 이 때에도, 클림트 특유의 은유와
상징이 살아 있다. 표구를 한 듯 그린 이 작품의 첫 인상은 팬시한데 어찌보면 그저 통속적인 사랑 타령쯤으로 보일 수도 있다. 몽환적인
느낌은 이때부터 시작된 듯 하고, 특유의 작품세계의 단서도 보인다.
그림 제일 윗 부분을 차지하고 있는 흐릿하게 그린 얼굴들은 어린아이부터 노파, 그리고 유령까지 등장한다. 그림 아래 사랑을 나누는 연인들과는
전혀 어울리지 않는 듯한 풍경이다. 그러나 사랑이 그저 두 사람의 반짝 만남이 아니라 오랜 인연과 과거, 그리고 미래를 모두 포함하고 있음을
상징하는 이 부분으로 인하여 그림은 통속성을 벗어나고있다. 사랑을 보는 다른 시각, 아주 독특하고 통찰력 있는 해석이 돋보이는 작품이다.
Portrait of Josef Lewinsky. 1895
Portrait of Josef Lewinsky. 1895. 64 x 44 cm. The Österreichische Galerie Belvedere, Vienna, Austria.
Sculpture 1896.
Sculpture 1896. 41.8 x 31.3 cm (Painting details), Historical Museum of the City of Vienna.
1896년 클림트와 마치의 작품이 더 이상 양식적인 공통점이 없었지만 여전히 빈 대학의 천장화를 다루는 그림을 함께 맡았다.
클림트가 의학, 철학, 법학을 맡고, 프란츠 마치가 그 나머지를 맡았다.
1897년 클림트는 20여명의 다른 화가들과 함께 빈 분리파(제체시온, Secession)를 결성하였고, 그 초대 회장을 맡았다.
관학적인 미술 아카데미로부터 이탈하여 근대운동을 시작하기 위해 결성한 전시 동인이라 할 수 있는 분리파는 기존의 보수적이고
폐쇄적이며 관영화 되어있던 전시회에서 벗어나 자유로운 전시회를 기획하고 조직하였으며 이듬해부터 월간지
<베르 사크룸(성스러운 봄이란 뜻)>을 출간했다.
클림트는 세기말의 빈에서 청년 화가를 이끄는 개혁의 주역이자 유명 인사로 떠오른다.
동시대에 에드바르트 뭉크는 <절규>를 그리고, 리하르트 슈트라우스는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를 작곡했으며, 지그문트 프로이트가
<꿈의 해석>을 출판하고 구스타프 말러의 <교향곡 제3번>이 초연됐다. 프로이트와 말러는 클림트의 작품세계에 큰 그림자를 드리운 인물이다.
Music 1895
Music 1895, Oil on canvas, 37 x 45 cm, Neue Pinakothek, Munich
Music 2. 1898
Junius & Tragödie (Tragedy)
Tragödie (Tragedy). 1897. 41.9 x 30.8 cm, Historical Museum of the City of Vienna, Black chalk, pencil and gold. Junius. 1896. 41.5 x 31cm. Historical Museum of the City of Vienna, Black chalk, pencil and gold.
Junius & Tragödie (Tragedy) is From "Allegorien" Neue Folge, Nr.66, 1897 published by the Vienna Publishing Company Gerlach & Schenk.
Lady by the Fireplace 1897-98.
Lady by the Fireplace 1897-98. 41 x 66 cm. The Österreichische Galerie Belvedere, Vienna,
Schubert at the Piano 1899
Schubert at the Piano 1899. Oil on canvas. 150 x 200 cm. Destroyed by fire at Schloss Immerdorf in 1945
1899년 빈의 링스트라스에 있는 둠바 빌라의 음악실 실내장식이 완성되었는데 클림트는 이 음악실 장식을 위해 <피아노 앞에 앉은 슈베르트>를 그렸다.
이 작품은 클림트가 이전 벽화에서 주제로 삼았던 역사주의로부터 점차 멀어져 가고 있음을 보여준다. 고증된 역사적 사실들을 근거로 한 정확한
세부묘사 대신 모델로 하여금 당대의 의상을 입히고 촛불의 미묘한 효과를 강조하며 자연스러운 빛과 어둠의 효과를 연출하였다.
클림트는 가장 정확한 빛으로부터 그림자까지의 진행을 포착해내기 위해 수 차례 촛불 스케치를 했었다고 한다. 이 그림에서는 특히 소녀들 머리와
얼굴의 윗부분에 밝고 어두운 대비를 강화시켜 더욱 신비스럽게 보이는 효과를 얻었다.
이 작품의 피아니스트는 슈베르트이다. 슈베르트를 주인공인 피아니스트의 모델로 삼고자 했던 것은 아마도 이 작품의 제작 후원자였던 둠바의 의견에
따른 것으로 보인다. 당시 피아노 선생은 음악의 도시 비엔나에서는 흔했기 때문에 이런 선생들은 귀족의 자제들에게 피아노도 가르치고 집안일도 돕는
Schubert at the Piano (study) 1896, 캔버스에 유채, 30x39cm, 개인소장, 비엔나
피아노 앞에 슈베르트 (같은 제목의 유화를 위한 습작)
1898년 분리파의 첫 번째 전시회가 개최되었는데,
회원들의 그림 뿐 아니라 뵈클린, 크레인, 클링거, 리버만, 로댕, 세간티니, 슈툭, 토마 등 잘 알려진 유럽 예술가들의 작품들도 전시되었다.
빈 대학 대강당 벽화를 위해 제출한 스케치로 인해 혹독한 비판에 직면하게 되었고 완성된 그림을 심사 받아야 한다는 단서가 붙게 되었다.
에밀리와 함께 여름휴가를 보낸 Hallst Atter 호수의 St Agatha에서 최초의 풍경화를 그렸다.
(최근에 발견된 1881년작 풍경화 두점을 제외하고서이다. 이 그림들은 1992년 취리히 전시회 카탈로그에서 볼 수 있다.)
Theseus and the Minetaurs. 1898
Theseus and the Minetaurs. 1898 Lithograph 62 X 43cm,
Poster for the 1st Secession exhibition, Private collectionScanned from the book 'Secession' 1898
테세우스의 성기를 나무를 이용해 가렸다.
1898년 분리파의 첫 번째 전시회에서 클림트는 팔라스 아테네의 보호 아래 미노타우로스와 싸우는 테세우스를 그린 전시회의 포스터를 디자인했으나,
테세우스의 나신이 공공 윤리를 해친다며 검열에 걸려 결국 테세우스의 성기를 식물을 이용하여 가리는 수정을 하는 소동을 겪는다.
Pallas Athene 1898
Pallas Athene (아테나 여신) 1898 Oil on canvas. 75 x 75 cm.Historical Museum of the City of Vienna
역사에 대한 지식이 많은 클림트는 역사를 현재의 모습으로 전환시키는 작업에 흥미를 느꼈으며, <팔라스 아테나>란 제목으로
아테네의 수호여신을 비엔나의 남자들이 아름답고 매혹적인 여인이라고 느낄 수 있는 모습으로 바꾸었다.
클림트는 <팔라스 아테나>에서 처음으로 황금을 색으로 사용했다. 예술을 후원하는 여신으로도 알려진 아테나를 클림트는 황금 갑옷과 투구, 그리고 창으로 무장하여 예술을 수호하는 강력한 힘을 상징했다. 그는 아테나의 갑옷에 메두사가 혀를 내밀며 적의 세력을 조롱하는 모습을 새겨 넣었다.
팔라스는 타이탄족 크리오스의 딸인 지혜의 여신으로 아테나가 팔라스의 뒤를 이어서 지혜의 여신이 되었다는 의미에서 팔라스 아테나라고 부른다. 팔라스 아테나는 트럼프에서 퀸의 모습으로 등장하기 때문에 서양 사람들에게는 매우 친숙한 여신이다.
Pallas Athene (아테나 여신) 1898
팔라스아테네는 제1회 분리주의 전시회와 같은 해에 제작되지만 출품은 제2회 분리주의 전시회에서 이루어지게 됩니다. 실로 엄청난 논란을 불러오게 되는 그림입니다. 그림을 자세히보면 일단 아테네여신이 서있고 그녀의 가슴에 혓바닥을 내밀고 있는 황금색 고르고가 보인다. 오른손엔 나체의 여자가 서있습니다. 뒷쪽 검은 부분에 얼핏 보이는 그림은 전투장면인데 헤라클레스와 트리톤이 싸우고 있는 모습입니다.
팔라스 아테나를 처음 보면 눈에 쏠리는 것은 정 가운데의 황금 메두사입니다. 무게감 나가는 황금을 가져다 다 붙인만큼의 압도적인 사실감입니다. 그리고 그녀의 표정. 다나에와는 달리 정숙한 분위기 속에서, 그녀가 두르고 있는 금빛 갑옷의 물고기 비늘은 이 것이 정말 한 인간이 일생이 아닌 단기간의 시간을 두고도 그려낸 것이 맞는가 싶을 정도입니다.
그런데 아테나 여신의 오른손에 관능적인 여인의 조각상이 자세가 양팔을 벌리고 하늘과 교감하는 듯 얼굴을 위로 올린 걸 보니 아테나 여신에게 제를 올리는 여사제같습니다.
클림트는 아테나 여신의 왼손엔 창을 오른손엔 매혹적인 여사제의 조각상을 올려 놓음으로써 자신의 의지를 아테나 여신에게 투영시켰습니다. 과거에 얽매이는 게 아닌 자신만의 색채로 매혹적인 그림을 그리겠다는 의지를요.
클림트가 팔라스 아테나를 그린 이유가 있습니다. 그것은 클림트의 주류를 차지하던 미술가 연맹에서 자신과 같은 분리파 화가가 이제는 아테나처럼 등장하여 판을 바꾸겠다 라는 의지입니다. 그렇기에 아테나의 입은 여물다. 굳은 결의의 다짐이자 그의 손에 든 여신상(승리의 여신 니케라고 한다)을 통해서 의지는 재확인됩니다.
여기서 나타난 아테네 여신은 역시 전형적인 팜므파탈적인 모습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뇌세적인 눈빛. 남성으로 하여금 겁탈하고 싶게 하는 욕망이 생기게 하면서도 한편으론 거세공포를 불러일으키는 묘한 느낌. 정말 기가막힌 이미지라고 생각됩니다. 눈빛하나로 이런 느낌을 자아낼 수 있는 화가가 클림트 말고 또 있을까요? 뒤에 나타나있는 헤라클레스의 전투장면의 상징성은 위에서 본 테세우스의 전투장면과 마찬가지의 의미를 가지게 되는 것이고 인상 깊은 부분은 고르고입니다.
헤시오도스의 신통기에 따르면 고르고는 폰토스와 가이아의 자식들인 포르코스와 케토. 그리고 이 둘 사이에서 태어난 자매들인데 각기 이름은 스텐노, 에우뤼알레, 메두사입니다. 이 세명중 스텐노와 에우뤼알레는 불사의 운명이지만 메두사만이 죽을 운명을 타고나게 됩니다. 흔히 단수로 고르고라고 하면 메두사를 말합니다.
팔라스 아테네에서 그려진 저러한 혓바닥을 내민 고르고의 모습은 자신에게 반대하는 구세력에 대한 조롱의 상징을 가지고 있습니다. 사실 팜므파탈의 이미지를 차용한 강력한 아테네여신의 모습에서 저런 형태의 메두사를 차용할 필요는 없기 때문입니다. 강력한 거세공포를 일으키게하기위해선 좀 더 무섭고 강렬한 메두사의 이미지를 차용하는게 옳을테니 말입니다.
마지막으로 살펴볼 부분은 오른손위에 있는 나체의 여성입니다. 저 여성은 니케(Nike)를 의미합니다. 아폴로도로스의 그리스신화에 따르면 거인 팔라스와 암흑의 강 스튁스는 승리(Nike), 힘(Kratos), 열성(Zelos), 완력(Bia)의 자녀들을 낳았다고 합니다. 그 이유는 제우스가 크로노스 및 티탄신족과 전쟁을 시작할때 스튁스와 스튁스의 저 4명의 자녀들이 제우스의 편을 들기로 약속했기 때문입니다. 즉 승리, 힘, 열성, 완력은 제우스가 티탄신족을 제압하는데 필수적인 요소라 할 수 있습니다.
승리를 상징하는 니케는 동시에 아테네와 제우스의 상징이므로 특별히 니케가 따로 신으로서 숭배되기보다는 제우스와 아테네가 니케를 들고 있는 형태로 자주 등장하게 됩니다. 주로 팔에 올려놓는 형태입니다. 그렇기에 클림트의 팔라스 아테네에 나오는 저 여성이 니케가 되는 것입니다. 이러한 니케는 단독으로 그려질 경우 날개가 달리고 종려나누 잎을 들고 있는것이 특징입니다. 왜 그 흔히 배의 선상에 세우는 날개달린 여신상을 생각하면 됩니다.
물의 정령은 관람자에게 프로이드의 '상징의 세계'와 비슷한 성적인 세계를 환기시킨다. 이것은 이미 〈흐르는 물 (Fishblood)〉과 이 작품 〈물의 님프 (은빛 물고기)〉를 통해 어렴풋이 펼쳐졌던 세계이며 몇 년 후 〈물뱀 Ⅰ〉, 〈물뱀 Ⅱ〉연작에서 거듭 나타난다. ---- 중략----
님프의 얼굴에서는 귀족부인 로제 폰 로스트호른 프리드만의 특징이 분명하게 보인다. 이렇게 귀족 출신 팜 파탈이 탄생했다. 클림트가 그녀의 동의를 구했는지 그렇지 않았는지는 의문이다. 어쨌든 이 그림은 오랫동안 공개되지 않았다. 빈 사람들은 그러한 추측과 험담 거리를 좋아했던 것이다.
구스타프 클림트 (마로니에북스)
Fishblood. 1898. Original distroyed. Pen and ink. From "Ver Sacrum" Nr 3.
클림트는 물의 모티프를 자주 사용했으며 『베르 사크룸』을 위한 아름다운 삽화 <물고기의 피> (1898년) 에서 처럼 물의 요정이나 인어 같은 주제를 여러 번 사용했는데,
이 작품에서는 물고기의 핏줄기가 상아질 몸체의 요동치는 무리를 생성해내는 듯하다.
Nude Veritas, (벌거벗은 진실) 1899
Nude Veritas, (벌거벗은 진실) 1899. 260 x 64.5cm Austrian National Library, Vienna, Austria
2m의 이 여성상은 기이한 표정과 자극적인 누드를 통해 빈의 시민들을 당황케 했다. 그녀의 붉은 음모는 고전적이고 이상적인 미의식에 대한 선전포고였다. 승리에 대한 작은 우의는 아름다운 작품 <누다 베리타스> 에서 나타난다.
『베르 사크룸』을 위해 1898년 그린 그림의 머리 부분에 있었던 셰퍼의 인용구 “진실은 불이다. 진실은 불을 밝히고 불사르는 것이다” 는 이번에는 대중의 취향에 도전하는 동시에 예술의 자율성을 강하게 요구하는 실러의 주장, “당신의 행동이 대중을 기쁘게 하지 못한다면, 소수를 기쁘게 하는 것으로 만족하라. 여럿을 기쁘게 하는 것은 하나의 악이다.” 로 바뀌었다.
비평가 헤르만 바르의 사무실에 걸기 위해 그린 이 작품은 진실과 예술을 동일시한 복합적인 상징의 총체를 보여준다. 물에서 태어나는 근대적인 비너스는 거울을 들고 그 안에 바라보는 사람의 이미지를 반영하고자 하지만, 현명함과 관능을 동시에 상징하는 뱀 한 마리가 발밑을 감고 있다. 가볍고 아른거리는 화관을 가진 두 송이 민들레꽃은 새로운 사상이 세상에 빠르게 전파되는 것을 의미한다.
하나이기에 진실하고 그래서 순수한 새로운 예술은 위선이나 핑계 없이 그 시대의 진정한 이미지를 보여준다. 그 목소리는 민들레 홀씨처럼 자유롭고, 그리고 바람처럼 빠르게 퍼진다.
클림트의 두 번째 팜 파탈은 높이 2.6m의 유화 대작 〈누다 베리타스〉로 이 때 처음으로 '자연주의' 양식이 나타난다. 붉은 머리카락과 음모를 드러낸 도발적인 누드로 사람들은 충격과 혼란에 휩싸였다. 그들의 눈앞에 서 있는 것은 비너스가 아니라 거대한 니니, 즉 전통적 예술의 이상화된 누드와는 전혀 관계가 없는 살과 피로만 이루어진 그저 몸뚱이일 뿐이었다.
음모를 표현한 것 자체가 고전적인 이상주의에 대한 도전이었고 그림 위의 주석을 단 듯 인용한 실러의 시귀는 그림 자체보다 먼저 거부반응을 불러일으키며 관객을 자극했다.
벌거벗은 진실은 구스타프 클림트가 1899년에 그린 그림으로 오스트리아 빈 국립도서관에 보관중인 그림입니다. 클림트는 <필라스 아테나>에서 아테나 여신이 오른손으로 들고 있는 승리의 여신 니케상을 <벌거 벗은 진실>로 확대하여 표현했습니다.
Nuda veritas; Der Neid
[Bare truth; The Envy]
이 작품은 두가지로 제작되었는데 베르사크룸을 위한 삽화로서 흑백으로 된 그림이 한장 있으며 또 하나는 지금 보고 있는 이그림입니다. 이 작품 역시 분리파와 팜므파탈 그리고 상징주의로 이야기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구스타프 클림트가 그린, 진한 관능미를 마음껏 발산하고 있는 이 여성상은 여신이 아니라 팜므 파탈(프랑스어로 성을 무기로 삼아 상대를 파멸시키는 것을 뜻함)로 다가와 비엔나 시민들에게 적잖은 당혹감을 안겨주었습니다. 특히 붉은 음모는 고전적이고 이상적인 미의식에 대한 선전포고로 받아들여졌습니다.
이 거울을 들고 있는 형상은 비엔나의 모던한 사람들을 향해 던지는 쎼쎼시오니스트들의 상징이 되었습니다. (생략)
클림트와 마취는 1894년 교육부 장관 폰 하텔에게서 비엔나 대학 대강당의 벽화를 위임받고 2년 후 벽화 스케치를 교육부에 제출합니다.
클림트의 그림은 모두 세 점으로 <의학>·<철학>·<법학>이었습니다. <의학>의 경우 1901년 언론으로부터 엄청난 비난을 받았지만
이와는 무관하게 바이에른 정부가 <음악>을 구입했으므로 클림트는 자신감을 잃지 않았습니다.
클림트는 작은 캔버스에 유화로 그린 <의학>을 1898년 비엔나 분리파전을 통해 소개했고,
미완성의 <철학>은 1900년 비엔나 분리파전을 통해 소개했습니다.
중산층이 그의 그림을 좋아했지만 산업화와 경제적 붐을 통해 형성된 중산층은 만국박람회가 개최된 1873년을 전후해서 산업화의 실패와 현대 경제의 실패로 몰락하고 있었습니다. 비엔나의 경제와 문화는 부르주아를 주축으로 형성되고 있었습니다. 중산층이 정치·사회적으로 영향을 주기에는 힘이 미약했고, 문화적·경제적으로도 한계가 있었습니다. 부르주아는 전통을 가장 가치 있게 여겼으므로 클림트의 요염한 여인의 누드 그림을 좋아하지 않았으며 더러는 좋아했더라도 지나치게 노골적인 선정성을 마음에 들어 하지 않았습니다.
클림트의 화면에 나타난 선정적인 여인의 누드와 해골이 전통을 지키려는 보수주의자들의 분노를 터뜨리게 만들었습니다. 이런 그림들이 대학에 장식될 것이란 사실이 알려지자 거센 항의가 일어났고 논란은 여러 해에 걸쳐 계속되었습니다. 비엔나 대학을 위한 그림으로 인해 비엔나에서 클림트의 이름을 모르는 사람이 없을 정도였습니다.
그는 1901년에도 교수 물망에 올랐지만 보수주의자들의 극심한 반대로 선임되지 못했습니다. 이는 파리나 베를린과는 달리 비엔나는 현대미술이 성장할 여건이 성숙하지 못했음을 말해줍니다. 베를린 분리파가 1900년에 그를 멤버로 받아들였는데 이는 그가 유럽의 중요한 화가임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1907년에 완성한 <의학>·<철학>·<법학> 모두 1945년 나치가 침공한 후, 퇴폐미술로 규정하고 유대인 소유자의 손에서 강제로 빼앗아 1945년 5월 오스트리아 남쪽 슐로스 임멘도르프 궁전에서 불태웠습니다.
[출처] '뭉크, 쉴레, 클림트의 표현주의'/김광우/도서출판 미술문화
Philosophy 「철학」 1899 - 1907
Philosophy 「철학」 1899 - 1907 1907년 확정판. 캔버스에 유채 430×300cm
아득한 우주, 현현한 공간에 수많은 불꽃 에너지로 흘러내리는 그 공간에 허둥대는, 벌거벗은 사람이 모여 원주(圓柱)를 이룬 인간군상.
그 속엔 천진한 아기, 나체의 젊은 여인, 머리를 감싸 안은 늙은이도, 저들은 쾌락과 출산, 노동과 늙음의 애환에 뒤엉켜 울고 웃고 신음하며 정처 없이 부유하는 육체들.
은하수처럼 흐르는 무수한 빛의 파편 속엔 인간기둥을 바라보는 미동않는 얼굴이 보인다. 그는 인간 존재에 대한 스핑크스의 수수께끼를 풀어줄 것일까,
지혜(sophia)와 사랑(philo)을, 이성과 우주의 법칙, 그리고 절대자의 말씀을 우리에게 명징하게 일러줄 것인가.
아래, 부푼 머리카락으로 두상을 감싼 여인만이 뚜렷한 의식으로 나를 직시한다. 전시회 팸플릿에 '지식'으로 명기 되었다는 그녀가 말을 건네는 것 같다. 너희도 모두 저들과 다를 바 없지 않으냐고~.
영원히 반복되는 탄생과 죽음, 창조와 파괴, 그 혼돈에 따르는 고통과 환멸까지도 자신의 운명이라면 사랑해야 한다는 ‘아모르 파티(amor pati)’, 프리드리히 니체의 말을 떠올려 본다.
천장화 실제 크기의 「철학」이 미완인 채 비엔나 분리파 전시회를 통해 처음 대중에게 공개되었을 때, 대학관계자들은 경악한다. ‘철학’이라는 대명제에 걸맞지 않았다. 그들은 절대 진리에 대한 꿈과 이상, 과거의 위대한 철학자들을 찬양하는 서술적 방식의 그림을 기대하였지만 아니었다.
이 그림은 모호한 배경에다 불안과 고통으로 일그러진 얼굴, 또 발가벗은 몸으로 어둠 속에 방황하고 부유하는 인간 군상들을 그대로 담았냈던 것이다.
강당을 장식하려는 비엔나 대학의 목적은 이성적 과학에 대한 찬양과 옹호 그리고 이들의 사회에 대한 유용함을 고취시키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의학>과 마찬가지로 <철학> 또한 은유적이었고, 그 내용이 모호해서 대학이 추구하는 이성과는 아주 거리가 멀었습니다. 클림트는 세계에 대한 이성주의자들의 견해를 반영하지 않았습니다. 그는 다음과 같은 말로 <철학>을 옹호했습니다.
이 작품은 대학 교수들이 보고 사랑하는 세계가 아닙니다. 그들이 알고 있는 어두움에 대한 빛의 승리는 내 것과 다르기 때문에 그들이 헌납한 홀에 그들이 묘사하기를 바랐던 관념과는 거리가 멀었습니다.
그의 말에서 교수들의 아카데미즘에 입각한 철학을 의도적으로 부정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신화에 관심이 많은 그는 신화를 현대에 맞게 해석하려고 했으며, 이를 은유 또는 상징적으로 사용하여 인간의 본질적 문제에 대한 답을 모색했습니다.
쇼르스케는 한 편의 드라마를 보는 듯한 클림트의 그림을 가리켜 “예술가의 개방적인 이기심의 분기”라고 했습니다.
비엔나 대학 교수 87명은 클림트의 <철학>에 반대했으며 이 그림을 제거하는 법적 투쟁도 불사했습니다. 그러나 1900년 파리에서 개최된 만국박람회는 <철학>에 금메달의 영예를 안겨주었습니다.
[출처] '뭉크, 쉴레, 클림트의 표현주의'/김광우/도서출판 미술문화
모든 사람들은 방향과 목표를 잃고 떠돌고 있다. 이런 묘사는 당시 학계가 가지고 있던 과학적 지식에 대한 신념을 뒤엎는 것이어서 학자들에게 모욕감을 준다.
클림트의 에로티시즘은 빈 대학 대강당을 위해 제작한 세 점의 예비 스케치를 발단으로 끊임없는 논쟁을 불러일으켰다. 대다수의 사람들은 이 세 작품을 외설적이라고 생각했다.
클림트는 1899년 그중 첫 번째 작품인 〈철학〉의 최종판을 발표했는데 이 작품의 초기 스케치는 파리 만국박람회에서 처음으로 전시됐다. 파리에서는 크게 호평을 받아 만국박람회에서 금메달까지 수상했지만, 고국의 심사위원회는 이 작품이 빈 문화 전체의 명예를 실추시켰다고 매도했다. 하지만 이 작품은 클림트가 고도의 긴장감을 유지하며 제작한 것이었다. 다시 말해 〈철학〉은 클림트가 자신의 세계관과 독자적인 양식이라는 두 요소를 통합하고자 한 작품이었다. 카탈로그에 그는 다음과 같이 서술했다.
"왼쪽의 인물은 생성, 결실, 소멸을 표현한 것이다. 오른쪽은 수수께끼 같은 지구, 아래쪽에서 떠오르는 것은 빛의 형상, 즉 지식을 의미한다."
보수적인 빈 대학 교수들은 이 작품을 정통에 대한 이단적인 공격으로 간주하고 반격했다. 어둠에 대한 빛의 승리를 표현하길 기대했지만 클림트가 넘겨준 것은 거꾸로 모든 세력에 대한 어둠의 승리를 표현한 작품이었던 것이다. 그러나 쇼펜하우어와 니체의 영향을 받은 클림트는 인간의 실존이라는 형이상학적 수수께끼를 스스로의 방식으로 해명하고 현대인의 혼란을 표현하고 싶어했다. 그는 병, 육체의 노쇠, 빈곤 등의 주제를 추한 모습 그대로 주저없이 묘사했다. 그것은 현실을 이상화하고 본래보다 아름답게 꾸미려는 통상적인 방법과는 정반대의 자세였다.
팔에 뱀을 감고있는 여인은 에로틱한 복수의 여신 “히게이아”. 이 여신 위에는 죽음의 신이 많은 여인들 사이에서 자신의 힘을 과시하는 듯 서 있다. 그 때문에 생명을 살리는 의학을 무시했다는 의료진들의 엄청난 반발을 사기도 했던 작품이다.
흘러가는 강물일까. 망망대해일까. 벌거벗은 남녀들이 수직을 가른 원주에 모였다.
인간기둥 속엔 아이들, 황홀경의 여인들, 나체로 웅크리고 있는 남자, 그리고 해골바가지도... 生老病死에 뒤엉켜 강물처럼 흘러 흘러가는 얼굴들,
풍만한 가슴에다 엉덩이를 앞으로 내밀고 알 수 없는 공간에 떠있는 음산한 춤사위의 누드 여인은 이제 막 멀리 사라질 것만 같다. 얇은 포대기에 쌓인 아기는 여자의 발 언저리에 매달려 있다. 그녀에게 저 아기의 의미는 ~.
이승에서 마지막 마시는 레테의 강물, 팔에 뱀을 감고 그 망각의 물을 들고 있는 여신 '히게이아'는 세상을 내려다보며 말한다.
"삶이란 탄생과 성애, 죽음을 무한히 반복하는 것임을. 의학마저도 저 大河를 결코 막을 수 없다는 것을".
「철학」맞은편 천장에 자리하기로 한 「의학」은 구도가「철학」과 비슷하지만 좌우가 반전되어 있다. 이 그림에서 클림트는 의학의 최대 목적인 질병 예방과 치료는 생략한 채, 인간의 삶과 죽음, 에로티시즘을 과감히 드러냈다.
의사들의 분노는 당연한 일이다. 그리스 신화에서 최초의 의사인 아스클레피오스의 딸, 즉 건강의 여신인 ‘히게이아’ 묘사에는 수긍하지만, 도발적인 여인의 나체와 의술의 무력함을 말하고 있는 듯한 죽음을 묘사한 해골은 의학계에 큰 논쟁을 불러일으켰다. 포르노그라피라는 비난이 격해져 의회에서까지 논란이 되었다.
<의학>은 의사들이 상상할 수 있는 그런 장면이 아니었습니다. 클림트는 히게이아가 뱀에게 ‘망각의 강물 Lethe’(그리스 신화에 등장하는 저승 Hades에 있는 강으로 이 강물을 마시면 생전의 모든 것을 망각하게 된다)을 마시게 하는 장면을 그렸습니다.
그는 그리스 신화를 통해 삶과 죽음, 인간의 생기에 넘치는 본능적 에너지와 개인의 붕괴의 조화를 나타내려고 했습니다.
그림에서 홀로 있는 외로운 인간이 집단으로부터 격리되어 있고, 해골로 상징된 죽음이 인간들의 목표 없는 행동 속에 있습니다. 누드 여인의 뻗친 왼팔과 등을 돌리고 선 누드 남자의 뻗친 왼팔이 삶과 죽음을 연결합니다. 삶과 죽음에 대한 은유적 메시지를 여인의 모습으로 나타냈는데 화면 상단 오른쪽 구석에 임산부가 생명의 잉태로 상징되어 있으며, 맞은편 아이를 안고 있는 여인이 생명의 성장으로, 히게이아 머리 위에 태아의 모습을 한 아이와 해골 왼쪽의 늙은이의 모습이 삶의 과정으로 상징되어 있습니다. 의학으로 상징되는 이 그림에서 유일하게 옷을 걸친 히게이아는 스핑크스처럼 수수께끼와도 같은 존재입니다.
<의학>에서도 애욕주의 요소가 발견되는데 여태까지 클림트의 작업을 보면 놀랄 일은 아닙니다. 클림트는 1897년부터 이 그림을 그리기 시작해서 1907년에는 430×300cm의 커다란 캔버스에 다시 그렸습니다.
클림트에게 벽화를 위임한 교육부는 처음에는 교수들과 보수주의 언론의 반발을 일축했지만, <의학>이 1901년 제10회 비엔나 분리파전을 통해 소개된 후에는 더 이상 클림트를 옹호하기가 어려웠습니다. 에른스트 스토르는 <의학>에 관해 『베르 자크룸』에 다음과 같이 적었습니다.
삶이 출생과 죽음 중간에 자리를 차지했으며, 둘 사이에서 아스클레피우스 (그리스 신화에 등장하는 의술의 신)의 딸 히게이아(건강의 여신)가 경이로운 일시적 완화와 치유를 발견하기까지 삶은 심원한 고통을 창조했습니다.
<의학>이 소개된 후 이 그림을 반대하는 세력이 대학을 장식하지 못하게 이 문제를 오스트리아 국회로까지 끌고 갔습니다. 비엔나 분리파를 지원한 교육부 장관 폰 하텔의 입장은 여간 난처하지 않았다. 클림트는 불평했습니다. 폰 하텔에 빗대어 말하기를
"내가 저들에게 난처한 입장이 되었다고 합니다. 일감을 준 자가 온 마음으로 지원하지 못하고 또 완전히 이해하지도 못한 채 예술가를 후원하는 것보다 예술가를 괴롭히는 일은 없을 것입니다. 이 불운한 정부의 일을 맡은 이래 사람들은 그 외의 나의 모든 작품을 두고서도 폰 하텔 장관을 비난합니다. 마치 교육부 장관에게 모든 책임이 있는 양 … 내가 그린 모든 그림이 장관을 난처하게 만들었습니다."
클림트의 그림이 사회문제가 되어 국회로까지 번지자 아카데미에서 강의를 하고 싶어 하던 클림트의 바람은 다시금 물거품이 되었습니다. 그는 네 차례에 걸쳐 교수직을 거절당했으며 결국 강단에 서지 못하고 일생을 마감해야 했습니다.
[출처] '뭉크, 쉴레, 클림트의 표현주의'/김광우/도서출판 미술문화
클림트는 운명의 힘에 비해 의학의 힘이 무력하다는 것을 너무나 잘 알고 있었다. 이 그림은 사회적 혼란을 일으켰다.
사람들은 충격을 받았고 클림트는 외설적이고 도착적인 화가로 비난받았다.
생명과 그것의 에로틱한 표현은 항상 에로스와 타나토스 (Thanatos,죽음의 본능) 사이의 투쟁으로 이어진다. 클림트도 이 투쟁의식으로 가득 차 있었다.
빈 대학에 두 번째로 걸린 작품, 〈의학〉의 알레고리는 또 한 번 파문을 일으켰다. 생명의 흐름은 혹독한 운명의 제물이 된 육체를 앞으로 떠민다. 이 흐름은 탄생에서 죽음으로 이어지는 삶의 무대를 황홀과 고통 속에서 하나로 통합한다. 〈의학〉은 거역하기 힘든 운명의 힘과 질병을 치료하는 의학의 힘을 비교함으로써 결국 의학의 무기력함을 드러낸다. 이 작품에 묘사된 히기에이아도 건강의 여신이라는 통상적인 이미지와는 달리 인류를 향해 냉담하게 등을 돌리고 있다. 다시 말해 의학적 진보의 상징이라기보다 수수께끼로 가득 찬 유혹적인 팜 파탈에 가까운 인상이다. 또한 해골과 뒤섞여 있는 여성들의 유혹적인 육체는 죽음을 생명의 핵심으로 파악했던 니체의 '영원 회귀'를 직접적으로 표현하고 있는 것일지도 모른다.
〈철학〉과 〈의학〉에는 '의지로서의 세계, 혹은 탄생·사랑·죽음이라는 영원한 순환이 가진 보이지 않은 힘으로서의 세계'라는 쇼펜하우어의 철학에 공감하는 클림트의 세계관이 드러난다.
하단 왼편 남자의 누드는 인간의 보편적인 좌절과 수치를 상징하고 중앙 왼편의 포옹하고 있는 남녀는 사랑을 상징한다. 드라마의 한 장면과도 같은 <법학>을 가리켜서 어떤 이는 “예술가의 개방적인 이기심의 분기”라고 했다.
<법학> 역시 배척의 대상이기는 마찬가지였는데 클림트가 묘사한 법의 정의가 난해하다는 이유에서였다. 그림에서 문어처럼 생긴 동물이 벌거벗은 늙은이로 묘사된 죄인을 포획하고 늙은이는 머리를 떨군 채 벌을 기다리며 서 있다. 세상을 다스리는 진실, 정의, 법이 세 여신으로 상징되었다. 그는 죄를 남성으로 법을 여성으로 의인화했다. 상단의 세 여인은 진실, 정의, 법의 은총이고 그 아래 세 누드는 상징화한 여신들이다.
클림트는 그리스의 비극 시인 아이스킬로스의 <오레스테스>에서 영감을 받아 이 작품을 제작했는데, 아가멤논과 클리템네스트라의 아들 오레스테스가 어머니를 살해한 죄로 여신들에게 쫓기는 이야기를 현대적으로 해석한 것이다. 앙심을 품은 여신들 앞에 오레스테스가 벌을 두려워하는 모습으로 서 있다.
<법학> 역시 배척의 대상이기는 마찬가지였습니다. 그가 묘사한 법의 정의가 이해되기 어렵다는 이유에서였습니다.
그림에서 문어처럼 생긴 동물이 벌거벗은 늙은이로 묘사된 죄인을 포획했고, 늙은이는 머리를 떨군 채 벌을 기다리며 서 있는 모습입니다. 진실·정의·법이 세 여신으로 상징되었습니다. 상단의 세 여인은 진실·정의·법의 은총이고 하단의 세 누드는 상징화된 여신들입니다.
클림트는 그리스의 비극 시인 아이스킬로스의 『오레스테스 』에서 영감을 받아 이 그림을 그렸는데, 아가멤논과 클리템네스트라의 아들 오레스테스가 어머니를 살해한 죄로 여신들에게 쫓기는 이야기를 현대적으로 해석한 것입니다. 앙심을 품은 여신들 앞에 오레스테스가 벌을 두려워하는 모습으로 서 있습니다.
또한 보기에 따라 이 그림은 거세당하는 데 대한 공포에 질린 남자가 무기력한 모습으로 올가미에 걸려 있으며, 이 남자를 포획하고 있는 여자의 자궁처럼 생긴 문어 같은 기괴한 동물은 고르곤 Gorgon(그리스 신화에 등장하는 머리가 뱀처럼 보이는 괴물로 보는 이가 무서워 돌이 되어버렸다는 세 자매 중의 하나)처럼 보입니다.
올가미에 걸린 남자를 클림트 자신으로 보는 해석도 있는데, 예술가와 사회의 충돌이 정신을 혼란시키는 것으로 해석했다는 견해입니다. 사회의 에토스를 개인적 파토스로 바꾼 것으로 해석하는 것은 법에 대한 그의 개념이 죄와 벌임을 뜻합니다.
클림트는 <법학>을 1904년 미국 세인트 루이스에서 개최되는 만국박람회에 출품하려고 했지만 허락되지 않았습니다. <금붕어>와 <희망 I>도 전시할 수 없게 되자 그는 비엔나 대학에 벽화를 그리기로 한 정부와의 계약을 파기하고 계약금을 돌려주기로 했습니다. 그는 교육부 장관 앞으로 공개서한을 발송했습니다.
몇 년이 걸리는 이 작업이 완성되려면 우선 저의 열광을 불러일으켜야 하는데 현재와 같은 정부의 후원 상황에서는 완전히 불가능한 일입니다. 진지한 예술가들에게 벌어지고 있는 많은 일들을 일일이 언급하지 않겠지만 언젠가는 말할 것입니다. 언젠가 난 그들을 대변하며 몇 가지를 분명히 할 것입니다. 정부는 전시회와 예술가들의 말에 독재적인 간섭을 해서는 안 됩니다. 정부의 역할은 중재자와 상업적 에이전트로 제한되어야 하고 예술적 독창력을 예술가들에게 완전히 일임해야 합니다.
당시의 인터뷰 내용입니다.
"나는 검열을 너무 많이 받았다. 더 이상 이대로 있을 수는 없다. 자유롭기 바란다. 내 작품을 가로막는 그런 불쾌한 하찮은 것들을 벗어버리고 자유를 회복코자 한다. 나는 정부의 모든 후원을 배척하며, 어떤 일도 원치 않고 … 무엇보다도 예술에 대한 오스트리아 정부와 교육부의 정책에 대항하고자 한다."
클림트는 정부로부터 받은 계약금을 돌려주고 자유를 택했습니다. <철학>은 에리히 레데러가, <의학>과 <법학>은 콜로만 모저가 구입했고, <의학>은 훗날 오스트리안 화랑이 구입했습니다.
[출처] '뭉크, 쉴레, 클림트의 표현주의'/김광우/도서출판 미술문화
클림트는 당시의 일반적인 주제였던 '어둠의 세력에 대한 빛의 승리'를 묘사하는 대신에 현대 사회에서 인간이 느끼는 불안을 표현하고자 했다.
빈 대학 강당을 위한 세 번째 작품인 〈법학〉역시 혹평을 받았으며 추하고 노골적인 묘사로 관람자에게 충격을 줬다. 빈 대학에서 미술사를 담당햇던 비크호프는 '추하다는 것은 무엇인가 ?'라는 전설적인 강의로 교수진 중 유일하게 클림트를 옹호했다. 하지만 파문은 결국 제국의회의 심의에 오르는 것으로 이어졌고 결국 클림트는 '외설적이며 과도한 성도착적 표현' 혐의로 기소되었다.
〈법학〉은 진리, 정의, 법을 상징하는 세 여신에게 유죄를 선고 받은 인물을 그렸다. 세 여신은 뱀으로 둘러싼 복수의 여신 에우메니데스로 묘사되었고, 그들이 내리는 형벌은 거대한 문어가 몸을 죄어오는 죽음의 포옹이다.
〈철학〉에서 클림트는 '무의식'에 대한 프로이드의 이론에서 착안한 섹슈얼리티를 다루고 있다. 클림트는 대담하게 섹슈얼리티의 의미를 억압에서 해방하는 힘에서 찾았기에 편협한 결정론을 수반하는 학문적 지식과는 뚜렷이 대조됐다. 의뢰인이 기대한 것은 학문의 위대함을 찬양하는 작품이었다. 하지만 클림트는 프로이드가 『꿈의 해석』의 서문에서 인용한 베르길리우스의 서사시 '아이네이스'의 "내가 만약 신들의 마음을 움직일 수 없다면 지옥에 떨어지리라"라는 시귀를 실천에 옮긴 듯 했다.
클림트는 소란한 반론에 위축되지 않고 자신의 작품세계를 추구했다. 격렬한 비판에 대한 유일한 반응은 한 장의 그림이었다. 그는 이 작품에 〈나의 평론가들에게〉라는 제목을 붙였으나 이후 〈금붕어〉라는 제목으로 전시되었다. 대중의 분노는 이 회화에서 정점에 다다랐다. 화면 앞쪽의 아름답고 즐거워 보이는 님프는 당치 않게도 그림을 보는 관객을 향해 엉덩이를 들이밀고 있다. 물의 정령은 관람자에게 프로이드의 '상징의 세계'와 비슷한 성적인 세계를 환기시킨다.
구스타브 클림트는 암울한 세기말주의에 빠져있던 19세기 말의 유럽, 그 한가운데 우뚝 선 화가였다. 그는 전위예술의 탄생을 상징하는 ‘비엔나 분리파’를 이끌며, 모호한 꿈을 환상의 관능적 분위기로 이미지화하여 인간의 내면세계를, 그리고 시대정신을 미술에 투영하고자 했다. 클림트의 「철학」,「의학」,「법학」은 그의 예술의 정점인 이른바 ‘금색시대’를 활짝 열어젖힌 ‘분리파 시대’의 획기적인 걸작들이다.
1892년, 오스트리아 교육부는 새로 지은 비엔나 대학 대강당의 천장화 시리즈를 기획했다. 그 구상안은 매우 고전적이었다. 중앙 패널화는 대 주제인 '어둠을 물리친 빛의 승리'에 대한 이미지를, 둘러싼 네 개의 화판에는 전통적 학문인 신학, 철학, 의학, 법학을 묘사하기로 하였다. 교육부 예술평의원회는 이 학부 회화 중 철학, 의학, 법학을 당시 장식화가로서 나름대로 명성을 얻고 있던 구스타브 클림트에게 의뢰하였다.
클림트의 이 세 작품 구상스케치는 1894년 여름부터 시작되었고, 전체 구성이 교육부에 제출된 것은 1896년이었다. 완성에 가까운 최초의 밑그림 ‘철학’이 공개된 것은 1898년 12월 비엔나 분리파 제2회 전시회였다. 잇달아 ‘의학’은 1901년, ‘법학’은 1902년에 공개되었다. 학부 그림 세 점이 나란히 전시된 것은 1903년 빈 분리파의 클림트 특별전에서다. 세 작품 모두 최종 완성은 1907년이다.
천장화 시리즈는 ‘진리의 명정’과 ‘학문의 권위’, 요컨대 그것은 시대를 초월하여 높이 평가되는 아폴론적인 이성의 힘과 질서를, 그것으로 인한 세계의 눈부신 발전상을 보여주기 위한 것이었다. 그러나 클림트는 교육부의 제작의도와는 달리, 적이 디오니소스적인 인간군상에 벌거벗은 진실을 담은 ‘혼돈의 세계’를 퍼즐로 내놓았다. 더욱 이 회화들은 세밀한 장식성과 여성성, 파격적인 관능미로 묘사되어 당시 비엔나의 지식층과 권력층, 가톨릭 종교계에 엄청난 충격을 던졌다.
그러나 놀랄일은 클림트의 천장화는 철회되어야 한다는 거센 비난과 논란 속에서 「철학」이 1900년 파리의 만국박람회에 출품되어 그랑프리를 받은 것이다. 또 당시 미술비평가 루트비히 히베지는 "클림트의 회화「철학」은 … 의문을 갖는 철학적 정신에 그 비밀을 알려주는 들끓는 우주를 상징한 것"이라 평했다. 동시대 상징주의 문학을 탄생시킨 헤르만 바르도 “위대한 예술은 필연적으로 엘리트의 소명, … 근대 위대한 미술가가 예술에 무지한 속물들과 맞서 싸우는 좀 더 넓은 의미의 투쟁 … ” 이라 언급하기도 했다.
비엔나 대학교수들은 전시회가 개막되는 동안 교육부에 천장화 제작 의뢰를 철회하라는 성명서를 제출한다. 그런 가운데 클림트의 학부 회화는 리터 폰 하이텔 교육부 장관의 지지을 받고, 또 교육부 예술평의회의 긍정적인 평가를 받는다. 하여, 이 회회들은 본래의 목적대로 대학 강당 천정화로 사용할 수는 없었지만, 1903년 11월, 국립 근대미술관에서 상설 전시되었다.
교육부와 천장화 제작 계약을 파기한 후 클림트는 절규한다. "나는 벗어나고 싶다. 다시 자유를 얻고 싶다. 나는 국가의 어떠한 지원도 거부한다. … 무엇보다 오스트리아라는 나라에서, 그리고 교육부에서, 예술이 다뤄지는 방식에 항거하고 싶다. 틈만 나면 진정한 예술과 진지한 예술가들이 공격의 대상이 된다. 보호받는 것은 늘 모자라는 것들이거나 거짓말하는 자들이다."
이후 클림트는 천장화 제작을 위한 계약금을 반환한 후 1906년, 10년 만에 빈 분리파와 결별하며 전위 그룹으로 거듭난다.
클림트의 학부 회회의 특징은 한마디로 어떤 틀과 형식에 전혀 얽매여 있지 않다. 누구나 아는 상징을 소재로 삼지 않았고, 위대한 진리에 대한 찬양이나 역사적 사건을 나열하는 것에서도 벗어나 있다. 그는 사람이 밖으로 드러내기를 극구 꺼리는 ‘벌거벗은 진실’을 최대의 과제로 삼았던 것이다. 이 작품 제작 시기에 그가 남긴 각종 스케치와 수십 장 세부 드로잉 습작에는 대부분 인간집단의 ‘진실’에 대한 추구와 비유가 제시되어 있다. 그는 "진실은 정열이며 진실을 말하는 것은 빛처럼 타오르는 것”이라며, 그 진실을 불꽃 이미지로 형상화하기도 하였다.
인간의 속성을 훤히 꿰뚫어 본 천재 화가 클림트는 위 학부회화 세 작품에 인간의 삶 속에 투영되는 근원적인 고통과 불안, 연민을 신비로운 회화언어로 풀어놓았다. 그뿐 아니다. 그는 유럽의 산업혁명, 프랑스의 시민 대혁명을 계기로 19세기말의 급속한 정치적인 변화와 새로운 지배계급으로 성장한 부르주아지 등으로 파생된 총체적인 무질서와 부조리, 빈부의 격차, 인간의 탐욕 등, 더할 나위 없이 혼란스럽고 퇴폐적인 사회상을 적나라하게 고발하였다. 이를테면 고전적인 숭고한 理想 저 너머, 물욕과 권력에 사로잡혀 공포 분위기마저 자아내는 기존 세력의 막강한 횡포를 통렬히 비판하고 희롱하였던 것이다.
“의학”의 부분그림으로 에로틱한 복수의 여신 “히게이아”이다. 히게이아가 뱀에게 ‘망각의 강물 Lethe’을 마시게 하는 장면.
망각의 강은 그리스 신화에 등장하는 저승 Hades에 있는 강으로 강물을 마시면 생전의 모든 것을 망각하게 된다.
얼마나 안타까운가! 이 그림이 불태워졌다니...
클림트의 우의화
20세기초 10년간 클림트는 특히 <유딧> <금붕어> <물뱀> <희망> 등 많은 우의화 걸작들을 완성했다.
그는 이러한 작품들에서 학생 시절부터 탐구했던 주제들을 가장 성공적으로 정의한다.
예를들어 <금붕어> 에서 여성의 모습은 더욱 관능적이 되고, <유딧Ⅰ> 과 <유딧 Ⅱ> 에서는 매혹적이고 구속을 거부하는 클림트적 ‘팜 파탈’의 유형이 구현된다.
3차원 장식에 대한 취향과 비잔틴 양식에 견줄만한 정교한 회화적 표현력은 <물뱀> 같은 신비로운 작품에서 정점에 이르렀다.
Goldfish. 1901-1902
Hope I. 1903
WaterSerpents I.
WaterSerpents II
1904년 드레스덴 살롱에서 클림트의 <금붕어> 는 당국의 매우 강한 반응을 불러일으켰는데, 작센 왕자의 눈에 띠어 클림트가 처벌 받는 것을 우려한 당국은 결국 전시를 취소하라고 요구했다. 화가 난 클림트는 대중 앞에 풍만한 엉덩이를 내보이며 목욕하는 여자의 포즈는 충분히 감동적이라며 작품의 제목을 <나의 비방자들에게> 로 바꾸려 했으나 다행히도 친구들이 이를 만류했다.
클림트는 <은빛 물고기> 를 시작으로 5년 전 시작했던 주제를 재개하여, 호수 깊숙이 사람들을 이끌어 영혼을 낚아채 가는 물의 ‘원소 (元素) 정령’을 표현했다. 반은 물고기이며 반은 여성인 환상 속 존재로, 노래로 선원들을 홀려 바위로 던져버리는 힘이 있었던 사이렌의 이미지는 무기력하고 악마 같은 여성성이라는 개념을 표현하기에 아주 적합했다. 붉은 머리칼의 아름다운 소녀들은 비웃는 듯한 시선으로 빤히 바라보며, 유연한 몸은 물 속에서 움직이고 머리칼은 구불거리며 매혹적인 아라베스크를 만든다.
여성과 자연은 인간과 동물 사이에서 계속 이어지는 은유의 개념 속에서 만난다. 유혹적이며 창백하고 유연한 사지는 부드러운 조류의 소용돌이를 따라 움직이는데, 너무 유려하고 선정적이어서 생물과 무생물, 동물과 식물, 하늘과 물의 경계를 허물어 버린다. 세로로 긴 직사각형 형태는 클림트를 비롯한 여러 상징주의 화가들이 편애했던 일본의 수직적 화풍을 연상시키며, 인간의 육체, 바다 속 동물, 머리카락, 식물들이 조류를 타고 위로 올라가는 느낌을 만들어낸다. 이미지는 상징적인 동시에 몽환적이며 매우 관능적이다.
클림트는 물의 모티프를 자주 사용했으며 『베르 사크룸』을 위한 아름다운 삽화 <물고기의 피> (1898년) 에서 처럼 물의 요정이나 인어 같은 주제를 여러 번 사용했는데, 이 작품에서는 물고기의 핏줄기가 상아질 몸체의 요동치는 무리를 생성해내는 듯하다.
<물뱀 Ⅰ> (1904~1907) 에서 클림트는 인간의 형태를 섬세하게 미세화한 식물 모티프로 바꾸어 <금붕어>에 등장했던 아찔한 미녀를 다시 등장시킨다. 오래된 화려한 비단에서 잘라낸 것 같은 인물들은 장식적인 비늘과 꽃 같은 촉수, 그리고 황금색의 잔가지로 만들어진 융단에서 미끄러지듯 주변 환경과 어우러진다. 같은 시기의 <물뱀 Ⅱ> 에서도 직사각형 틀이 사용되었지만 구성은 수평적이다. 젊은 여인들의 몸은 마치 알록달록한 꽃의 바다를 떠다니는 해초처럼 겹쳐지며 자유롭게 미끄러진다.
1920년대 프로이트가 ‘쾌락의 원칙’이라 했던 것에 대한 무조건적인 복종 원칙이 지배하는 이 심해의 세계에서는 이상하게도 유동적이지만 모든 것이 꽉 차 있다. 무게감이 거의 없이 공간을 부유하는 육체들은 종종 죽은 자의 영혼이나 정령을 나타낸다. 사랑과 죽음, 에로스와 타나토스, 생성과 파괴 등 양 극단은 서로 맞닿는다.
<흐르는 물> (1898) 에서 흐름에 이끌려 간 아름다운 소녀들, <철학> (1899~1907) 에서 절망적 영혼을 가진 인간의 무리, <죽음의 행렬> (1903) 의 해골 같은 영혼의 행렬이 바로 그런 경우다. 여기서 또 다시, 매력적인 여성의 이미지에는 상징적인 부조화, 그리고 언제나 새로운 의미를 제안할 정확한 선택의 장소를 인간의 신체 중에서 찾아내는 양면적 알레고리가 부여된다.
<희망 Ⅰ> 역시 많은 논란을 가져온 우의화이다. 이 작품에서 클림트는 두 가지 목표를 달성한다. 하나는 예술사에서 통상적으로 다루지 않은 주제인 임신을 표현하는 것이고, 또 하나는 임신이라는 사건을 어머니의 뱃속에서 보호받는 신생아를 노리는 위험에 대한 은유로 만드는 것이다. 수치심 없이 드러낸 젊은 어머니의 모습은 당시 사회에 큰 충격을 주었다. 1903년 클림트가 이 작품을 개인전에 전시하려는 것을 교육부 장관 폰 하르텔이 만류할 정도였다. 작품을 소장했던 분리주의의 일원 프리츠 베른도르퍼는 문짝을 두 개 달아 노골적인 시선으로부터 작품을 보호해야 했다.
다음은 예술 평론가 루트비히 헤베시의 묘사이다. “그날 저녁, 우리는 오랫동안 베른도르퍼가 수집한 작품들을 감상했다. 그 중 문 두 개가 굳게 잠겨 있는 커다란 회화가 있었다. 바로 유명한 동시에 굉장한 비난을 받은 클림트의 <희망 Ⅰ> 이었는데, 상당히 배가 부른 젊은 임신부를 표현한 것으로, 화가는 베일 한 장 없이 여인을 그대로 드러내어 놓았다. 클림트의 걸작 중 하나였다. 이 작품은 고위 당국의 금지로 2년 전 클림트의 개인전에 전시되지 못했다. 현재는 베른도르퍼 가(家)의 개인 집무실에 소장되어 있다.”
극도로 사실적으로 표현된 누드와 앙소르 화풍의 표현주의로 드러나는 적대적이고 일그러진 일련의 얼굴들이라는, 상반되는 힘의 새로운 형상화가 만들어내는 대립에는 클림트가 현실적 이미지에서 이상적 상징물들을 구분하기 위해 주로 사용했던 방식이 반영되어 있다. 마치 나선형 관처럼 구불거리는 모델의 형태가 주는 움직임은 여성의 옆모습에서 더욱 돋보이고, 이는 작품 구성에 우아하고 장식적인 분위기를 부여한다.
그리고 이런 분위기는 작품을 둘러싼 알록달록한 원판으로 연결된 섬세한 금빛 나선 형태와 삼각형의 톱니 모양으로 더욱 섬세해진 장식적 요소들로 인해 (상징적 가치 면에서도) 한층 더 강조된다. 기하학적인 도형들을 겹쳐놓는 기법은 클림트의 많은 작품들을 특징짓는 요소다.
이런 효과는 같은 주제를 다룬 두 번째 작업 <희망 Ⅱ> (1907~1908) 에서 더욱 극대화된다. 이 작품에서는 내용의 활력은 줄었으나 형식적 응집력은 더해졌다. 자세가 바뀐 여성의 시선은 더 이상 관람객이 아닌 아래를 향해 있다. 태어날 아기의 운명을 인식하며 자신이 기다리는 것에 시선을 집중하는 것이다.
<키스> 는 이론의 여지 없이 이 시기의 가장 유명한 작품이다. 풍부한 금장식은 추상적 특징으로 작품의 구성요소를 비물질화하는 가운데, 사랑의 환희 속에 결합한 연인의 얼굴이 표현됐다. 남성적인 요소들 (어두운 사각형)과 여성적 요소들 (나선형과 다색 원형들)아 긴 고치 형태 안에 모여 있으며, 하나가 된 두 사람의 몸은 무한한 아름다움을 보여준다.
클림트는 이 작품에서 여성과 남성 세계의 완전한 융화를 표현했다. 남자 외투의 작은 사각형 무늬들과 여자 외투의 원형 무늬들이 서로 병치되어 뚜렷한 대립을 이루나, 두 연인 간에 만들어진 조화는 두 사람의 몸을 단단하게 묶어주는 ‘종’ 형태 안에서 강조된다. 문학적으로 말하자면 인생의 두 가지 근본 원리를 품고 있는 고치 형태는 <베토벤 프리즈> 의 마지막 주제를 떠올리게 한다.
<키스>에서 여자는 남자의 발치에 무릎을 꿇고 있다. (이 모습을 표현하기 위해 클림트는 남자의 몸 아래쪽을 모호한 상태로 남겨두었다.) 남자의 외투자락은 작품의 배경인 꽃무늬 양탄자에 닿아 있다. 남자는 젊은 여인을 팔로 부등켜 안음으로서 자신의 힘을 표현하고 있으며, 그의 얼굴이 가려져 있어 우리의 시선은 젊음의 광채를 내뿜는 여인의 얼굴로 향한다. 옷 아래 부분까지 펼쳐진 금색 삼각형들은 남성적이고 정적인 힘의 체액을 뽑아내고 그의 몸을 태양빛으로 번쩍이게 해주는 생명의 근원과도 같다.
클림트의 작품에서 자주 등장하는 주제인 연인에의 축복은 종종 이들을 짓누르는 외부세계로부터의 위협과 관련된다. <사랑> (1895)에서도 역시 그러하다. 클림트가 청년 시절 그린 이 작품에서는 인상을 쓰고 있는 불길한 가면이 두 여인을 감시하고 있다. 반면 <스토클레 프리즈> (1905~1909) 를 구성하는 <충만> 에서는 <키스>에서처럼 두 연인이 어두운 존재의 끝없는 위협으로부터 보호받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이상적인 순수로의 전이를 의미하는 금의 강렬한 반짝임으로 이들의 육체적 결합은 영적인 것이 된다. 결국 관능은 보통 우리가 생각하는 이상적인 가치가 되며, 이것은 클림트의 작품의 바탕을 이룬다.
같은 주제를 강렬하며 낭만적으로 다룬 클링어의 작품, 혹은 극적이고 신비로운 뭉크의 작품과는 반대로, 클림트의 <키스> 는 연인들의 관능적이고 강한 감정적인 면을 강조하고 이들의 결합에서 나오는 생명의 힘을 부각시킨다. 이런 시각에서 볼 때 이 작품의 선정적인 관능성은 <다나에> (1907~1908) 와 가깝다.
클림트는 에로스의 표현으로 쾌락과 금지된 사랑까지도 자주 표현했다. 에로스에 대한 집착이 처음 나타난 작품은 <사포> (1888~1889)이다. <사포>는 클림트가 아직 역사적 주제를 다루던 시기의 작품이다. 그리고 이 주제는 <물뱀 Ⅰ> 과 <물뱀 Ⅱ> 에서 약간의 암시를 보인 뒤 1917년 <여자 친구들> 에서 다시 등장한다.
역사적 주제를 다룬 또 다른 작품 <레다> (1917, 소실) 에서는 제우스가 백조의 모습을 하고 여성 앞에 등장한다. <다나에> 에서는 유명한 선조들, 특히 도덕군자들의 편견에서 벗어나 예술적 자유를 보여주었던 크레지오(1530)와 티치아노(1545)의 형식으로 회귀한 듯 보인다.
클림트는 아르고스의 딸이자 페르세우스의 어머니이며, 그녀를 소유하기 위해 황금빛 비로 변신한 제우스의 연인 다나에를 잠 속에 빠져 있는 무의식적인 모습으로 표현했다. 이로써 그녀의 순결한 관능을 표현하고 그녀를 우주적 비옥함의 은유로 만들었다. 우의적 작품으로는 처음으로 클림트는 수직 형태를 포기하고 화려한 금빛 무늬로 장식한 동양풍의 베일이 살짝 드리운 여체의 분홍빛 곡선을 강조하면서 주제를 화면 중앙에 집중시켰다.
Danae
왼쪽 아랫 부분에는 금색 원형들 사이에 남성성을 상징하는 검은 사각형이 있다. 클림트는 항상 남성성의 상징으로 사각형을 사용했다. 구성이 주로 둥글고 모난 부분이 없다는 사실은 클림트가 이 작품에서 완전한 관능성의 영역에 도달했음을 보여주는 동시에 그의 작품에서 자주 등장하던 대립성이 전혀 남아 있지 않음을 상기시킨다. 태아와 같은 자세의 몸과 잠든 얼굴의 순결함은 어른과 어린이의 충동이 서로 동화되었음을 보여주며, 양면적인 성적 성향을 자궁으로 회귀하는 유토피아 안에서 화합한다.
이 작품은 1909년 에곤 실레의 유명한 드로잉에 영감을 주었는데, 실레의 작품에서는 다나에의 몸의 위치가 반대로 표현되었다. 한편, 클림트는 1917년 재미있는 거울놀이처럼 이 작품을 <레다> 의 출발점으로 삼는다.
Judith and the Head of Holofernes. 1901. Oil on canvas. 84 x 42 cm. The Österreichische Galerie Belvedere, Vienna, Austria. 오스트리아 비엔나 벨베데르궁 미술관
유디트는 이스라엘의 애국 여걸입니다. 구약시대 앗시리아의 군대가 이스라엘의 한 도시를 에워 쌌는데 당시 앗시리아군의 장군은 명장 홀로페르네느스였습니다. 이스라엘 사람들은 앗시리아군에 대한 저항을 하였으나 마침내 항복할만한 처지에 놓였습니다. 이때! 이스라엘을 구할 여장이 나타났으니 이가 바로 유디트였습니다.
매우 부유하고 아름다운 미망인이였던 유디트는 하녀 한 사람과 함께 홀로페르네스에게 이스라엘인을 굴복시킬수 있는 계책을 알려주겠다며 적진으로 위장 투항하게 됩니다. 그럴듯한 이야기에 기분이 좋은 홀로페르네스는 여흥을 베풀기위해 술을 마시고 거하게 취해 주위 사람들을 모두 물러나게 하였습니다.
어떤 남자라도 그녀에게 끌리지 않을 수 없을 만치 매우 아름답고 매혹적으로 치장한 유디트를 품고자 하는 욕망은 홀로페르네스에게도 어김없이 발동하였던 것입니다. 이때를 놓칠새라 유디트는 술취한 홀로페르네스의 칼을 뽑아 그의 목을 베어 도망갔습니다. 다음날 아침 목이 잘린 홀로페르네스를 보고는 앗시리아 군대는 혼비백산하여 퇴각하고 맙니다.
클림트가 사랑한 요염한 여성상의 대표 인물. 화가가 자신의 '황금 시기'를 열어젖힌 1901년작이다.
연인을 파멸과 죽음으로 이끄는 팜므파탈의 고혹적 이미지가 드러나 있다. 살짝 들어올린 얼굴, 반쯤 감긴 유혹의 눈길, 주춤하게 벌어진 입술, 풀어헤쳐 가슴이 드러난 옷섶 등이 팜므파탈의 전형을 보여준다. 한 평론가는 이 작품을 “낡은 보석 속으로 시간을 거슬러 올라간 듯 응축된 사악함”이라 표현했다.
이 역시 황금색을 사용한 작품으로, 액자에는 '유딧과 홀로페르네스' 라고 독일어로 새겨져 있다. 이 그림의 금빛액자 및 바탕의 장식을 비롯하여 유디트의 목의 장식, 의복 장식은 금빛 시대를 예고한다. 이 작품은 8년 뒤인 1909년 <유디트 Ⅱ>와 나란히 유디트를 주제로 그린 '키스'만큼이나 잘 알려진 클림트의 대표적인 작품이다. 클림트의 요부상을 가장 잘 대표하는 그림은 뭐니뭐니 해도 '유디트' 연작이다.
홀로페르네스는 구약 성서 외전(外典)의 유디스서(書)(Book of Judith)에 나오는 Nebuchadnezzar왕을 섬긴 장군으로서 이 그림의 주인공 유디트 Judith에게 목이 잘려 살해되었다.
죽음과 성, 에로스와 타나토스의 관계는 클림트와 프로이드뿐만 아니라 당시 유럽 전체를 사로잡았던 주제였다. 슈트라우스의 오페라에 등장하는 클리템네스트라의 피에 젖은 욕망의 이야기는 대중을 오싹한 전율로 사로잡았다
〈 유딧 1 (Judith and Holopherne) 〉과 8년 뒤 제작한 〈 유딧2 〉는 클림트의 전형적인 팜 파탈을 한층 심화한 것이다. 그의 유딧은 역사의 영웅이 아니라, 당시 여성의 전형이었다. 그것은 유행하고 있던 개목걸이 모양의 비싼 장식구를 묘사한 점에서도 잘 드러난다.
주커칸들이 지적하듯 팜 파탈의 그림을 통해 클림트는 그레타 가르보와 마렌트 디트리히와 같은 여성상을, 그 여배우들과 '요부'라는 언어 자체가 이 세상에 생겨나기 훨씬 이전에 창출해냈다. 거만하고 완고한, 그러나 동시에 신비롭고도 유혹적인 팜 파탈은 보는 사람 (남성)을 사로잡는 마력이 있다. 두 그림 모두 그림에 성상과 같은 효과를 주는 금테를 두른 액자와 뗄 수 없는 관계를 맺고 있다.
〈 유딧1 〉의 액자는 귀금속 세공사였던 동생 게오르케의 작품이다. 그리고 '유딧' 연작에서 클림트는 라벤나 여행의 경험을 통해 알게 된 비잔틴 양식의 영향도 보여준다. 잘 정리된 화장을 한 얼굴의 묘사와 평면적인 장식 모양이 주는 의도적인 대조가 이 회화의 특징이다. 이러한 대조는 포토몽타주와 같은 효과를 주며 유딧의 매력도 드러낸다. 이 기법을 앞서 사용한 예로는 반 아이크 형제가 그린 〈헨트 제단화〉의 인물상을 들 수 있다.
유딧의 테마를 통해 클림트는 여성에게 심판받는 남성, 죽음으로 속죄해야 하는 남성이라는 상징을 만들어냈다. 유딧은 고국을 구하기 위해 홀로페르네스 장군을 유혹해 목을 밴다. 구약성서의 이 영웅은 흔히 용기와 결단력을 갖추고 신념에 몸을 바친 여성의 완벽한 전형으로 알려졌다. 그런데 이 작품에서는 성서의 등장인물이 팜 파탈이라는 친숙한 이미지를 통해 에로스와 죽음의 이미지와 결합한다.
클림트의 유딧은 유일하게 그의 도발적인 작품에 관용을 보였던 빈의 유태인 부르주아 계급마저 등 돌리게 해버렸다. 클림트는 마침내 종교적 금기까지 손을 댄 것이다. 반쯤 감은 눈과 살짝 벌어진 입술로 오르가즘에 이른 듯한 유딧의 모습을 본 유대인들은 자신의 눈을 의심했다. 원래의 유딧은 관능적인 면모와는 거리가 멀었고 하늘이 자신에게 부과한 두려운 사명인 아시리아의 사령관 홀로페르네스의 목을 베는 중요한 임무를 완수한 여걸이었기 때문이다.
[출처] G. Klimt (클림트) - Judith and Holopherne (유딧1 )|작성자 엽전
보티첼리, 티치아노, 카라바지오와 아르테미시아의 차이는 단 하나 아르테미시아가 여성 화가였다는 것이다. 동서양을 막론하고 예술에 있어 여성이라는 대상은 그야말로 꽃의 역할에 불과했음을 알 수 있다. 그들은 관음증의 대상이었거나 아니면 남성을 위한 뮤즈가 되어 자신들의 창조적 재능을 소진하는 것만으로 그 역할이 한정되어 있었다. 아르테미시아는 페미니스트들에 의해 재발견된 화가였다. 그녀는 여성에게 제한된 역할을 뛰어넘은 최초의 화가였기 때문이다. 그렇기 때문에 그녀의 작품 속에 등장하는 유디트는 위험천만한 적진 한 가운데에서 능동적이고 진취적인 여성의 이미지로 그려지고 있다. 하지만 여기에는 아르테미시아의 뼈아픈 과거가 숨어 있다.
그녀는 19세 때 아버지의 친구이자 동료화가였던 아고스티노 타시에게 강간을 당하고 그 일로 인해 법정에 섰던 경험이 있다. 그러나 7개월이나 계속된 재판에서 상대 남자인 타시는 자신의 혐의를 부인하면서 오히려 아르메시아를 음란한 여자로 매도한다. 결국 아르테미시아는 법정에서 자신의 순결을 증명할 것을 요구받았고, 고문까지 받아야 했다. 그녀가 살았던 시대 아르테미시아가 맘껏 주체적인 여성으로서, 자신을 강간한 남자에 대한 복수심을 발현시킬 수 있는 소재는 유디트였던 것이다.
클림트와 비슷한 시기를 살았던 몇몇 여인들의 삶을 살펴보는 것은 그의 그림과 직접적으로는 별상관없어 보이기는 하지만
그가 화폭에 담은 젠더(gender)로서의 여성들을 이해하는데는 도움이 될 것 같다.
앞에서도 언급하고 있는 알마 말러(Alma Mahler, 1879 - 1964)는 오스트리아 비엔나에서 태어났다.
그녀는 타고난 재능을 소유한 피아니스트이자 작곡가였지만 동시에 남성들의 꿈과 악몽을 동시에 구현하는 여인이었다.
그녀는 넘치는 재능이 있었지만 구스타프 말러의 아내, 발터 그로피우스의 아내, 작가 프란츠 베르펠의 아내로 일생을 보냈다.
어떤 면에서 그녀는 그래도 비교적 행복한 편에 속했다.
스페인에서 태어난 마리아 레하라가(Maria Lejarraga, 1874 - 1974)는 20세기 초 유명한 극작가인 그레고리오 마르띠네스 씨에라의 아내로 알려져 있다.
그러나 유명한 극작가인 그녀의 남편은 단 한 줄의 희곡도 쓴 적이 없었다. 그녀는 자신의 이름으로 작품을 발표할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
(훗날 그녀는 사회주의자가 되어 극작가, 수필가, 여성운동가, 사회주의 정당의 국회의원이 되어 망명생활을 하게 되고 자신의 이름을 되찾는다).
그리고 너무나 잘 알려진 오귀스트 로댕의 연인이었던 까미유 끌로델(Camille Claudel, 1864 - 1943)이 있다.
앞서 아놀드 하우저와 이주헌은 예술가들이 스스로를 창부와 동일시함으로써 부르주아 사회를 향해 창부라고 절규했다지만, 단언컨대 이때 말하는 예술가들 속에 여성은 없었다. 클림트의 작품 속에 등장하고 있는 여인들의 시선은 몽환적인 아름다움과 마네의 작품 <올랭피아>(1865년)에 등장하는 창부의 직설적인 시선을 가지고 있다. 그녀들은 다소곳한 자세로 시선을 내리깔지도 않았고, 틀림없이 남성들이 더 많았을 관객들의 시선을 정면으로 받는다.
Gustav Klimt,
Adam & Eve
19세기는 여성들에게 있어서는 아직 페미니즘의 시기는 아니었다.
도리어 이 무렵의 여성들은 남성들에 대한 절대적(가부장적, 경제적, 사회적, 정치적, 문화적) 종속의 시기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시기는 또한 페미니즘이 그 탄생을 알리는 시기이기도 했다.
이 무렵의 여성들은 실질적으로는 여전히 남성적인, 가부장적인 사회구조에 그 어느 때보다 철저하게 종속되어 있는 시기였음에도
이 무렵의 남성들에게 '페미니즘'의 등장은 엄청난 공포이자 스트레스로 작용했다.
19세기에 여성이 하는 일은 그것이 어떤 것(말이나 행동 모두)이든 남성들에게는 공포가 되어 나타났다.
클림트의 <아담과 이브>에서 남성인 아담은 흑빛으로 질려 있고, 생기발랄한 이브 뒤에 숨어 있다.
아담이 마치 죽은 것처럼 눈을 감고 있는 반면에 이브는 마치 볼테면 맘껏 보라는 듯한 눈빛으로 정면을 응시하고 있다.
많은 평자들이 클림트의 작품을 비롯한 당대의 여러 예술작품들을 통해 당시 여성운동이 얼마나 커다란 공포를 불러 일으켰는지,
당시의 여성들이 아내이자 어머니로서의 본연의 의무를 방기하고 있는 듯한 느낌을 세상에 전하기 위해 얼마나 체계적으로 노력했는지를 살펴볼 수 있는 대목이다.
일순간이나마 시간을 내서 자아를 주장하는 여성, 완전히 헌신하지 않는 여성은 이미 위험하고, 죄를 저지른 이브이다.
물론 당시 실제 생활 속의 남편들은 예술작품에서 묘사되고 있는 것보다는 확실히 적은 상처를 받았을 터이지만 말이다.
공포는 바로 문학이나 미술과 같은 예술에도 반영되어 19세기의 문학 속에는 종종 경제적이던 문화적이던 허울만 남은 가정, 외도, 알콜 중독, 결핵,
온갖 사회악에 무풍지대로 노출된 가정을 등장시킨다. 그들은 바람 피우는 남편이나 알콜 중독에 걸린 남편, 결핵에 걸리거나 병약한 아이들을 수도 없이 쏟아냈다.
헨리크 입센은 '아내이고 어머니이기 이전에 한 사람의 인간으로서 살겠다'라는 인류 역사상 전무후무한 새로운 인간형을 탄생시키니
그가 바로 『인형의 집』(1879년)의 '노라'였다 (물론 입센이 반드시 여성해방을 염두에 두었다고만 해석하는 것에는 무리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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Goldfish (금붕어) 1901-1902
Goldfish. 1901-1902. 181 x 66.5 cm. Oil and gold on canvas. Swiss Institute for Art Research, Zurich, Switzerland
이 그림의 몽환적이고 도발적인 자세는 앞에서 언급한 빈 대학 천장화의 논쟁에 대해 클림트가 보여준 일종의 대응, 혹은 대답차원으로 간주되는 작품이다. 1904년 드레스덴 살롱에서 클림트의 <금붕어> 는 당국의 매우 강한 반응을 불러일으켰는데, 작센 왕자의 눈에 띠어 클림트가 처벌 받는 것을 우려한 당국은 결국 전시를 취소하라고 요구했다. 화가 난 클림트는 대중 앞에 풍만한 엉덩이를 내보이며 목욕하는 여자의 포즈는 충분히 감동적이라며 작품의 제목을 <나의 비방자들에게> 로 바꾸려 했으나 다행히도 친구들이 이를 만류했다.
클림트는 기하학적인 무늬로 물 속을 표현했으며 나체의 세 여인은 물 속에 있는 '금붕어'들과 같이 둥둥 떠다니고 있습니다. 하지만 아마 비평가들에게 가장 모욕감을 주었을 법한 것은 맨 앞의, 조롱의 표정을 담은 여성이 자신의 엉덩이를 보는 이를 향하여 내밀고 있습니다. 아마 모욕감을 느끼라고 의도한 것일 수도 있습니다. 그들에게는 그런 것이 모욕감으로밖에 보이지 않을 테니까요.
사실 언뜻 보면 모두가 되게 비웃음을 흘리고 있고 심지어 금붕어마저도 비웃는 것처럼 보입니다. 하지만 순수하게 그의 예술을 받아들이는 사람들이라면 클림트의 예술세계에 또다시 강렬한 매력을 느꼈을 것입니다. 후에 이는 프로이트의 '내제된 인간의 욕망'을 보여주는 작품으로 평가하기도 했습니다.
엉덩이를 통해 조롱의 뜻을 전한 클림트의 <금붕어 Goldfish>. 자신의 작품을 외설적이라 비난하는 비평가들을 향해 에로틱한 여성의 풍만한 엉덩이를 던져줌으로써 그 비난을 "반사"하며 조소하고 있습니다. (생략)
1902년 5월에 요제프 호프만(1870-1956)과 콜로만 모저(1868-1918)는 빈 공방을 설립하였다.
윌리엄 모리스의 미술과 공예운동에서 영향을 받아 설립된 빈 공방은 재료의 존중, 구조의 간소화,
기능성을 기본 조건으로 삼아 분리파의 이념에 부합하는 공예품의 생산과 기술자의 양성에 노력하였다.
가을에 빈 분리파는 그때까지 열린 클림트의 전시회 중 가장 대규모인 전시회를 개최하였고,
이 전시회는 분리파가 막스 클링거의 베토벤 상에 경의를 표하기 위해 열었는데,
이때 클림트는 베토벤 프리즈를 제작하였다.(프리즈란 벽의 띄 같은 것을 말한다.)
이 그림은 열광과 반감을 동시에 불러일으켰다.
<베토벤 프리즈>는 전시회가 끝난 후 개인 수집가에게 매매되었다. (현재에는 다시 분리파 전시관에 있다)
또한 이 1902년의 분리파 전시회에 빈 대학 대강당을 위한 세가지 "학부" 그림이 최초로 다같이 전시회에 전시되었다.
당연히 그 그림들이 현대 미술관에 전시되야 할지 여부에 대한 논쟁이 벌어졌다.
플뢰게 자매는 11월에 카사 피콜라 건물로 이사했고, 이듬해 그곳에 패션-하우스를 열었는데,
그 가구와 장식은 빈 공방에서 맡아 제작하였다. 그리고 에밀리의 마지막 초상화를 제작하였다.
Beethoven frieze 1902
제14회 분리파전시실 내부, 1902년 당시모습.
오른쪽 벽 넘어로 막스 클링거의 베토벤 흉상이 보입니다.
분리파 전시관 지하 전시장, 비엔나 (현재)
빈 분리파 회원들
<베토벤 프리즈>는 클림트 미학을 이해하는 데 중요한 작품으로 인식되고 있습니다.
19세기 말에서 20세기 초에 미술계에 또다른 바람이 불었습니다. 그게 바로 다방면에 걸쳐서 미술작품을 만들자는 것. 즉 미술이면 딱 미술만 하는 게 아니라 종합예술을 하자는 주장을 펼쳤습니다. 영국에서는 윌리엄 모리스가 미술공예운동을 펼치면서 이 바람을 불러일으켰고 오스트리아에서는 구스타프 클림트가 빈 분리파를 창설하면서 오스트리아의 미술계에 새로운 바람을 불러일으켰습니다.
구스타프 클림트를 비롯한 빈 분리파 회원들은 단지 전시를 위한 미술작품만 만들게 아니라 전시를 위한 공간, 전시공간에서 들려줄 음악을 선곡하는 거까지 해야 한다는 주장을 펼쳤습니다. 그래서 이들은 종합적인 구성을 했습니다.
당시 유럽에서는 베토벤을 찬양하는 분위기가 번지고 있었다. 이유는 베토벤이 후원자와 관객들의 눈치를 전혀 보지 않고 오로지 영감이 떠오를 때에만 작곡하고, 자기가 음악에서 추구하고 싶었던 이념, 철학, 예술성을 마음껏 실험하고 추구했던 최초의 작곡가였으며, 음악계, 미술계에 많은 영감을 주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빈 분리파도 베토벤에게 헌정하는 작품을 내놓았습니다. 조각가 막스 클링거는 베토벤에게 경의를 표하기 위해 베토벤 흉상을 만들어 전시장 가운데에 설치했습니다.
클림트는 8년간 23회의 비엔나 분리파전을 이끌면서 일본 미술전, 인상파 미술전 등 훌륭한 외국작품들을 소개하여 비엔나를 문화적 고립으로부터 구출하고, 오스트리아에 새로운 예술의 씨를 뿌리는 데 기여했고, 이 영향은 다시 유럽 전역으로 파급되었습니다.
그 중에서도 1902년에 개최된 제14회 비엔나 분리파전은 분리파 사상 가장 중요한 전시로 기록됩니다. 21명의 예술가가 참여했고, 관람자의 수가 5만 8천 명으로 여태까지의 분리파전에서 가장 많은 숫자를 기록했습니다. 당시 한 전시회에 5만 8천 명이 다녀갔다는 것은 비엔나 분리파의 위상, 더 나아가서는 클림트의 위상이 어떠했는 지를 단적으로 말해 줍니다.
전시의 특징은 각 예술가가 순수한 동기에서 자신의 미학을 소개하는 것이었습니다. 전시장 내부 디자인은 요제프 호프만이 맡았습니다.
이 전시가 열린 분리파 건물 중앙 전시장에는 막스 클링거가 작곡가로서의 베토벤의 위대함을 나타낸 조각 <베토벤>이 놓여졌습니다. 이 중앙 전시장 양편 벽은 이 전시의 하이라이트인 클림트의 <베토벤 프리즈>로 장식되었다. 베토벤의 창조성을 기리는 것이 주제인 <베토벤 프리즈>는 추상적인 디자인이란 점에서, 디자인의 단순성이란 점에서, 그리고 응용미술의 극치를 나타냈다는 점에서 높이 평가받을 만했습니다.
예술이 사회를 바꿀 수 있다는 생각은 19세기 응용미술에서 잘 나타났고, 클림트를 중심으로 한 오스트리아의 응용미술은 이런 점에서 사회에 직접적으로 영향을 끼쳤습니다. 제14회 분리파전은 이런 맥락에서 보면 매우 의의 있는 전시였습니다.
클림트는 실재 인생에서 인간이 자신의 삶을 유지하는 능력을 은유적으로 나타내려고 했습니다.
이때 소개된 <베토벤 프리즈>는 전시가 끝나면 지워 없애기로 한 벽화였으므로 클림트는 싼 재료를 사용했습니다. 클림트는 격자로 된 나무 위에 바른 플래스터에 그리면서, 효과를 높이기 위해 주석 도금한 압정·거울조각·색유리 단추와 가짜 보석 등을 사용했습니다.
그러나 이 작품이 분리파전의 가장 기념비적 작품으로 인정되면서 이를 재현하고 복원하는 데 많은 어려움이 있었지만 오스트리아정부는 이 작품을 복원하기로 결정하였습니다. 1970년 오스트리아 정부가 구입하여 많은 경비와 시간을 들여 복원하고 1984년 ‘비엔나 1870-1930, 꿈과 실재 Vienna 1870-1930, Dream and Reality’란 전시를 통해 처음으로 소개했습니다.
또한 오스트리아 정부는 원작 크기의 복제화들을 제작하여 여러 전시회에 소개했으며 원화는 현재 분리파 전시관 지하 전시장에 있습니다.
클림트는 8년 동안 23회에 걸친 빈 분리파전을 이끌면서 일본화전, 인상파전 등 훌륭한 국외의 작품들을 소개하여 빈을 문화적 고립으로부터 구출하고, 오스트리아에 새로운 미술의 씨를 뿌리는 데 기여하며, 이 같은 영향이 유럽 전역으로 파급되었다. 그 중에서도 1902년에 개최된 제14회 빈 분리파전은 분리파 사상 가장 중요한 전시회로 기록되고 있다.
21명의 미술가가 참여하고, 관람자의 수가 5만8천 명으로 여태까지의 분리파전 가운데서 가장 많은 숫자를 기록했다. 한 전시회에 5만8천 명이나 다녀갔다는 것은 빈 분리파의 위상, 더 나아가서는 클림트의 위상이 어떠했는지를 단적으로 말해 보여준다. 전시회의 특징은 각 미술가가 순수한 동기에서 자신의 미학을 소개하는 것이었다. 전시장 내부 디자인은 요제프 호프만이 맡았다.
클림트의 '베토벤 프리즈'는 '나약한 인류가 예술과 사랑을 통해 구원을 얻는다'는 주제를 담고 있으며 화가인 클림트 뿐만 아니라 오스트리아에서 국보급 대접을 받는 그림이다.
1902년 14회 분리파 전시회 (the 14th Vienna Secessionist exhibition)를 위해 베토벤의 <심포니 9번>의 4악장을 주 테마로 하였다. 실제 전시장에는 구스타프 말러가 편곡하고 지휘한 베토벤의 제 9교향곡 4악장이 전시실에 울려 퍼지고, 중앙에 막스 클링거(Max Klinger)가 조각한 베토벤 상이 놓여있었다.
이 작품의 주제는 "예술과 사랑의 중재를 통한 가련한 인류의 구원, 행복을 희구하는 인류의 갈망과 적대적인 세력으로서의 괴물과 요부, 그리고 시와 예술속에서 행복의 갈망"이 채워지는 결말로 그림들이 구성돼 있는데, 클림트 특유의 장식성과 관능성이 매우 절제된 톤으로 세련되게 표현 된 작품으로 평가되는 작품으로 총 길이가 23미터나 되는 대작이다. 하지만 「베토벤 프리즈」는 혹평을 받았다. 특히, 「적대적인 힘」의 추악한 괴물들은 소수의 사람들을 매혹시켰을 뿐 대다수의 반감을 샀고, 그 때문에 전시회는 적자로 끝났다고 한다.
클림트는 이 벽화를 일시적인 작품으로 제작하였고, 전시회가 끝난뒤에는 철거할 작정이으므로 클림트는 싼 재료를 사용했었다. 당시 철거하기 직전 카를 라이닝하루스가 사들여 통째로 떼어네 패널로 만든 덕에 살아남을 수 있었다. 그 후 유대인 수집가에게 팔렸고, 독일이 오스트리아를 병합한 뒤 국가에 몰수되는 등 기구한 운명을 겪었고 전쟁이 끝난뒤에는 오스트리아 정부가 1970년에 구입하여 많은 경비와 시간을 들여 복원하고 1984년 ‘빈 1870-1930, 꿈과 실재’란 전시회를 기회로 83년만에 복원되었다고 한다. 원화는 현재 분리파 전시관 지하전시장에 있다. <베토벤 프리즈>는 클림트 미학을 이해하는 데 중요한 작품이다.
“토탈 아트”의 실현을 거의 완벽하게 달성한 분리파 최고의 전시회는 1902년의 ‘베토벤 전시회’였다. 맥스 클링거가 제작한 작곡가 베토벤의 조각상을 중심으로 구성된 이 전시회는 구스타프 말러의 베토벤 심포니 9번의 연주와 함께 새로운 미술개념의 웅대한 장을 열었다. 이 전시를 위해서 클림트는 쉴러의 ‘환희에 부치는 노래’ (베토벤이 심포니의 코러스 가사에 인용한)를 시각화한 대대적인 벽화를 제작했다.
세 패널 중 첫 패널에 등장하는 부유하는 여인들은 ‘행복의 열망’을 상징한다. 인간의 연약함을 의미하는 세 명의 누드 인물들은 ‘황금 기사’로부터 구원과 보호를 구한다. 이 황금 기사는 다음 패널에 등장하는 ‘적의 무리들’ (질병, 광기, 정욕, 문란한 성, ‘방종’ 등과 같은 부정적인 삶의 감정들)과 싸워야 한다. 하지만 오른쪽의 마지막 패널로 들어서면, 부정적이고 암울한 분위기는 희망과 행복의 시간들로 반전된다. ‘행복의 열망’은 악기를 들고 있는 인물이 읊조리는 ‘시’를 통하여 보답하고 ‘천사들의 합창’과 함께 이어서 ‘세상을 향한 입맞춤’ 에서는 벽화 내용의 클라이막스로 치닫는다.
원래 이 <베토벤 프리즈>는 전시만을 위해 준비된 것이기 때문에, 벽화들은 전시기간 동안 일시적인 설치를 위하여 설치되었다가 전시가 끝나는 대로 바로 폐기처분 될 운명이었다. 바로 그때 미술품 수집가 칼 레닝하우스가 이 벽으로부터 떨어져 나온 벽화들을 구입하였다. 하지만 이 작품은 다시 한번 운명의 소용돌이 속으로 빠지게 되고 결국 클림트의 영원한 예술동지인 에곤 쉴레의 노력으로 레더러 가족에게 모든 벽화들이 전임되었다.
당시 에곤 쉴레는 <베토벤 프리즈>야 말로 클림트의 가장 중요한 작품 중 하나로 생각했었기 때문에 그의 모든 노력을 쏟아 <베토벤 프리즈>를 살려냈다. 이후 이 작품은 오스트리아 국립 벨베데레 미술관의 소장품이 되었고 지금까지도 미술관의 관리를 받고 있는 것이다. 오늘날 벽화의 원작은 비엔나의 분리파 전당에 설치 되어 있다.
<베토벤 전시회>는 1902년 4월 15일부터 6월 27일까지 21명의 예술가들이 모여 이루어낸 새로운 예술개념에 대한 성공적인 결과물이었다. 제 14회 분리파 전시회는 전시 당시부터 현재에 이르기까지 토탈아트의 정신이 가장 완벽하게 반영된 하나의 예술 작품으로서 평가되고 있다.
전시 개막식 때 관람객들은 구스파트 말러가 편곡하고 지휘하는 베토벤 교향곡 9번 <합창> 중 4악장을 들으면서 관람을 했다고 합니다. 빈 분리파는 관람객들이 예술을 총체적으로 경험할 수 있도록 했어요.
이것은 독일의 작곡가 바그너의 종합예술작품. 즉 음악, 시, 무용을 하나로 뭉쳐서 창조한 정신을 이어받은 것이기도 했어요. 빈 분리파는 바그너의 정신을 이어받아 서로 다른 장르의 예술, 예술과 수공예 등을 구분짓거나 배척하지 않고 서로 조화를 이루어 하나의 작품을 구성했습니다.
클림트의 벽화에 등장한 테마는 바그너가 재해석한 베토벤의'합창'교향곡이다.
바그너는 1846년 당시만해도 난해한 곡으로 알려져 있던 '합창'을 1백50명 규모의 오케스트라로 편곡해 드레스덴에서 열린 자선음악회에서 연주했다. 그에게 베토벤은 영웅.순교자.구세주 같은 존재였다.
전체 길이 : 34.14m, 높이 : 2.15m 회벽 위에 카세인, 금색물감, 검은색 및 다색 분필, 그라피티, 다중매체(유리, 진주, 금, 치장벽토)
Casein, gold pigment, black and colored chalk, graphite, stucco and various materials (glass, mother of pearl, gold) on plaster
<베토벤 프리즈>는 베토벤의 교향곡 제9번 ‘합창’을 시각적으로 재현한 것이며 아르누보 상징주의의 걸작으로도 꼽히고 있습니다.
이 작품은 베토벤의 합창 교향곡에 대한 리하르트 바그너의 해석에 기초해 모두 다섯 부분으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벽화가 들려주는 이야기는 이러합니다.
Sickness(질병), Madness(광기), Wantonness(음란), and Intemperance(무절제)
이러한 것들로 인해 고통받고 있는 인간들이 결국은 예술을 통해서 이 모든 것을 극복하고 행복의 환희를 부를 수 있다는 것....
1. The Longing for Happiness 행복의 열망
고통받는 나약한 인류는 강한 인간에게 행복을 간청합니다.
그의 강력한 무기와 내면에 있는 연민과 야망이 행복을 쟁취하기 위한 투쟁으로 이끄는 힘이 됩니다.
베토벤 프리즈는 <행복의 열망>으로 시작합니다. 흐느적거리 듯이 날아가는 여인들이 인류의 염원과 열망으로 그려지고 있습니다.
나약한 인류의 고통, 고통받는 나약한 인류는 강하고 잘 무장된 영웅에게 행복을 간청한다는 의미의 작품입니다.
천사들이 음악으로 무장한 전사위에서 호위하며 하늘 가득 흐르고 있고, 영원한 인간을 상징하는 인간들이 이 강인한 전사 베토벤위에서 격려하고 있습니다.
기사는 내면의 강인함으로 황금 갑옷을 입고 강력한 무기를 들고 앞을 향해 나아갑니다.
이 기사앞에서 사람들은 힘없이 무릎을 꿇었습니다. 행복을 추구하고자 하는 열망으로 말입니다.
적대적 세상에 막혀 행복한 길로 나아가지 못하는 나약한 인간을 위해 예술옷을 입은 기사가 길을 만들어주길 원하고 있습니다.
고통받는 인간들이 행복을 가져다 줄 기사에게 간청하는 장면입니다.
[左] 인간의 <행복의 열망>을 묘사
[右] <나약한 인류의 고통>, <행복에 대한 열망을 간청> <강력한 무장> 등을 묘사했다.
제체시온 건물에서 빼놓을 수 없는 가장 중요했던 전시가 1902년의 분리파 전시였다. 제14회 분리파 전시회였던 당시의 전시에 독일의 조각가 막스 클링거의 베토벤 상을 전시하기로 되어있었다. 그것은 분리파 회원들을 크게 고무시켰다. 새로운 예술 운동을 펼칠 그들에게는 그들을 대표할만한 상징적인 인물이 필요로 하였다. 그럴 때 나타난 것이 바로 베토벤이었다.
물론 베토벤은 분리파를 알지도 못하고 이미 이전에 세상을 떠난 인물이었으며 또한 미술가가 아니라 음악가였다. 하지만 시대에 항거하고 새로운 예술 세계를 개척하였으며 세상에 홀로 우뚝 섰던 베토벤의 모습이야말로 분리파들의 정신 바로 그것이라고 생각하였다. 그리하여 클링거의 작품 베토벤 상이 전시된다는 것을 기회로 이번 전시는 분리파의 정신을 만천하에 천명하는 일대 사건을 만들려고 하였다.
그리하여 베토벤은 전시될 방의 바로 앞의 전실(前室)에 클림트는 베토벤을 기리는 또 하나의 작품을 만들기로 하였다. 그것이 바로 전실의 높은 벽 중 세 면을 가득 채우는 전대미문의 걸작 벽화 ‘베토벤 프리즈’다. 클림트는 베토벤의 교향곡 제9번 <합창>의 제4악장 중의 <환희의 송가> 부분을 벽화로 표현하였다. 즉 “환희여 아름다운 신의 빛이여 오 세상에 입맞춤을 주리라”라는 유명한 가사와 음악을 형상화하였다. 이것은 베토벤의 <합창> 교향곡에 대한 리하르트 바그너의 해석을 중심으로 클림트가 구성한 것이다. 모두 다섯 부분으로 이루어져 있다.
첫 부분은 ‘행복을 향한 동경’인데, 비상하기 시작하는 인간을 그리고 있다. 가운데의 큰 부분은 모두 희고 연한 부드러운 색으로 비어있는데, 그 위로 여자처럼 보이는 인간들이 마치 물속에서 행복을 느끼듯이 부드럽게 비상한다기보다는 내가 보기에는 부유(浮遊)한다.
두 번째 부분은 ‘약한 자의 고난’이다. 황금빛 갑옷과 큰 칼로 완전 무장을 한 기사가 서 있고 두 뒤에는 여인들이 있다. 기사의 앞에 허약하고 불쌍해 보이는 한 남녀 커플이 무릎을 꿇고 그에게 애원하고 있다. 그 뒤에 또 한 명의 여인이 손을 모으고 있다. 그리고 그 그림 뒤로는 역시 부유하는 사람들이 계속된다. 이 두 부분은 첫 번째 벽, 즉 방으로 들어가 왼편 벽의 그림이다.
세 번째 부분은 정면의 벽에 그려져 있는데, ‘적대적인 힘’이다. 거인 티포에우스가 마치 고릴라 같은 무서운 모습으로 그려져 있고, 그 왼편으로는 그의 딸인 세 명의 고르곤이 있다. 고르곤 뒤로는 인간이 가장 무서워하는 세 가지, 질병, 광기, 그리고 죽음을 상징하는 형상들이 보인다. 거인의 오른편으로는 아주 역겨운 세 명의 여자들이 각기 독특한 모습과 화려한 치장을 하고 있는데, 그것들은 각기 음탕, 음란, 방종을 뜻한다. 그리고 그 다음으로는 아주 많은 여자의 머리카락과 뱀들이 보이는데, 가운데에 있는 마르고 슬퍼하는 여인의 머리카락처럼 보인다. 그 많은 머리카락과 뱀들은 인간이 가진 끊임없는 슬픔을 나타내는 것이다. 이제 마지막 벽, 즉 오른편의 벽으로 넘어간다.
네 번째는 그림에는 다시 처음과 같은 부유하는 사람들이 나타나고 한 여인은 리라를 타고 있다. 이것은 음악을 뜻하는 것이다. 그리고 다음의 가운데 벽의 상당 부분은 바탕색만 있고 아무것도 없는 빈 공간으로 남겨져 있다. 여기서 클림트는 무슨 생각을 했을까? 그리고 우리에게 무슨 생각을 하라고 여기는 비워놓은 것일까?..... 다음으로는 모두 기쁨에 겨워하는 다섯 명의 여인들이 그려져 있는데, 그녀들은 예술을 상징하는 것이다. 쉴러의 시에 화답하는 여인들을 나타낸 것이다. 시와 미술과 음악이 다 나왔다. 예술만이 인간에게 진정한 기쁨을 줄 수 있다는 클림트의 철학을 보여주는 것이다.
이제 마지막 다섯 번째 부분이다. '세상을 향한 키스'로 해석된다. 보다 밝아지는 분위기로 바탕은 꽃이 만발한 풀밭이다. 먼저 그 위에서 많은 천사들이 합창을 부르고 있다. 그리고 그, 천사들 앞으로는 너무나 밝고 행복해 보이는 배경 중앙에 한 쌍의 남녀 커플이 꼭 껴안고 키스를 하고 있다. 남녀의 피부색이 다르다거나 여자가 남자의 어깨 속으로 쏙들어가 있다거나 하는 것들이 클림트의 다른 그림 <키스>의 특징을 그대로 보여준다. 그렇다면 <키스>의 해석조차도 베토벤에서 시작되어야 할 지 모른다는 과제를 던져준다. 어쨌거나 그 이야기는 담에 하기로 하고....
Excavations for the Klimt Room in the basement of Secession. 1985
정리해보자. 인간의 끊임없는 고통과 슬픔은 많은 것들로부터 나오고 또한 인간은 많은 유혹과 방해 속에서 살아간다. 하지만 결국 인간을 행복하게 하는 것은 시와 미술과 음악이다. 나약한 인간이지만 예술 속에서 우리는 진정한 기쁨을 누릴 수 있는 것이며 사랑하는 사람과 결합하게 된다.
1902년 분리파 전시회 때에 베토벤 상과 베토벤 프리즈가 처음 공개 되던 날, 당시 빈 슈타츠오퍼의 음악감독이었던 구스타프 말러는 빈 국립 오페라 오케스트라의 금관악기 주자 십여 명을 동반하여 이곳에 나타난다. 그들은 모두 이 좁은 방에 섰다. 그리고 말러는 이 금관 앙상블을 위하여 자신이 직접 편곡한 베토벤의 <환희의 송가>를 지휘하면서, <베토벤 프리즈>의 공개를 기념하였다. 얼마나 역사적인 날이었을까? 그 날을 상상해본다.
원래 <베토벤 프리즈>는 분리파 전시 기간에만 설치될 예정이었는데, 그 반향을 예상을 넘는 것이었다. 결국 이 그림은 원래 가져가기로 하였던 개인 소장가가 가져가서 보관하고 있었으며, 다음에는 오스트리아 정부에서 인수하여 오랫동안 벨베데레 궁에 보관되었다.
하지만 그림은 원래 그 자리에 있어야 하는 법이다. 예술은 여행하지 않는다. 파르테논은 아테네에, 스핑크스는 이집트에, 에펠탑은 파리에 있어야 하는 것이다. 그리하여 오스트리아 정부는 1973년에 <베토벤 프리즈>를 제체시온 안의 원래의 자리로 이동시키기로 결정하였다. 10년이 넘는 정밀한 복원 작업 끝에 <베토벤 프리즈>는 1986년에 원래의 위치에서 다시 사람들에게 선을 보였다. (참고 : History of the Beethoven Frieze)
빈의 권위적이고 전통적이던 화단(畵壇)은 빈 미술 아카데미로 대표된다. 그 빈 미술 아카데미 바로 뒤편에 아카데미가 빤히 보이는 곳에, 아카데미의 수구와 권위에 저항하던 젊은 미술가들이 그들의 아지트가 되는 ‘분리파 회관’인 제체시온을 건설한 것은 1898년이었다. 당시 구파 미술가들에 대한 반대 운동을 하던 미술가들은 구스타프 클림트를 중심으로 ‘분리파’란 이름으로 불리었는데, 그들은 자신들이 전시장 즉 분리파 회관을 만들기로 한 것이다. 분리파 건축가인 요제프 마리아 올브리히가 설계를 맡았는데, 그의 심혈로 말미암아 이 건물은 그의 최고의 건물이 되었으며 더불어 분리파 정신을 대표하는 작품이 되었다.
4각형의 건물이 네 개의 사각형 탑으로 네 군데를 지지하면서 머리 위에 이고 있는 둥근 구형이다. 구형은 금빛으로 도금을 한 것이다. 자세히 보면 모두가 잎사귀의 모양을 월계수 잎을 형상화한 것이다. 구형의 안으로 비어 있다. 멀리서도 눈에 띄는 이 구형은 다만 건물의 윗부분을 돔으로만 처리할 줄 알았던 시대에 큰 충격이었다. 그야말로 장식 예술의 극치였으니, 분리파의 상징이자 그들이 예술의 신전을 세우고 그 위에 스스로 자신들이 월계관을 씌운 꼴이었다. 그럼에도 처음 이 건물이 문을 열었을 때 모든 시민들이 갈채를 보낸 것은 아니다. 건물 위의 구형을 사람들은 ‘도금된 양배추’라고 놀렸다.
그러나 그들은 당당하였다. 클림트가 원래 순수 화가가 아닌 장식 예술가였듯이, 장식에 관한 한 그들의 감각은 탁월하였다.
그리고 그것은 건물에 아름다운 식물 문양에 잘 나타나있다. 또한 분리파의 특징의 하나가 바로 문자를 장식에 이용하는 것인데,
디자인뿐만 아니라 당연히 그 내용도 중요하다. 일종의 격문과 같은 것이다. 건물의 문 위에는 당당하게 금박으로 이렇게 적혀 있다.
Der Zeit ihre Kunst, der Kunst ihre Freiheit (시대에는 그 시대의 예술을, 예술에는 그 예술의 자유를)
바로 분리파의 모토요 20세기를 맞이하는 빈 분리파들의 마음을 담은 것이다. 이제 이것은 진리가 되었다.
또한 건물 왼편 아래에는 “Ver Sacrum”이라고 적혀 있다. 이것은 “신성한 봄”이라는 뜻이다.
이 역시 새로운 세기를 맞이하는 분리파의 시대를 상징하는 말이자, 그들의 회보인 분리파 잡지의 제목이기도 하다.
건물 앞의 오른쪽에는 역시 눈길을 끄는 커다란 조각상이 있다. 영웅의 모습을 한 남자가 사자가 끄는 전차를 타고 있는 위용이다.
이것은 조각가 아르투르 슈트라서가 만든 ‘마르크 안토니’ 상으로서 1899년에 제작된 것이다.
클림트에 있어 여성은 일종의 구원 같은 것이었던 모양이다. 그러나 한 여인에게 안주하지 못하고 정신적인 사랑과 육체적인 유희의 경계를 넘나들면서 많은 여성들을 만난다. 클림트의 작품세계나 인생에 지대한 영향을 끼친 여성으로는 미치 침머만, 에밀 플로게, 아델레 블로흐 바우어가 있다.
Hope I. 1903. 189.2 x 67 cm
National Gallery of Canada, Ottawa, Canada
임신한 여자를 모델로 썼다는 것에 대해, 당시에 음란하고 관능적이라는 비난을 받았던 <희망>은 가까스로 미술전시회에 전시되었다.
이 작품이 탄생하게 된 배경에는 '미치 침머만' 이라는 한 여성이 있다. 그녀는 한때 클림트의 모델이었으며 클림트와의 사이에서 두 명의 아이를 낳았다. 비록 법적으로 인정받지 못한 사생아였지만 아이에 대한 클림트의 애정은 각별했다고 한다.
'희망'이라는 작품이 탄생할 당시 미치는 그의 두번째 아들을 잉태하고 있었다는데, 그래서인지 이 시기 클림트의 작품속에는 임산부의 모습이 자주 출현한다. 처녀들의 어떤 모습보다도 임산부가 옆으로 선 모습이 가장 아름답다고 극찬하기도 했다고...
<희망1>은 인류의 희망은 임신이라는 위대한 주제를 상징하고 있지만 그의 에로틱한 감정을 그대로 드러내고 있는 작품으로서 미술사상 보기 드문 소재인 임산부를 주제로 대담하고도 노골적으로 묘사했습니다. 이 작품 속 임신한 여자는 부끄러움이 없이 붉은 머리카락과 음모를 당당히 드러내고 있는데 그것은 임신이라는 것은 섹스에 의해 이루어지는 일이라는 성적 암시입니다.
클림트는 이 작품에서 임신한 여성의 얼굴은 타락한 요부와 어머니의 모습을 동시에 나타나고 있는데 배 위에 깍지를 낀 양손은 인류의 희망을 암시하고 있죠. 그것은 결국 희망은 새 생명의 탄생이라는 것입니다. 임신한 여인을 보여줌으로써 클림트는 완벽한 여성상, 생명과 육체의 찬가를 보여주고 있습니다.
이 작품은 현실적인 주제와 비현실적인 주제가 한 화면에 나타나는 클림트만의 구성 요소의 특징을 가지고 있습니다. 죄·질병·죽음·빈곤·탄생할 생명 등이 화면에 나타나고 있는데 임신한 여성은 희망을, 여성 머리 뒤로 보이는 해골은 죽음을 상징합니다.
이 작품을 제작할 당시 모델이자 클림트의 정부였던 미치 짐머는 임신 중이었습니다. 클림트는 그 모습을 보고 영감을 얻어 작품을 제작하고 싶어 했고 모델들 가운데 마침 임신 중인 헤르마라는 여인을 발견하게 되죠. 임신한 헤르마는 모델을 그만두고 싶었으나 가정 형편상 그만둘 수가 없었습니다. 항상 모델들과 성적 쾌락을 누리고 있었던 클림트는 모델비는 물론 그녀들의 생활비를 대주고 있었기에 가난한 임산부였던 그녀는 결국 클림트의 청을 거절하지 못하고 파격적인 포즈로 화폭 앞에 서게 된 것이죠.
이작품이 주는 충격을 알고 있었던 클림트는 비난에 휩싸일 것을 우려해 실업가 프리츠 베른도르퍼에게 팔렸을 때 교회 제단화처럼 그림을 덮개로 가리라고 충고했을 정도였습니다. (생략)
남자가 남자다움을 증명할 수 있는 가장 손쉬운 방법은 섹스다. 일상에서 최상의 쾌락을 선사하는 섹스는 남자라는 존재를 증명해주면서 한편으로는 어떤 남자라도 인류의 역사에 동참한다는 사명감을 부여한다. 남자는 섹스를 통해 아이를 만들 수 있는 유일한 사람이고 임신은 인류의 희망이기 때문이다.
임신은 남자의 위대함을 확실하게 증명해주지만 남자로서 책임감을 절절히 느끼게 해준다. 아이는 인류를 구원해주지만 인류는 그 아이를 위해 해주는 일이 없다. 인류는 오로지 남자에게 쾌락에 대한 책임만 강조할 뿐이다. 결국 남자에게 아이의 탄생은 남성다움의 상실이다. 그들 앞에 펼쳐져 있는 것은 아이의 미래를 책임져야 하는 가장의 역할뿐이다.
임신한 여성을 통해 남자의 기쁨과 절망을 표현한 작품이 구스타프 클림트의 ‘희망1’이다. 미술사상 보기 드문 소재인 임산부를 주제로 대담하고도 노골적으로 묘사한 이 작품은 임신이 인류의 희망이라는 위대한 주제를 상징하고 있다. 이 작품은 임산부를 표현했음에도 클림트의 에로틱한 감정을 드러내고 있다. 이 작품 속에서 붉은 머리의 임신한 여자는 벌거벗은 채 당당하게 임신한 몸을 드러내놓고 있다. 임신은 남자의 성적 승리를 암시한다.
클림트는 임신한 여인의 벌거벗은 몸을 보여줌으로써 완벽한 여성상, 생명과 육체의 찬가를 보여주고 있지만 임신한 여성의 얼굴은 타락한 요부로 묘사했다. 요부의 얼굴은 남자를 유혹하는 악의 화신을 암시한다. 임신한 배 위에 깍지를 낀 여자의 양손은 희망을 암시하고 있다. 그것은 결국 희망은 새 생명의 탄생이라는 것이다.
이 작품은 현실적인 주제와 비현실적인 주제가 한 화면에 나타나는 클림트만의 구성요소가 지닌 특징을 보여준다. 죄, 질병, 죽음, 빈곤, 탄생할 생명 등이 화면에 나타나고 있는데 임신한 여성은 희망을, 여성의 머리 뒤로 보이는 해골은 죽음을 상징하면서도 성욕의 치명적인 올가미를 암시한다.
이 작품을 제작할 당시 클림트는 모델이자 자신의 정부였던 미치 짐머가 두 번째 임신 중이었다. 클림트는 그녀의 임신한 모습을 보고 영감을 얻어 작품을 제작하고 싶었고 마침 모델들 가운데 헤르마라는 여인이 임신 중이었다. 임신한 헤르마는 모델을 그만두고 싶었으나 가정 형편상 그만둘 수 없었다. 생활에 어려움을 겪는 가난한 임산부였던 그녀는 클림트의 청을 거절하지 못하고 파격적인 포즈로 화폭 앞에 서게 된다.
클림트는 임신은 남성의 성적 승리의 증거지만 그녀가 낳을 아이는 남자에게 지울 수 없는 고통을 선사한다고 생각해 새 생명을 잉태한 작품 속 여성 주변에 고통과 번뇌, 죽음을 담았다. 그는 이 작품이 비난에 휩싸일 것을 걱정해 실업가 프리츠 베른도르퍼에게 팔렸을 때 교회 제단화처럼 그림을 덮개로 가리라고 충고했다.
박희수〈작가·아트칼럼니스트>
Pregnant Woman with Man Facing Left
(Study for Hope I), 1902, 44.8 x 30.5 cm
Blue, Orange Pencil. Albertina, Vienna
1904년 요제프 호프만과 빈 공방은 실업가 아돌프 슈토클레트의 주문으로 브뤼셀에 저택을 짓고 가구를 만드는 일을 맡았다.
클림트는 그 저택 식당에 설치할 대리석 벽화의 디자인을 맡게 되었다.
1905년 클림트는 학부 그림들을 완성했지만, 후원자의 도움을 얻어 비용을 지불하고 전시를 포기했다.
빈 분리파 회원들을 인상주의와 아르누보라는 서로 다른 양식으로 나누어 놓았던 오랜 의견 대립 끝에 아르누보 계열의 예술가들이 분리파를 떠났다.
1905년에 클림트는 '비엔나 분리파'를 탈퇴하고 <여자의 세 시기>를 완성한다.
뒤에 1911년 이 그림으로 '로마 국제 미술전'에서 금상을 수상한다.
The Three Ages of Woman, 1905
The Three Ages of Woman, 1905
여자의 세시기 180 x 180 cm, 로마 국립갤러리
탄생, 희망, 회한, 죽음.., 삶은 결국 '절망'이라는 단어로밖에 표현될 수 없는 건지도 모르겠다. 끝없는 반복.. 태어나고 꿈꾸면서 성장하고 회한으로 늙어가고 고통 속에 죽는 것.., 그게 삶인 것을.
삶이 이렇게 고통스러움에도 사람들은 애써 죽음을 외면하려 하고 오래 살기를 원하는 것은 또 얼마나 모순된 일인가? 그토록 끈질기게 존재함(살아있음)에 집착하는 이유는 뭘까?
고요히 눈을 감고 잠든 어린 아이(아마도 여자 아이겠지)와 아이를 안은 젊은 여인. 그녀는 마치 꿈꾸듯 세상을 향한 두 눈을 꼭 감은 채 서 있다. 젊음, 희망, 밝음의 이미지를 품고 있지만, 전혀 사실적이거나 현실적으로 다가오지 않는다.
그리고 약간의 간격을 두고 늙은 여인 하나가 서 있다. 검게 그을린 피부와 마른 몸에 어울리지 않는 불룩 나온 배를 하고 뭔가 고통스러운 듯 한 손으로 얼굴을 감싸쥐고 있다. 마치 죽음이 바로 목전에 와있는 사람처럼.., 늙음, 절망, 어둠, 죽음의 이미지를 품고 있으며 무서울 정도로 사실적으로 묘사되어 있다.
인간이 태어나서 죽음에 이르는 삶의 과정들을 고스란히 한 폭의 그림에 담아낸 이 작품을 난 참 좋아한다. 비록 삶을 절망으로 표현하고 있을지라도 그건 엄연한 사실이고 나도 그 과정들을 차근차근 밟아가고 있으니까. 클림트가 이 그림을 그리게 된 배경을 잠깐 살펴보면, 만성적인 정신질환에 시달리던 누이와 어머니의 죽음 때문에 삶에 대해서 특히 여성의 삶에 대한 진지한 고민의 과정 흔적으로서 이 그림이 그려졌다고 한다. 사람은 이렇게 뭔가 아픔을 하나씩 경험하면서 성장하는 걸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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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02년 오귀스트 로댕은 '베토벤 전시회'를 방문해 클림트의 '비극적이고도 거룩한' 프리즈에 찬사를 보냈다. 클림트 역시 〈철학〉에서 군상을 표현할 때 아래쪽에 머리를 손으로 감싸며 절망하는 두 남자의 모티브를 로댕의 〈지옥의 문〉에서 차용하면서 로댕에 대한 찬사를 명확하게 표한 바 있다.
〈여성의 세 시기〉 역시 로댕의 〈아름다웠던 투구제조사의 아내〉에서 영감을 받았다. 이 그림은 〈희망〉과 마찬가지로 인간, 운명, 시대, 그리고 여성의 중심적인 역할 등을 떠올리게 하면서 한편으로 우주의 무한함이나 남녀의 융합까지 암시하고 있다. 다시 말해 남녀의 결합 모티브를 동반한 생물학적 장식의 범람으로 가득 차 있는 것이다. 소우주와 대우주는 암시적인 모자이크와 색의 흐름 속에서 서로 융합된다. 당시의 사회는 죽음과 성을 카오스의 양상으로 이해했고, 따라서 금단의 것으로 배척했다.
이러한 사회와 대면한 클림트는 이 무렵무터 인간의 실존에 관한 궁극적인 답을 찾기 위해 험난한 탐구에 운명적인 발을 내디뎠다. 조르주 바타유에 의하면 진정한 예술은 필연적으로 프로메테우스적인 것이다. 클림트의 작품 세계도 물질의 횡포에 대한 인간의 저항이나, 진리와 이념을 추구하는 노력을 상징하는 것에 집중되었다. 따라서 제우스는 프로메테우스에게 단순히 사면과 은총을 베푸는 차원을 넘어 스스로 정의의 왕국을 창조하도록 했던 것이 아니었을가 ? 그러나 제우스의 관대함을 갖추지 못했던 빈은 결코 클림트를 허용하지 않았다.
고요히 눈을 감고 잠든 어린 아이와 아이를 안고 있는 젊은 여인. 그녀는 마치 꿈꾸듯 세상을 향한 두 눈을 꼭 감은채 서 있습니다. 젊음, 희망, 밝음의 이미지를 품고 있지만 전혀 사실적이거나 현실적으로 다가오지 않습니다. 그리고 약간의 간격을 두고 늙은 여인 하나가 서 있습니다. 검게 그을린 피부와 마른 몸에 어울리지 않는 불룩 나온 배를 하고 뭔가 고통스러운 듯 한손으로 얼굴을 감싸쥐고 있습니다. 마치 죽음이 바로 목전에 와 있는 사람처럼 말이죠. 늙음, 절망, 어둠, 죽음의 이미지를 품고 있으며 무서울 정도로 사실적으로 묘사되어 있습니다. 인간이 태어나서 죽음에 이르는 삶의 과정들을 고스란히 한폭의 그림에 담아낸 이 작품을 그리게 된 배경은 이렇다고 합니다. 만성적인 질환에 시달리던 누이와 어머니의 죽음으로 인해서 삶에 대해서, 특히 여성의 삶에 대해 진지한 고민의 과정 흔적으로서 이 그림이 그려졌다고 합니다.
죽음은 삶의 짙은 그림자와 같습니다. 그래서인지 태어나서 성장하고 늙어가는 과정을 한 그림에 담음 <여인의 세 단계>에서 자꾸 죽음의 그림자를 느끼게 됩니다. 그림 중앙에 한 인물의 세 시기라고도 볼 수 있는 세 여인이 영기에 둘어싸인 채 서 있습니다. 이들을 둘러싼 영기가 만들어낸 기둥을 제외하면 그림 전체는 텅 빈 공간이 지배하고 있습니다. 여인이 살아가면서 겪을 위험을 암시하는 듯합니다.
또 한가지 특이한 점은 그림 속의 세사람 모두가 아무것도 바라보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추하게 비틀린 육신을 그대로 드러낸 채 옆으로 서 있는 노파의 몸이 향하고 있는쪽에 아이를 품에 안은 젊은 여인이 서있습니다. 둘 다 벌거벗고 눈을 감은 채다. 잠이 든 것일까요. 그들은 꿈꾸는 자의 표정을 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곱슬머리에 분홍빛 빰을 가진 아이는 잠결에도 정확하게 엄마의 가슴을 찾아내는 동물적 본능을 보여줍니다. 아이가 눈을 감음은 꿈을 꾸기 때문이 아니라 세상을 헤아려보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꿈은 아이가 아니라 이제 막 사춘기를 벗어난 듯한 젊은 엄마의 몫입니다. 노년의 슬픔 따위는 아예 눈감은 채 외면하는 젊은 여인은 품에 안은 아이와 자신의 꿈만 바라본다.
살아있는 존재는 늘 죽음을 의식합니다. 어쩌면 삶의 순간마다 변형된 형태로 개입하는 죽음의 이미지 혹은 예감은 죽음 그 자체보다 더 무자비할지도 모릅니다. 그리고 잠은 우리가 일상에서 경험하는 '가상적'죽음입니다. 하지만 삶은 그 짧은 죽음 앞에서 무력하게 물러나지 않고 꿈을 구고 있습니다. 꿈은 가상적 죽음에 생명력이 개입하는 한 방식, 죽음과 삶 사이를 떠도는 환영입니다.
인생을 세 단계로 나누어 묘사한 그림은 미술사 속에서 쉽게 찾아볼 수 있습니다. 그것들은 대개 사춘기 소년/성인/노년의 도시입니다. 이런 그림들은 결국 인생의 무상함을 느끼게 만든다는 점에서 동일하지만 성장에서 소멸로, 순수함에서 탐욕스러움으로, 무지에서 지성으로, 건강함에서 병과 쇠약함으로 구체적인 묘사 내용을 달리합니다. 이런 단계를 구현하는 주체는 모두 남성이고, 그들은 대개 정면을 응시하는 모습입니다. 그런데 클림트는 삶의 단계를 구현하는 주체를 여성으로 바꾸어 놓았습니다. 인생의 세 시기조차, 아기(유년기)/젊은 엄마/노인으로 변형시켰습니다.
She Who Was the Helmet-Maker's Beautiful Wife. 1880-85. Auguste Rodin
로댕의 〈아름다웠던 투구제조사의 아내〉
1906년 슈토클레트 저택을 보기 위해 브뤼셀로 여행했고, 이어 런던을 여행함.
최초의 사각형 초상화 제작. 클림트는 새로 설립한 화가연맹의 회장이 되었다.
1907년 "학부 그림"이 완성되어 베를린에 전시되었고, 에곤 쉴레와 만남.
1908년 "클림트 그룹"은 쿤스트 쇼를 기획하였고, 여기서 다양한 유형의 아르누보 작품들이 54개의 전시실에 전시됨.
전시의 중심은 <키스>를 포함한 16점의 그림이 전시된 클림트의 전시실로서 이 그림은 현대 미술관에 팔림.
클림트의 도움으로 아직 신인이던 오스카 코코슈카도 그림을 전시할 수 있었다.
Portrait of Fritsa Reidler 1906
Portrait of Fritsa Reidler (1906) 프리차 리들러 부인 Oil on canvas, 153 x 133 cm Osterreichische Galerie Belvedere, Vienna, Austria
클림트의 대표작 중 하나
클림트의 ‘황금시대는 1906년 〈프리차 리들러의 초상〉으로 시작해 1907년 〈아델레 블로흐바우어 초상Ⅰ〉에서 절정에 달했다.
Hope II. 1907-1908
Hope II. 1907-1908. 110.5 x 110.5 cm
Oil and gold on canvas. The Museum of Modern Arts, New York, USA
추상적인 바탕에 가슴을 드러낸 임산부가 그려져 있습니다. 임산부의 옷은 화려하고 무늬는 추상적입니다. 아래쪽에 상념에 잠긴 듯한 여인 세 사람이 보이는데 화려한 무늬에 묻혀 그 모습이 뚜렷이 드러나지는 않습니다.
인상적인 것은 임산부의 불룩한 배 위에 해골이 놓여 있다는 사실입니다. 임산부와 해골은 잘 어울리지 않습니다. 해골은 죽음과 종말을 떠올리게 하기에 새로 태어날 아기와는 관계가 없어 보입니다. 하지만 클림트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생명이 있는 모든 것은 언젠가 죽음을 맞아야 하므로 새로 태어날 아기라도 죽음의 운명으로부터 벗어날 수 없음을 이야기하고 싶었습니다. 실제로, 자신의 아이와 관련해 클림트는 큰 슬픔을 경험한 적이 있다. 아들 오토가 태어난 이듬해 죽고 만 것이다.
죽은 아들의 얼굴을 섬세하게 스케치한 그림이 지금까지 남아 있는 데서 알 수 있듯이 클림트는 아들을 매우 사랑했습니다. 하지만 순진무구한 어린아이라 하더라도 죽음으로부터 결코 자유롭지 못한 것이 사람의 운명이지요.
클림트는 임산부 배 위에 해골을 그려 넣어 그 깨달음을 영원한 기록으로 남겼습니다. 그리고는 작품에 특이하게도 ‘희망’이라는 제목을 달았습니다.
날 때부터 죽음이 따라다닌다는 사실을 인간은 한시도 잊어서는 안 되겠지요. 그 깨달음 속에 있는 사람은 주어진 날 동안 열심히, 최선을 다해 삽니다. 그렇게 사노라면 진정으로 아름답고 행복한 하루하루를 가꿔갈 수 있지요. 삶도 죽음도 모두 고맙고 귀한 선물로 여기게 됩니다. 희망은 그런 감사하는 마음에서 피어납니다.
Study for Hope II by Gustav Klimt, 1907
Watersnakes. 1904-1907
Watersnakes I. 1904-1907. 50 x 20 cm
Watercolor and gold on parchment The Österreichische Galerie Belvedere, Vienna
사람들에게 사랑의 마법을 걸어 바다 속 푸른 침실로 유인하는 인어는 유혹적인 창조물로 클림트가 즐겨 그린 주제 중 하나다. 물 속에서 수초처럼 물의 흐름을 따라 흔들리는 물의 정령들은 성적인 이미지를 환기시킨다.
작은 화폭에 황금빛 머리카락과 상아빛 피부를 지닌 가녀린 두 육체가 서로 포옹하고 있는 "물뱀1"은 물의 여신을 가장 고혹적으로 표현한 작품으로 손꼽힌다. 클림트의 작품들 중에서도 값비싼 그림에 속하는 작품이다.
<물뱀 Ⅰ> (1904~1907) 에서 클림트는 인간의 형태를 섬세하게 미세화한 식물 모티프로 바꾸어 <금붕어>에 등장했던 아찔한 미녀를 다시 등장시킨다.
오래된 화려한 비단에서 잘라낸 것 같은 인물들은 장식적인 비늘과 꽃 같은 촉수, 그리고 황금색의 잔가지로 만들어진 융단에서 미끄러지듯 주변 환경과 어우러진다.
Water Serpents II.
1904-07. 145 x 80cm, 개인 소장
<물뱀 Ⅰ>과 같은 시기에 그려진 <물뱀 Ⅱ> 에서도 직사각형 틀이 사용되었지만 구성은 수평적이다. 젊은 여인들의 몸은 마치 알록달록한 꽃의 바다를 떠다니는 해초처럼 겹쳐지며 자유롭게 미끄러진다.
Portrait of Adele Bloch-Bauer I, 1907
아델레 블로흐 바우어는 부유한 금융인의 딸로서 매우 매혹적인 여인이었다고 합니다. 위의 그림만을 보아도 그 아름다움을 상상할 수 있을 듯... 클림트를 위해서 기꺼이 누드모델을 서줄만큼 그를 신봉했으며 꽤 오랜동안 육체관계를 유지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유디트'와 '키스'를 탄생시킨 주인공이기도 하다.
Portrait of Adele Bloch-Bauer I, 1907. 아델레 블로흐-바우어의 초상 Oil and gold on canvas 138 x 138 cm / Austrian Gallery, Vienna
아델레 블로흐 바우어는 빈 은행 연합의 총감독이자 오스트리아와 헝가리를 대표하는 7대 은행을 좌지우지하던 인물의 딸이었습니다. 아델레는 1899년 열 일곱 살 연상의 기업가 페르디난트 블로흐와 결혼했는데, 불행히도 두 사람 사이에는 아이가 없었습니다. 아델레는 두번 유산했고, 세번째 아이도 태어난지 며칠 안 되어 죽고 말았습니다. 아이가 엇는 두 사람의 결혼 생활은 나이 차이가 았었던 만큼 성적인 관계보다는 서로에 대한 높은 존중과 세심한 배려로 이어졌다고 합니다.
페르디난트는 아내의 초상화를 빈의 이름난 화가 클림트에게 의뢰했습니다. 클림트는 페르디난트나 아델레의 부친 모리추바우어의 사회적 위치와 재력에 무척이나 합당한 초상화를 제작합니다. 이전에는 해보지 않은 새로운 화법을 구사했는데.. 바로 금을 사용한 것입니다. 온통 금박으로 장식된 바탕 위에 역시 금은 보석의 목걸이와 팔찌를 끼고 앉은 아델레의 얼굴은 홍조를 띠고 있는데도 우수에 젖어 창백하기 그지없습니다. 화려한 보석이 박힌 두꺼운 목걸이나 금팔찌,드레스 등은 남편페르디난트가 선물한 것이었습니다. 그런 장신구들은 이델레의 초상화를 더욱 유명하게 만들었는데, 이로써 남편의 재력과 현대적인 취향을 더 과시할수 있었습니다.
황금의 연못에서 아델레가 수련처럼 피어오르는 것 같습니다. 그만큼 강렬한 매력을 지닌 존재로 모델을 표현했습니다. 그림에서 사실적으로 그려진 부분은 아델레의 얼굴과 손, 어깨 부분이 전부입니다. 사실적인 표현으로 그려진 부분은 그림의 면적으로 따지자면 전체의 1/12이 채 못 됩니다. 이렇게 작은 부분만 사실적으로 표현하고 나머지는 장식적인 무늬와 패턴으로 처리해 매우 강렬한 인상을 남기고 있습니다. 사실적인 처리가 극소화되었지만, 그래도 클림트는 그림에서 아델레의 개성적인 면모를 표현하는데 꽤 신경을 썼습니다. 섬세하면서도 여린 인상과 강한 자존심이 돋보이는 표정이 그렇게 표현되었습니다.
손의 처리도 매우 신경을 쓴 부분입니다. 아델레는 지금 왼손으로 오른손을 감싸고 있습니다. 그녀가 이런 포즈를 취한 것은 자신의 오른손에 장애가 있어 이를 감추기 위한 것이었습니다. 아델레는 어릴 적 사고로 인해서 오른손 가운데 손가락이 절단되는 손상을 입었습니다. 남들의 부러움 어린 시선을 받아온 그녀지만, 이처럼 숨기고 싶은 아픔을 지니고 있었습니다. 클림트는 거기에 자신의 따뜻한 시선을 얹어 매끄럽게 표현해 냈습니다. 그만큼 모델을 향한 화가의 애정이 드러나는 그림입니다. 2006년 에스티 로더 창업자의 아들 로널드 로더에게 1천3백50만 달러에 팔려 역사상 가장 비싼 값에 거래된 그림 중의 하나가 되기도 했습니다.
스토클레 프리즈와 마찬가지로 이 초상화에도 구상과 추상의 통합이 이루어지고 있다. 클림트는 풍경화에서 다룬 적이 있는 비잔틴 양식으로 화면을 덮고 있다. 이집트 미술에서 나타난 삼각형의 눈 모양과 미케네 양식이었던 소용돌이 문양과 같은 이국적 상징은 클림트의 주된 관심사를 단적으로 드러낸다.
빈 사교계의 꽃이었던 이 부인들의 초상화는 마치 사회적 지위와 부를 소유했기에 도리어 그것에 매여 있던 그들의 두려움과 불안을 표현한 듯하다.
이 초상화는 클림트가 빈에서 보았던 벨라스케스의 초상화와 매우 비슷하다. 벨라스케스의 초상화 속 귀부인들도 쇠락해가는 스페인이라는 환경 속에서 재산 상속의 부담과 우울한 삶의 현실에 짓눌려 있는 것으로 보인다. 이것은 클림트가 살았던 시대의 오스트리아 제국의 쇠락과 많은 면에서 비슷했다. 그러나 벨라스케스와 마찬가지로 클림트는 삶이 가진 환상을 완벽히 창조할 수 있었다.
한편 이 작품에서는 앵그르나 마티스와 유사한 점도 보이지만, 클림트의 주된 능력은 ‘욕망의 비밀스러운 대상’을 초상화를 통해 관람자의 눈앞에 드러내는 것이었다. 에로티시즘은 새롭게 열렸고 환상은 전통의 굴레를 깨뜨려버렸다. 의상은 신체와 하나가 되고 옷감은 육체와 뒤섞인다. 어깨와 팔은 장식으로 인해 강화된 환상을 반영하고 있으며, 의상의 주름은 피부의 주름을 연상케 한다. 아마 누드 위에 덧칠한 듯한 의상이 순간적으로 승리감에 도취한 누드에 자리를 양보하며 사라져버린 것 같다.
이 초상화는 높은 수준의 시각적 표현과 관능미에 도달해 있지만 여성들은 자신들을 자극하는 성적 욕망을 깨닫지 못한 듯 품위 있는 모습을 하고 있다. 그녀는 요부인 자신을 의식하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최대한 아무 생각도 하지 않으려는 듯 소파에 기대앉은 우아하고 순종적인 모습은 그러나 얼마나 유혹적인 모습인가 ?
클림트의 〈아델레 블로흐바우어 초상1〉과 비슷한 분위기를 앵그르의 〈므와테시에 부인〉(1856년)과 마티스의 〈푸른 옷의 여인〉(1937년)에서도 볼 수 있다. 그러나 클림트의 에로티시즘은 좀더 도착적이다. 비록 클림트의 모델이 여사제와 같은 정숙한 요소를 갖고 있을지라도 그녀의 장식과 의상은 그렇지 않다.
프리차 리들러가 앉은 의자와 아델레 블로흐바우어의 의상, 환상적인 장식과 팽창하는 색이 빚어내는 미묘한 변화, 거칠고 강박적이며 에로틱한 상징으로 뒤덮인 장식 모티프, 무표정한 얼굴과 손을 표현한 사실적이고 정교한 기교가 과장되게 장식적인 에로티시즘과 만나서 자아내는 대조 등 열거한 모든 장식적 요소는 보는 사람들에게 매우 큰 의미로 다가온다.
당시의 평은 〈아델레 블로흐바우어 초상Ⅰ〉을‘황금 성전 속에 있는 우상’이라고 평가하고 있지만, 이 표현은 클림트가 성 비탈레 성당의 모자이크에서 보았던 테오도라 여제의 초상을 상기하게 만드는 것이었다. 클림트의 작품에서 금색의 사용은 다양한 의미를 가지고 있다. 초기 작품에서는 〈음악2〉의 아폴론의 여사제가 들고 있는 키타라나 〈팔레스 아테나〉의 투구와 무기와 같은 대상의 신성하고 신비로운 특징을 강조할 때 금색을 사용했다.
〈유딧〉연작에 비해 아델레를 그녀의 모습 그대로 그린 초상화 〈아델레 블로흐 바우어 Ⅰ〉은 그래도 점잖고 품위가 있어 보인다.〈유딧〉에서도 볼 수 있는 깊고 우수에 찬 검은 눈동자와 검은 머리가 여전히 고혹적이지만, 단정하고 반듯한 사교계 여성의 기품을 잃지 않고 있다. 화려한 황금빛 배경의 구성으로 인해 마치 비잔틴 이콘화의 마돈나인 양, 혹은 다른 지고한 숭배대상인 양 그림은 영원한 광채로 빛난다. 클림트는 이 그림을 1900년부터 그리기 시작했는데, 1907년에 이르러서야 비로서 완성했다. ----생략----
★ 2006년 7월, 외신은 '세계에서 가장 비싼 그림 기록'이 경신됐었음을 긴급 타전했다. 그동안 최고가를 유지했던 피카소의 「파이프를 든 소년」을 가볍게 뛰어넘은 작품은 클림트의 1907년 作「아델레 블로흐 바우어의 초상」이었다. 매매가는 놀랍게도 1억 3500만 달러 (한화로 약 1천 8백억원 정도..흐..), 이 작품의 창작 시기는 「철학」「의학」「법학」의 완성 시기와 거의 맞물린다.
Danae. 1907-1908
Danae. 1907-1908. 77 x 83.
Galerie Würthle, Vienna, Austria
<다나에>는 주피터(제우스)를 상징하는 쏟아지는 황금 빗줄기를 받아들이려고 몸을 도사리고 있다. 제우스와 다나에의 그 쾌락적 합일과 열락을 관능적으로 포착한 그림이다. 그의 그림 중 가장 에로틱하다는 평가를 받고 있기도 하다.
황금빛 물결이 흘러내려와 끝나는 부분에 검은 사각형이 보이는데 이것은 클림트가 공공연하게 남성을 상징하는 수단으로 사용하는 형태입니다. 따라서 이것은 황금물결로 변한 제우스를 상징하는 것으로 생각을 하면됩니다. 따라서 지금 다나에는 제우스와의 관계를 가지는 순간이라는 것입니다.
다나에 이야기는 서양 미술사에서 고전적으로 다루어지는 소재중의 하나이다. 그 그림 중에는 <황금의 비>의 이미지를 재화와 결부시켜 다나에를 물질적 탐욕의 화신으로 묘사한 것도 있고 그녀가 남자를 모르는 쳐녀였다는 점에 착안하여 순수의 전형으로 묘사한것도 있다. 하지만 그 누구도 클림트처럼 다나에가 제우스를 맞아들이는 순간의 감각적이고 관능적인 만족감을 포착한 적은 없다.
'키스'이후 클림트는 더욱 대담해 졌다. 이 그림은 황금의 정액과 뒤섞인 황금비를 맞고있는 다나에의 절정의 순간을 묘사하고 있다. 육감적이고 관능적 아름다움의 상징이었던 여주인공이 잠들어 있는 사이 황금비로 변한 제우스가 다나에의 풍만한 허벅지 사이로 쏟아져 들어가 그녀를 방문하는 장면이다.
태아처럼 웅크린 다나에의 자세만이 그녀가 이 기이한 성교로 영웅 페르세우스를 잉태하게 됨을 암시하고 있는데 그림속에는 신화적 배경이나 사건 전개를 지시하는 부분은 하나도 없다. 그림은 오직 신들의 신인 제우스의 정액, 인간의 그것과 달리 황금빛으로 빛나는 생명수를 다나에게 풍만한 넓적다리 사이로 받아들이고 있는 순간만을 클로즈업했다, 그래서일까? 황금빛 폭포수처럼 쏟아지는 다나에의 도취는 영원히 지속될 것만 같다.
하늘에서 떨어지는 폭포수처럼 여인을 휘감는 유혹, 몸의 일부를 가리는 엷은 비단은 그녀가 온몸을 내던져 뛰어든 강렬한 쾌락의 물결처럼 부드럽게 일렁이고 있다. 여인은 몸을 내 맡기고 꿈 같은 세계에 잠겨 드는데 앞으로 다가올 죽음을 감지한것일까? 신화속 여주인공이 완벽하게 새로 태어나는 순간이며, 황금빛이 깊은 곳에서부터 출렁이며 솟아오르는 관능의 색으로 반짝반짝 빛나는 황홀경의 색으로 태어나는 순간이다,
이쯤되면 쾌락은 어떤 행위의 단순한 보상 정도가 아니라 그 자체로 성스러운 경험이 된다. 아마 누구도 이토록 적나라한 장면에 이 만큼의 신성을 부여할수는 없을 것이다. 이것은 부분적으로는 신화적 소재와 금색 덕분이다, 장식과 금의 적절한 사용으로 자칫 잘못하면 퇴폐적인 느낌만을 줄 장면이 성스러움이 부여된 것이다.
하지만 이 그림이 세속적인 관능의 세계에 머무르지 않을수 있었던 이유는 남자가 그림속에서 사라졌기 때문이다. <다나에>에는 성적 도취에 온몸을 내 던진 여자만 있다. 신화에 입각해서 보면 그녀의 도취가 제우스의 승리를 온몸으로 보여주는 것이 되겠지만 신화의 흔적을 기억에서 지워 버리면 남자는 사라지고 오직 여자만 있는 성교 장면인데, 잘 찾아보면 제거된 남성의 흔적이 없는것도 아니다. 황금비 속에 숨겨진 사각형을 보라. 그녀의 허벅지가 끝나고 엉덩이가 시작하는 지점에 하얀 테두리로 강조된 사각형은 클림트의 수많은 다른 그림속에서 남성성의 상징으로 남자옷을 장식하던 것이다.
〈다나에〉만큼 사랑의 황홀함을 아름답게 표현한 작품은 없을 것이다. 황금비로 변한 제우스가 다나에를 찾아온 후 아들 페르세우스가 태어났다. 이 그림에서 클림트는 대체로 부정하다고 알려진 페르세우스 수태의 순간을 선택했다. 황금비와 뒤섰인 황금빛 정액이 잠자는 미녀의 탐스러운 허벅지 사이로 흘러 들어간다. 이것은 어떤 의미로는 강간이다. 수동적인 여주인공 다나에는 지금 벌어지고 있는 사건에 대해서 어무것도 깨닫지 못하는 상태라고 볼 수 있기 때문이다.
게다가 잠든 다나에가 무의식적인 상태에서 에로틱한 체험을 하는 광경을 감상하는 우리도 당시의 빈 시민과 마찬가지로 관음증을 가진 공범자가 되고 만다. 여성의 신비스럽고 성적인 분위기를 통해 에로티시즘은 강하고 직접적으로 발산되고 있으며 풍만한 육체를 근접 묘사함으로써 그 효과는 한층 강조된다.
다나에의 모델은 클림트가 선호했던 붉은 머리를 가진 당시 미인을 변형한 팜 파탈의 한 유형이다. 클림트가 사랑했던 나이아스 (그리스 신화에서의 물의 요정) 나 님프,〈베토벤 프리즈〉의 적대적인 세력조차 모두 이 모습을 빌린 팜 파탈이다. 하지만 우리는 남성 화가인 클림트의 중심적인 관심사였던 여성, 즉 삶의 신비를 만들어내는 여성을 점점 더 다양하게 만날 수 있다. 여성에 대한 지칠 줄 모르는 호기심은 클림트로 하여금 〈물뱀〉의 레즈비언에 이르기까지 온갖 상황속의 여성을 다양한 자세로 묘사하게끔 만들었다. 다나에의 신화는 클림트가 사랑의 황홀경에 빠진 여성을 표현하기 위한 단순한 구실에 지나지 않았다.
[구스타프 클림트 (마로니에북스)]
운명의 힘보다 강한 욕망의 굴레..
그리스 신화의 한 토막. 펠로폰네소스 반도의 아르골리스 지방을 아크리시오스가 통치하던 때의 이야기다.
풍부한 물자와 후한 인심, 천혜의 땅이다. 선량하고 부지런한 시민, 왕은 행복했다. 시민은, 대지마저도 기꺼이 풍요로운 삶을 누렸다. 그리고 나라의 경사 하나. 미모의 여왕 에우리디케가 공주를 출산했다. 공주는 아름다운 어머니를 쏙 빼어 닮았다. 아니 그것을 능가했다. 바로 다나에였다.
그러나 호사다마라고 했던가. 신탁은 장차 다나에가 낳을 아기가 왕을 시해할 것이라고 예언했다. 비극은 늘 그랬지. 고귀한 신분을 저주하고 절망의 나락으로 침몰시켰지. 아크리시오스는 절망했다. 이렇게 아름답고 매력적인 공주가 장차 나의 목을 따는 친손주의 어머니라니. 그러나 신탁은 신의 영역에 속하는 것이니 인간의 힘으로 그것을 변화시킬 수 없는 일이다.
왕은 예언의 실현을 막으려면 차라리 다나에를 절해고도에 유폐시키는 수밖에 없다고 생각했다. 어떤 남자의 접근도 허락해선 안 됐다. 왕은 다나에를 눈물로 감금했다. 무쇠를 통째로 녹여서 완벽한 철탑을 완공하고 그 속에 공주를 가두었다. 식수를 제공할 조그만 구멍을 철탑의 천장에 냈을 뿐이다.
육중한 철탑은 견고한 요새로 한 치의 틈도 없이 우뚝했다. 딸을 가둘 수밖에 없었던 왕의 가슴은 찢어졌다. 갇힌 이유를 나중에 유모에게서 들은 다나에 역시 자신의 운명과 부친을 원망하고 날마다 눈물을 흘렸다. 그 어떤 슬픔도 철통 같은 무쇠 탑을 녹일 수 없었다. 설령 눈물이 쇠를 부식시킬 수는 있어도, 철탑은 저 홀로 요지부동이었다.
그러던 어느 날, 신 제우스가 이 철탑을 발견하고 호기심이 발동했다. 탑 주위를 맴돌던 그가 순간, 천장의 틈새로 아름다운 다나에를 발견했다. 다나에를 가둔 청동탑이 아무리 견고하고 쇠창살이 튼튼해도 신의 눈길을 어떻게 막을수 있으랴. 특히 그 신이 아내 헤라의 질투를 피해 여기 저기서 연애 행각을 벌이던 바람둥이 신 제우스였다면... 이제 이야기는 새로운 전환을 맞는다.
그러나 견고한 철탑은 요새 중의 요새. 틈을 발견할 수 없었다. 신의 아버지 제우스도 난공불락의 철옹성 앞에서 절망했다. 그는 요새를 공략하기 위해서 절치부심했으나 실패했다. 밤마다 전전반측했으리라. 그가 고작 할 수 있는 일이란 그녀를 멀리서 바라보는 것이었으니.
이때 눈물로 시간을 흘리던 다나에가 하늘의 제우스를 발견했다. 바로 그 순간을 놓치지 않고 사랑의 신은 순식간에 화살을 날렸다. 화살은 잠자던 다나에의 정열을 깨웠다. 이제 활화산처럼 폭발하고 타오르기만 하면 그만이었다.
그녀는 처음 경험하는 야릇한 흥분을 주체할 수 없었다. 흐벅진 넓적다리가 제우스를 향해 절로 벌어지는 것을 바라보기만 할 뿐이었다. 제어할 수도, 아니 그럴 필요성도 느끼지 못했다.
제우스는 눈부신 광경에 넋을 잃었다. 그 역시 욕정을 참지 못하고 황금의 정령을 그녀의 다리를 향해 마음껏 벌컥벌컥 쏟아냈다. 다나에는 황홀경에 몸을 가누지 못했다. 그녀는 제우스의 정랑을 갈증 난 사람처럼 게걸스럽게 받아들였다. 아니 빨아들였다.
절제할 수 없는 쾌락은, 그녀가 재앙을 잉태한다는 것조차 망각케 했다. 그랬다. 쾌락이 최고조에 도달할수록 비극은 가깝다. 그것은 죽음의 유혹 같은 것이다. 그결과 다나에는 제우스의 아들 페르세우스를 낳게 되었다. 결국 이 사실을 알게 된 왕은 다나에와 그녀의 아이를 궤짝에 가두어 망망대해로 띄워 죽음으로 보냈다. 다나에는 피눈물을 흘리며 자신의 운명을 한탄했다. 그러나 두사람은 세리포스섬에 표류하여 그곳 왕의 형제이자 어부인 덕티스에게 구출받았다.
한편 성의 왕인 폴릭덱테스는 번번히 거절 당하면서도 어떻게 해서든지 다나에를 아내로 삼고자했다. 그로서는 방해자인 성장한 페르세우스를 쫓아낼 필요가 있었기에 그는 페르세우스에게 이 섬의 귀족이 마땅히 지급해야할 세금 대신에 고르곤들의 하나인 메두사의 목을 잘라 오라고 명령했다.
페르세우스가 떠나 있는 동안 폴릭덱테스는 다나에를 신전에 가두고 결혼을 승락할 때까지 음식을 주지 않았다. 1년후 페르세우스는 아내로 맞은 안드로메다를 데리고 돌아와 고르곤의 머리를 보임으로서 왕과 대신들을 돌로 변하게 하고 하마터면 죽을뻔한 다나에를 구했다. 페르세우스는 덕티스를 왕으로 앉힌뒤 다나에와 안드로메다를 데리고 아르고스로 돌아와 우연한 일로 아크리시오스를 죽이게 되는데...
Danae with Nursemaid or Danae Receiving the Golden Rain, 1553–1554 by Titian
Oil on Canvas, 129 cm × 180 cm Museo del Prado, Madrid, Spain
Danae, 1700-1705 by Antonio Bellucci 149 x 159 cm
Oil on Canvas, Museum of Fine Arts, Budapest, Hungary
Danae, 1636 by Rembrandt 185 × 203 cm
Oil on Canvas, Hermitage Museum, St. Petersburg, Russia
Danae, 1612 by Artemisia Gentileschi 40.5 cm × 52.5 cm
Oil on Canvas, Saint Louis Art Museum, St. Louis (Missouri), USA
Danae, 1891 by Alexandre-Jacques Chantron 173 x 116.5 cm
Oil on Canvas, Museum of Fine Arts of Rennes, Rennes, France
The Kiss 1908
The Kiss. 1907-1908. 180 x 180 cm. The Österreichische Galerie Belvedere, Vienna
많은 사람들은 이 작품을 보고 그에게 빠져들기 시작하는 클림트의 대표작이다. 화려한 황금빛 색채감이 보는 이로 하여금 눈을 떼지 못하게 하는 이 작품은 그의 그림 중 가장 유명하고 대중적이다.
이 그림은 너무나 독창적이여서 다른 작품과는 확연이 구분이 됩니다. 먼저 눈에 띄는 것은 화면 전체에서 반짝이는 황홀한 금빛 입니다. 그리고 어떠한 생각을 할 틈도 주지 않고 작품은 우리의 눈을 스스로에게 빠져들게 합니다. 꿈 속 세상인 듯 온통 금빛이 반짝이는 허공에서 한 쌍의 남녀가 격렬하게 키스를 하고 있습니다. 시간은 순간에 멈춰 있고 금빛 잎사귀의 꽃들은 이 키스의 존재를 노래하는 것 같습니다.
작가는 이 작품에 실제 금을 사용하였습니다. 어떤 방법으로 금을 입혔는지는 알 수 없지만 그에 작품 키스에는 총 8종류의 금박이 사용되었다고 합니다. 이 그림은 '클림트의 황금시대'라고 불리는 시대에 그려졌습니다. 그림에서 뿜어져 나오는 뜨거운 에로틱함과 화려함은 황금빛에서 비롯한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황금색은 권위와 부, 신성함과 관련이 있는 색입니다. 그리고 또 다른 것과도 관련이 있는데, 바로 '욕망'입니다. 그렇다고 황금색에 부정적인 의미가 강하다는 것은 아닙니다. 회화 속 밝은 노랑색은 긍정적인 의미로 사용되는 일이 많습니다. 햇살이라던지 추운 겨울을 이겨내고 봄을 알리는 개나리 꽃처럼 말이지요.
1908년 5월 쿤스트샤우 전시회에 이 작품이 공개 되었을 때 대중의 반응은 뜨거웠습니다. 그리고 오스트리아 국립미술관은 바로 이 작품을 구입하였습니다. 남녀의 사랑을 상징하는 이 신비의 그림은 지금도 수많은 연인들을 오스트리아 미술관으로 불러 모으고 있습니다. 클림트의 '키스'는 국가적인 보물로써 그 가치가 어마어마해서 외국에서 전시되지 않습니다. 이 그림을 보기 위해서는 오스트리아에 가야만 하지요.
많은 여성들은 이런 말을 한다고 하는군요. " 한번은 이런 키스를 받아보고 싶다" 라고...
이쯤되면 우리는 작품에 대한 궁금증과 함께 작가에 대한 궁금증이 생기게 될 것입니다. 그런데 이 작가에 관해서 알려진 것이 거의 없습니다. 작가는 자신의 사생활이 알려지는 것을 원치 않았습니다. 작가는 한번도 자신의 작품에 관하여 설명한적이 없고, 인터뷰도 거부 하였습니다. 그 흔한 자화상 하나 그리지 않았습니다. 이런 말을 하긴했지요.
"나를 알고 싶으면 나의 그림을 봐라"
하는수 없이 우리는 그의 작품을 통해 그를 상상할 수 밖에 없습니다. 하지만 재미있는 것은 이 키스를 소장하고 있는 오스트리아 미술관에서 조차 이 작품을 궁금해 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 이유는 끊임없이 몰려드는 관람객 덕분에 작품을 분석해볼 시간이 없다는군요.
그림 속 남성과 여성은 형형색색의 꽃들이 흩뿌려진 공간에 서 있습니다. 그들이 있는 공간이 어디인지 짐작할 수 있는 어떠한 단서도 존재하지 않습니다. 꿈속의 공간처럼 이 둘만을 위한 장소라는 느낌이 듭니다. 둘 다 머리에 꽃 장식을 하고 있습니다. 이 남성은 여자의 머리를 잡고 자신을 향하게 하고 있는데 이런 부분에서 남성성이 강조됩니다. 남성성을 부각시키는 요소가 더 있습니다.
두 연인의 옷을 주목해주시길 바랍니다. 여성의 옷은 곡선, 원, 화려한 색으로 이루어져 여성스러움을 나타내고 있습니다. 반면에 남성의 옷은 직사각형, 검정색 같은 요소로 남성스러움을 나타내고 있습니다. 서로 상반되는 패턴이지만 오묘한 조화를 이루고 있는 모습이 보이시나요? 그것이 바로 여성과 남성이 아닐까요?
여자와 남자는 아주 다릅니다. 하지만 여자와 남자가 사랑한다는 것은 자연스러운 조화이며 그 어떤 그림보다 아름다운 그림입니다. 아무리 달라도 서로 사랑할 수 밖에 없는게 여자와 남자입니다. 이렇게 위태롭고 불안전한 상황에서도 황홀할 수 있다는 것이 사랑이기도 하지요. 이들이 서 있는 곳은 보시다시피 평지가 아닙니다. 자칫하면 떨어질 것 같은 낭떠러지로 보이는군요. 그 낭떠러지 끝에 여성의 발이 아슬아슬하게 걸쳐져 있습니다.
개인적으로 여러 생각이 많이 들던 그림입니다. 사랑이 상처를 주거나 위험을 초래하게 할 수도 있지만 사랑을 할 때 만큼은 아름다운 황금빛 세상에 살고 있다고 느낄 수 있지요. 마음에 박힌 못 때문에 황금빛 세상을 거부하는 사람도 있을 수 있겠고 여러 부류의 생각을 가진 사람들이 있을 수 있겠습니다. (생략)
이 작품에서는 기존과 다른 양상이 전개되는데 남성을 지배하는 여성의 이미지가 순종적인 여성상으로 변화하고 있는 것을 엿볼 수 있다. 여성은 자신을 포기한 듯 남성에게 기대고 있고, 성적인 요소는 그녀가 입은 가운의 흐름을 통해 희미하게 드러날 뿐이다. 이 작품은 포옹과 키스라는 성욕을 암시하는 금기의 제재를 갖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위와 같은 표면적인 이유 때문에 검열을 피해갈 수 있었다. 청교도적인 빈 부르주아의 위선적인 모습에 거울을 들이대었던 클림트는 이 작품으로 대중들의 열광적인 지지를 받게 되었다. 그림의 모델은 연인 에밀리에 플뢰게를 안고 있는 클림트 자신이었다.
이제 막 성숙에 눈을 뗀 어려보이는 여자와 그녀에게 키스하고 있는 한 남자의 정열을 화려하게 표현하고 있으며 남자는 강한 팔로 여자를 감싸고 있고, 여자는 표정으로 감미로운 키스의 절정을 보여주고 있다. 벌써 한 세기 전에 그려진 그림이지만 아직도 많은 사람에게 영원한 사랑의 이미지로서 남을 수 있다는 것, 이것이 바로 이 그림이 가진 가장 큰 매력이라고 할 수 있다. 키 작은 풀꽃이 만발한 언덕 위에 두 연인이 서로에게 의지한 채 서 있다. 짧은 순간에 도취하여 지그시 두 눈을 감은 여인 하지만 그 순간의 감흥이 얼마나 큰지는 말려들어가는 손끝을 통해서 알 수 있다.
금빛으로 화려하게 장식된 커다란 가운은 마치 후광처럼 짧은 순간의 감흥을 더해주고 두 사람은 하늘을 향해 떠오르는 듯한 느낌을 갖게 한다. 하나인듯 하지만 결국 엄연히 다른 둘이 존재함을 보여주는 것은 패턴화된 장식을 통해서다. 남성의 옷에는 직사각형의 장식을 넣어서 남성성을 드러냈고 여성에게는 둥근 원형의 장식을 넣어서 여성성을 강조했다. 하지만, 두 사람을 둘러싼 큰 가운을 자세히 들여다보면 남성의 상징을 연상시킨다는 사실을 알게 될 것이다. 결국, 남성 안에 남성성과 여성성이 동시에 존재함을 암시하는 것이다. 남성 안에 있는 남성성과 여성성의 진정한 화해. 그리고 여성에 대한 이해와 존경을 통해서만이 진정 남성으로서의 정체성을 찾을 수 있다는 메시지가 담겨 있는 것이다. 궁극적인 화해의 이미지는 입맞춤인 것이다.
이 그림을 통해 클림트가 말하려고 했던 것은 남성과 여성의 화해를 통한 영원한 사랑이다. 하지만, 그건 결코 현실에서는 이루어질 수 없는 꿈에 불과하다는 사실을 자신은 알고 있었던 것 같다. 클림트 자신과 에밀리의 이루어질 수 없는 사랑처럼. 이 그림은 분명히 사랑을 통한 화해에 대해서 말하고 있지만 결코 따뜻하거나 희망적이라는 느낌을 주지 못한다. 관자를 향해 아니 세상을 향해 매몰차게 돌려져 있는 남자의 머리와 창백한 얼굴로 세상으로 통하는 문을 닫아버린 듯 꼭 감은 두 눈의 여자의 얼굴에서 오히려 소외감과 우울함을 느끼게 한다.
클림트는 포옹이라는 주제를 그 유명한 〈키스〉에서 전개하였다. 클림트의 '황금시대'를 대표하는 〈키스〉는 전형적인 분리파 작품이라고도 말할 수 있으며 남성과 여성 사이의 조화와 통합을 거듭 명확하게 드러내는 상징이 되었다. 사람들은 〈키스〉를 약간 역설적인 측면에서 〈모나리자〉와 비교하기도 했는데 두 작품 모두 복잡한 의미로 보는 사람을 매료하기 때문이다. 한편 이 그림을 통해 클림트가 새로운 단계에 도달했다고 보는 견해도 있다. 이제까지는 무엇보다 남성과 여성의 투쟁을 주제로 삼았던 클림트가 드디어 두 성의 통합을 그려내는 경지에 이르렀기 때문이다.
반면 이에 대해서 클림트가 자신의 세계관을 바꾼 것이 아니라고 주장하는 평자도 있다. 따라서 이 그림도 남녀 사이의 긴장 관계에서 발생하는 불만이 더욱 정교하게 묘사되고 있을 뿐이라고 말한다. 그렇다면 남성은 사각형, 여성은 원형의 장식 패턴을 사용해 대조한 것은 상호 보완을 의미하는 것일까, 아니면 적대적인 관계를 의미하는 것일까 ?
두 사람은 포옹을 하고 있지만 마치 어떤 관계도 없는 것처럼 서로 일정한 거리를 두고 있는 것 같지는 않은가 ? 결국 이 그림의 주역은 남성이며 입맞춤의 주도권도 남성이 갖고 있음이 명확하게 드러난다. 여성은 저항하지는 않지만 양손을 꽉 움켜쥐고 있으며 긴장한 발가락은 바위에 쏙 매달려 있다. 이것은 욕망 때문일까, 아니면 분노 때문일까 ?
클림트는 영원불변한 아담과 이브의 모습에 존재하는 관계의 모순을 잘 알고 있었다. 그래서 자기 자신을 연인 에멜리에 플뢰게를 안고 있는 아담으로 그렸던 것이다. 포옹에서 친밀감이 느껴지건 거리감이 느껴지건 간에 이 그림이 주는 에로틱한 충격은 인물을 감싸고 있는 의상에 의해 약화되고 있다. 클림트의 천부적인 색채배치는 동로마제국의 필사본 장식가를 연상케 한다. 화려한 장식을 선호했던 클림트는 친밀한 정경을 마치 만화경을 통해 보는 것 같은 세계로 표현한다. 또한 넘치는 금빛과 값비싼 재료는 이 회화에 숨이 막힐 듯한 독특한 분위기를 더해준다.
이런 식으로 작품이 풍기는 아우라는 검열을 피하는 수단이 되었을 뿐만 아니라 대중의 열광적인 찬사를 받았고 금욕적인 부르주아의 갈채마저 얻었다. 결국 이러한 '대성공'을 통해 클림트는 현대 미술의 공헌자로 인정받게 됐다. 〈키스〉가 전시되는 1908년, 오스트리아 황실은 종합미술전이 끝나기 전에 이 작품을 구입했다.
[ 구스타프 클림트 (마로니에북스) ]
빈 벨베데레 궁전의 오스트리아 미술관에 소장된 이 작품은 20세기 초에 제작된 가장 흥미로운 작품 중 하나로 꼽히고 있다. 클림트는 개인적으로 형상과 배경의 관계에 대한 완벽의 경지에 다다를 정도로 철저히 연구했다. 이를 통해 서로 끌어안고 있는 두 연인에게 매우 감각적이고 독특한 분위기와 관능적인 배경을 만들어주고 있다. 이것은 클림트의 꼼꼼한 장식적인 스타일의 승리이며 라벤나의 모자이크화를 연상시킨다.
두 연인은 금으로 된 덮개를 덮고 있는 것처럼 머리와 손만 곁으로 내놓고 있다. 클림트는 아르누보와의 공통점이기도 한 색채와 금박의 장식, 상징주의, 분리파를 결합시켜 이 걸작을 만들었다. 입맞춤은 오랜 세월 동안 그 의미가 변하지 않는 인간의 중요한 몸짓 중 하나이다. 이 그림은 키스에 대한 다양한 상징과 내포된 의미를 담음으로써 그 중요성을 한층 더 부각하고 있다. 클림트의 그림은 남성과 여성의 관계에 대한 지극히 ‘낭만적인’ 관점과 영원히 지속될 듯한 느낌을 전달한다.
반면 뭉크, 툴루즈-로트렉 같은 동시대 화가들의 작품들은 전혀 다른 방향에 있다. 수세기 동안 정숙함과 우아함이 지배적이었던 경향에서 이 화가들은 키스의 또 다른 면을 파헤쳤다. 그들의 입맞춤은 한쪽이 다른 한쪽을 전적으로 소유하다시피 지배하는 야만적이고 탐욕적이며, 흡혈귀처럼 착취하는 측면을 상징하고 있었다. 샤갈과 마티스의 작품에서처럼 클림트도 입맞춤의 시적이고 달콤한 면을 되살려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죽음의 키스와 진정한 사랑의 키스는 동일한 성격을 가지고 있다. 키스이후 모든 것이 달라진다.
ㅇ 연인의 얼굴은 외부의 금빛 덮개에 의해 더욱 두드러진다. 여기서 클림트는 연인의 표정과 감정을 강조하기 위해서 작품의 나머지 부분과는 전혀 다른 회화기법을 선택했다. 상징주의 회화에 등장하는 영웅들처럼 두 인물은 머리에 화환을 쓰고 있다
ㅇ 밀하게 그려진 두 연인의 2차원적인 옷은 상징적인 의미로 가득하며, 자유롭고 장식적인 부속물처럼 묘사되고 있다. 남성 외투의 곁에는 금색을 배경으로 검정색과 흰색의 직사각형 패턴이 교차되고 있는 반면, 여성 뒤로 보이는 안감은 포옹의 원형의 형태를 강조하는 나선 모티프로 장식되어 있다.
ㅇ 꽃이 흩뿌려져 있는 부분이 갑자기 끝나고 소녀의 발이 땅의 가장자리에 붙어 있는 반면 황금빛 배경은 갈라진 절벽의 인상을 준다. 허공에는 작가의 서명이 떠 있다. 두 연인은 위태로운 상황에 처해 있다. 클림트는 젊음의 덧없음과 사랑하기에 가장 좋은 시기는 빠르게 지나가 버린다는 고전적인 주제를 환기시키고 있다.
ㅇ 클림트는 다른 미술 전통에 대한 무수한 암시를 남기고 있는 바, 꽃밭은 라벤나에서 가까운 클라세의 산 아폴리나레 교회에 장식된 비잔틴 모자이크에 대한 찬사이며, 또한 보티첼리〈봄〉에 나오는 인문주의적인 알레고리를 연상시킨다. 클림트는 일년 중 한 계절만이 아니라 영혼의 한 계절을 그리고 있다.
[천년의 그림여행 (예경)]
1909년 두 번째 쿤스트 쇼에서는 당대 유럽 회화에 대한 탐색이 행해졌다.
코코슈카의 그림뿐 아니라 에곤 쉴레의 그림도 포함되었던 이 전시는 클림트가 기획한 마지막 전시회였다.
가을에 그는 파리로 여행했고, 계속해서 스페인으로 갔다.
클림트의 "황금 양식" 시기가 막을 내렸다.
크림트는 대표작인 <키스>가 발표된 1908년을 기점으로 그의 황금시대를 종료한다.
"장식은 이제 우리 문화와 아무런 유기적 관련을 맺지 못한다.
장식은 더 이상 진보할 수 없고, 그러므로 지진아적, 비정상적 현상에 속하는 것이다."
라는 말을 남기고...
그리고 새로 발표한 작품이 Judith II. 전형적인 아르누보 스타일의 작품이다.
하지만 그의 그림은 최후의 순간까지 관능성과 장식성을 완전히 벗어날 수는 없었다.
Judith II (Salomé) 1909
Judith II (Salomé) 1909, Oil on canvas, (178 x 46 cm), Galleria d'Arte Moderne, Venice
클림트는 1909년 또 한 번 아델레를 모델로 <유디트2>를 제작했다. 세로로 긴 그림인데 이런 형식은 일본화에서 힌트를 얻은 것이다. 극동적인 요소는 그의 서명에서도 볼 수 있는데 마치 그림에 낙관을 채우듯 화면 왼쪽 하단에 금색 네모 안에 두 줄로 'GUSTAV KLIMT'가 새겨져 있다.
작품에서는 금색 바탕은 최대한 줄어들었지만, 좌우로 두껍게 짠 액자를 금색으로 칠해 여전히 '황금 양식'의 연장선에 있음을 보여준다. 여기서도 <아델레 블로흐 바우어의 초상 1>에서와 같이 모자이크 형식이 나타난다.
가슴을 드러낸 유딧은 경직해 있는 듯 하지만, 옷자락을 쥔 손이나 흰색 곡선은 그녀가 춤을 추고 있음을 암시한다. 그녀는 왼손으로 목이 베어진 홀로페르네스의 머리카락을 움켜잡고 있다. 이렇게 춤을 춘다는 것은 세례 요한을 죽이기 위한 살로메에 관한 내용이지 유딧과는 상관이 없다.
완력으로 자신을 겁탈한 남자의 목을 벤 후, 그 머리를 들고 승리의 춤을 추는 유딧의 얼굴 표정을 보자. 두 눈은 무아지경에 빠진 듯 보이며, 손가락은 희열의 경련이라도 난 듯 잔뜩 구부러져 있다. 사실 아델레는 사고로 손가락 하나를 펼 수 없었다. 그녀는 그 사실이 드러나지 않도록 곧잘 손가락을 모아 쥐었다고 한다.
사실 일반적인 서양화에서 잘려진 남자의 얼굴과 칼을 든 여인의 그림에서는 그 주인공이 유딧인지 살로메인지 구별이 가지 않을 때가 많다. 두 인물이 도덕적으로 서로 반대편에 서 있지만 클림트는 왜 살로메와 같은 일반적인 팜므 파탈을 그리면서 굳이 유딧이라는 이름을 붙였을까?
그것은 바로 유딧이 직접 행동했기 때문이다. 아무리 애국심에서 비롯된 살인이지만, 얼마나 단호했으면 직접 대검으로 한 사내의 목을 베어버릴 수 있을 것인가? 바로 이 대목에서 유딧이 '치명적인 여인'이 된다. 그래서 유딧의 미덕인 정숙함과 높은 신앙심이 베일 뒤로 가려지고 마는 것이다.
아델레 블로흐 바우어는 자신을 대상으로 그려진 두 점의 유딧 그림에 스스럼이 없었던 것으로 보인다. 적어도 그들은 20세기 모더니즘을 이끌어가는 부유한 엘리트였으니까. 그녀는 그 외에도 클림트가 그린 <키스>의 여주인공이 자신이라고 주장했다고도 한다.
아델레 블로흐 바우어는 1925년 1월 24일 마흔넷의 나이로 남편보다 일찍 사망했다.
그녀는 매우 진보적인 여성이었지만, 당시 서양은 여자의 교육과 권리에 매우 인색했다. 그녀는 세상에 대한 호기심이 많았지만 남자들과 동등한 교육을 받지 못했다. 하지만 재력이 풍부했던 그녀는 자신의 저택을 개방하여 문학과 예술, 정치계 명사들을 초대했다.
그녀는 그들에게 배우며 스스로 깨우쳐가던 중 사회민주주의 노선의 영향을 받았다. 그래서 죽을 때 카톨릭의 전통적인 장례를 거부하고 화장할 것을 유언으로 남겼으며 자신이 소장한 클림트의 그림을 사회로 환언하겠다며 빈의 현대 갤러리에 기증했다.
- 홍진경 저, 인간의 얼굴 그림으로 읽기 중
Seal for Gustav Klimt, 1907~09
Josef hoffmann이 클림트에게 선물한 도장이다. 금박을 살짝 입힌 은과 공작석으로 만든 이 도장은 호프만의 디자인과 비엔나 워크샵의 세공술의 기막힌 조화를 이루었다. 현재 개인이 소장하고 있다고 한다. 군데 군데 벗겨진 금박에서 클림트의 손길이 고스란히 느껴지는 듯 하다.
1910년 클림트는 제9회 베니스 비엔날레에 작품을 전시했고, 프라하에서 독일의 화가연맹과 함께 전시했다.
슈토클레트 저택(Palace Stoclet)의 벽화를 위한 스케치를 완성하였고, 빈 공방이 이를 제작하였다.
'베니스 비엔날레'에서 그는 구스타프 쿠르베, 오귀스트, 르느와르와 더불어 그만의 개인 전시실을 갖는 영광을 누리기도 했다.
그의 말년에 찾아든 명성은 그의 호반 생활과 더불어 분명 평화롭기 그지 없는 일이었을 것이다.
그는 이 무렵 수많은 풍경화들을 남겼는데 <자작나무가 있는 농가>, <언덕 위의 정원>, <스클로스 캄머 정원의 길>,
<아터 호수 근처의 운터아크 교회> 같은 작품들이 이 무렵의 것들이다.
클림트는 모두 220여점의 작품을 남겼는데 그 중 1/4이 풍경화이다. 대부분 클림트가 1900년에서 1916년까지
그는 클림트에게 저택의 식당을 장식할 모자이크 장식화를 의뢰하였고, 이 그림은 최고의 걸작으로 평가받고 있다.
클림트는 후원자의 풍부한 재정 덕분에 값비싼 재료를 이용하여 모자이크를 완성했다.
1910년 유리, 산호, 자개, 준보석 등을 사용한 클림트의 모자이크 도안이 완성되었고, 빈 공방이 이를 제작하였다.
식당 양쪽 긴 벽면에 장식된 생명의 나무는 구상적 표현이 전혀 없는 추상적인 형태로 이루어져 있는데, 이는 클림트 회화에서 볼 수 없는 특이한 작품이다.
Palais Stocklet, Brussels, Belgium. A collaboration between Josef Hoffman and Gustav Klimt
클림트가 금융 재벌 스토클레의 다이닝룸에 거대하고 몽환적인 '생명의 나무'를 금빛으로 벽에 그려넣었다. 한 가정의 강복을 기원하며..
나선형으로 퍼져나가는 가운데 부분의 나무가 아주 인상적 인데 이 나무를 흔히 '생명의 나무'라고 부른다.
소용돌이 치는 나뭇가지는 고대 신화에서 유래된 상징으로 생명의 연속성, 삶의 보편적인 순환을 의미한다고 하며
유리, 자개, 산호 등으로 모자이크 장식되어 아주 화려하다.
실제의 모습입니다.
View of the dinnig room (1914)
Embrace (포옹)
Expectation (기다림)
Tree of Life (생명의 나무)
Fulfilment (성취)
End of Wall
스토클레 저택 식당의 <생명의 나무>의 부분으로, <기다림>의 맞은편에 있는 작품입니다. 전체적으로 동양풍의 의상은 클림트의 오리엔탈리즘과 비잔틴 취향을 짙게 나타내고 있습니다.
사방으로 뻗어나간 가지들은 복잡하기 그지없는 삶의 면면들을 표현하고 있고 그안에 꿈꾸듯 서있는 두 연인은 삶을 초월하여 체념한 듯 서로에게 집착하며 서 있습니다. <입맞춤>이나 <사랑>이라는 주제에 대한 클림트의 집착이 이때부터 시작된 것으로 보여집니다.
유일하게 얼굴과 손이 구상적으로 표현됐는데, 생명의 나무에 휘감겨 있는 여인은 고대 이집트의 벽화처럼 얼굴은 측면을 향하고 있고 몸은 정면을 향하고 있습니다. 이집트 풍의 인물과 추상화풍의 배경이 완벽하게 하나가 되고 있는 작품입니다.
식당 양쪽 긴 벽면에 장식된 생명의 나무는 구상적 표현이 전혀 없는 추상적인 형태로 이루어져 있는데, 이는 클림트 회화에서 볼 수 없는 특이한 작품입니다.
아홉면의 벽화는 양식화된 모티프인 <생명의 나무>와 추상적, 구상적 모티프인 <기다림>과 <성취>가 혼합되어 있는데, 따라서 <기다림>을 설명할 때, <성취>를 빼놓을 수 없습니다.
<성취>가 사랑을 뜻한다면, <기다림>은 예술을 상징한다고 해석하며, 이로 인해 예술과 사랑은 떼어놓을 수 없는 운명이라는 암시를 묻어놓고 있습니다.
스토클레 저택 식당의 <생명의 나무>와 동떨어져서의 좁은 벽면에 있는 작품입니다. 상징주의에서 추상주의로 넘어가는 과정에 있는 작풉이라고 할 수 있을 겁니다.
'美의 상아탑' 이라는 별칭을 가지고 있는 스트클레 저택을 신축할 때 클림트는 식당의 벽면에 '생명의 나무'를 모티브로 한 "스트클레 프리즈"를 제작하였습니다. 이 생명수는 창세기에서 에덴 동산의 '선악과 나무' 바로 옆에 있던 나무로 요한 묵시록에 의하면 이교도에게 구원을 가져다 준다고 합니다.
"스트클레 프리즈"의 '생명의 나무'아래에는 연인 뿐만 아니라 이집트풍의 무희도 있습니다. '기다림'을 은유하는 무희는 춤을 추면서 생명의 나무와 융합하고 있습니다. 생명수 아래에서 사랑하는 연인이 깊이 '포옹'하고 있습니다. '충만'은 이 아름다운 장식 벽화의 한 부분입니다.
그러나 이전에 그렸던 클림트의 작품들과는 어떠한 연관성을 찾기는 힘듭니다. 그의 초기작품을 보면 고전주의 화풍의 영향으로 신화적인 요소를 그림의 주제로 많이 사용했는데, 유독 이 그림에서는 스토리보다는 장식성에 치중했던 것으로 보입니다.
이 그림에는 철학과 고대의 신화에 뿌리를 둔 요소들이 사용되었습니다. 하늘과 땅 그리고 지하세계 사이의 연결을 의미한다고 합니다.
그림에서 가장 이목이 집중되는 부분은 바로 소용돌이치는 나뭇가지의 모습입니다. 소용돌이치는 나뭇가지는 고대 신화에서 유래된 상징입니다. 생명의 영속성을 의미하지요.
이 특이한 나뭇가지는 나선형으로 돌며 기복을 이루고 있습니다. 이렇게 서로 꼬여 있는 듯 어지럽게 빙빙 도는 나뭇가지는 '인생의 복잡성'을 표현하고 있습니다. 긴 나뭇가지들은 빙빙 돌면서 하늘을 향해 올라가고 있습니다. 하지만 그 나무의 뿌리는 단단하게 땅에 결속되어 있습니다. 신화 속 하늘과 땅의 연결을 표현하고 있습니다.
또 이 나무는 '윤회'를 표현하기도 합니다. 생명이 태어나고 자라며 죽은 후 다시 땅으로 돌아가 태어난다는 미신은 불교뿐만 아니라 고대 여러 신화나 종교 속에서 자리 잡고 있었습니다. 영원한 삶을 살고 싶어 하는 인간의 염원을 조금이라도 해소해 줄 수 있었던 신념이지요.
이 생명의 나무는 여성상과 남성상의 조화를 표현한다고 하기도 하고 또 남성의 미덕에 대해서만 표현하고 있다는 주장으로 의견이 분분합니다. 생명의 자양분이나 보살핌, 성장은 여성상에 가깝고 나무는 남근상의 표현이라 볼 수 있으며 이 둘의 결합이 생명을 탄생하게 한다는 주장도 신빙성 있어 보입니다.
나무의 가운데 부분에 검은 새가 앉아 있는 모습도 발견하셨을텐데요. 검은 새는 많은 문화권에서 죽음의 의미로 사용됩니다. 생명의 시작이 있다면 그와 동시에 끝도 있음을 지각하게 해 주는 요소입니다. 감상자의 시선을 사로잡으며 소용돌이치는 나뭇가지들은 생명의 영속성에 대해 생각해보며 한참을 바라보게 합니다.
1905-1909 Mixed Media 193.5 x 115 cm, Austrian Museum of Applied Arts, Vienna, Austria
위의 사진들은 구글아트에서 이 초안을 캡쳐한 것입니다. 원본 크기의 그림에서는 스케치와 구상을 위한 메모들도 심심치 않게 찾아볼 수 있습니다.
Adele Bloch-Bauer II. 1912
Adele Bloch-Bauer II. 1912. 190 x 120 cm. Private collection
클림트와 같이 했던 그녀의 첫 번째 작품 속에서 그녀는 앉아 있었다. 그러나 두 번째 작품속의 그녀는 서 있다. 그리고 전작이 전성기와 비잔틴 미술이 강하게 들어간 작품이라면 이 작품은 배경으로 존재하는 기마병사와 사람들의 의복 그리고 가옥의 모습 등이 모두 동양풍으로 이루어져 있다. 클림트는 배경을 색에 따라서 자주색, 붉은색, 분홍색과 초록색으로 나누었으며 분리된 배경들 속에서 사람과 꽃을 분리하여 그려 넣었다.
첫 번째 작품과의 시간의 간극이 5년이었다는 점을 감안한다면 첫 번째 작품과 두 번째 작품이 전혀 다른 방식으로 그려졌음을 이해할 수 있다. 한 미술사학자는 이 그림을 통해서 관람자에게 보여주는 변화를 ‘경의에 찬 시작’이라고 말하였다. ‘경의에 찬 시작’이라는 것은 클림트가 이제 부드럽고 자연스러운 초상 그림을 그리는 새로운 회화 세계에 발을 들여놓은 것을 표현한 것으로 볼 수 있다. 이집트 신관의 모습을 본뜬 구성이나 그림에서 풍기는 분위기가 그 동안 클림트의 작품세계에 항상 존재해 왔던 환상적 이미지와 신화적 세계관에서 벗어난 것이다.
이 작품에서 섬세하고 생기있는 여인의 모습을 우아하게 창조하고 있다. 턱까지 올라오는 긴 원피스 드레스가 상체를 더울 길게 보이도록 만들어주고 있다. 깃털 달린 커다란 검은 모자와 함께 긴 보아형의 테두리를 한 푸른색 모피 장식의 솔은 격조 높은 멋을 유동적인 곡선으로 표현하고 있다. 이 의상은 기능적인 측면보다 순수하게 미적 감각과 장식적인 측면이 강조된 개량의상이라 할 수 있다.
클림트는 이 초상에서 에로티시즘을 그다지 의식하지 않고 있다. 풋풋한 소녀와 같은 이미지로 아델레를 기억하려는 클림트의 의지가 엿보이는 그림이다.
그의 작업실이 헐리게 됨에 따라 빈 13구역의 Feldm hlgasse에 새로운 작업실을 얻었다.
1912년 드레스덴에서 열린 미술 대전에 참가하였다. 에곤 쉴레는 자화상을 그렸고, 클림트는 <은둔자>를 전시했다.
Arpad Weixlg rtner가 클림트에 대한 장문의 글을 썼고, 잡지 <> 35호에 실렸다.
1913년 부다페스트, 뮌헨, 만하임 등지에서 열린 전시회에 참가함.
1914년 브뤼셀로 가서 슈토클레트 저택의 벽화가 완성된 것을 직접 봄.
거기서 콩고 미술관을 방문하였고, 원시 조각에 강한 인상을 받음.
말년의 그는 1년을 둘로 나누어 살았다고 한다.
낮에는 아프리카풍의 스먹(Smock)을 입고 비엔나의 작업실에서 아침부터 밤늦게까지 작업에 몰두하고,
나머지 반은 동생의 처제인 의상 디자이너 에밀리에 플뢰게와 함께 아터 호반에서 고요한 명상과 휴식을 즐겼다.
아터호반에서 에밀리 플뢰게와 함께
1915년 바르바라 플뢰게의 초상화를 그림.
1916년 쉴레, 코코슈카, Faistauer와 함께 베를린 분리파 전시관에서 열린 오스트리아 화가 연맹의 전시회에 참가.
1917년 뮌헨과 빈 순수미술원의 명예회원으로 선출됨.
Death and Life, 1916
Death and Life, 1916, Oil on canvas, 178 x 198 cm, Private collection, Vienna
당시 오스트리아를 비롯한 유럽은 말세적 비관주의가 휩쓸고 있었다. 1908년에는 8만명 이상의 생명을 앗아간 지진이 일어났고, 2년 뒤에는 헬리혜성이 나타나 많은 이들을 공포로 몰아 갔으며 1912년에는 호화여객선 타이타닉 호가 침몰하는 사건 등등... 일련의 사건들로 인해 느껴졌던 죽음에 대한 공포를 클림트는 죽음의 신에 직면한 사람들로 표현하고 있다.
죽음과 삶 (Death and Life)
클림트는 1908년부터 이 그림을 그리기 시작하여 1916년에 완성하게 됩니다. 심혈을 기울인 작품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그림은 두 가지 성격으로 나뉘고 있습니다. 보시다시피 왼쪽은 어두운 쪽이고 오른쪽은 다채롭습니다.
왼쪽에 어두운 쪽에는 보란 듯이 죽음의 사신이 자리하며 기분 나쁜 미소를 보내고 있습니다. 누가 보아도 이 죽음의 사신은 좋지 않은 의미가 있을 것 같다고 생각할 것입니다. 제목의 표현 그대로 '죽음'을 상징하겠지요. 사신의 옷을 보니 십자가로 가득합니다. 종교적인 의미에서의 십자가가 아닌 죽음을 상징하는 십자가를 말하고 있는 것 같습니다. 공동묘지의 십자가들은 종교적인 의미가 느껴지기보다는 섬뜩한 느낌이 강한 것처럼 말이지요.
그런데 재미있게도 저는 섬뜩함 이외의 것도 보였습니다. 사신의 몸을 머리부터 발끝까지 흩어보실까요? 흔히들 이런 걸 '잘 빠진 라인(?)'이라고 하지요.. 그 표현이 딱 맞아떨어지는 것 같습니다. 클림트는 모든 것을 아름답고 예술적으로 표현하고 싶었나 봅니다. 그래서 그는 심지어 섬뜩하게 묘사되어야 할 죽음의 사신에게까지 아름다움을 부여했습니다. 물론 얼굴이 아름답다는 것은 아니지만 사신의 부드러운 윤곽과 굴곡은 나름 신경쓰여진 것 같습니다.
제목 그대로 왼쪽이 '죽음'을 말하고 있었다면 오른쪽은 당연히 '삶'을 표현하고 있을 것입니다. 어두운 톤의 배경 속의 순색의 자연스러운 조화는 마치 조각과 같이 입체적인 효과를 줍니다. 둥글고 부드러운 윤곽도 그 효과에 한 몫하고 있습니다. 인물들은 꽃으로 장식되어 있는 침대에 누워있습니다. 가장 상단에 보시면 아기와 아기를 팔로 감싸고 있는 여성이 보이는데 삶의 시작인 생명 탄생의 장면을 표현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그 주변을 잘 둘러보시면 삶의 마지막 부분인 노년기의 모습도 보입니다. 주름이 가득한 얼굴 뒤로 침울함이 짙게 깔려 있습니다.
여성으로 가득 차 있는 이곳에서 한 남성도 매우 돋보입니다. 근육질의 남자는 여자를 감싸고 있습니다. 처음에는 남녀 간의 '사랑'이라는 생각을 하였지만 보면 볼수록 그들에게 말 못할 아픔이 있는 것 같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아마도 '사랑'이 아니라 '고통'을 표현하고 있을 것 같습니다.
그중에서도 시선이 집중되는 부분은 바로 사신의 시선이었습니다. 호시탐탐 삶의 영역에서 벗어나는 이들을 죽음으로 데려가기를 노리고 있는 사신의 모습은 섬뜩합니다. 어느 누구도 죽음에서 안전할 수 없습니다. 방금 태어난 새로운 생명에게도 마찬가지이지요. 사신은 방금 태어난 생명에게 으시시한 미소를 보내고 있습니다.
사실 인간에게 생명이라는 기회가 주어졌을 때 이미 죽음이라는 기회도 동시에 기다리고 있는 법이지요. 어린아이에게든 노인에게든 죽음의 그림자는 언제든지 다가올 수 있습니다. 아름다울 줄만 알았던 이 그림이 죽음에 대한 경각심을 깨워주었네요.
삶이라는 것이 이 색처럼 아름답기도 한 것이지만 왼쪽에서 호시탐탐 기회를 노리는 죽음이 언제 찾아올지 모르니 더욱더 열심히 살아야겠습니다. 그렇다고 아직 찾아오지도 않은 죽음에 대해 두려워할 필요는 없겠지요. 조심만 한다면 불청객을 빨리 맞이할 경우는 없을 것입니다. 아름답기도 하지만 죽음 앞에선 아무 소용이 없는 인생. 그것이 더욱더 인생에 대해 감사하고 열심히 살아가게 할 수 있는 원동력이 되지 않을까 싶습니다. 이외에도 여러 가지 삶의 모습이 뒤엉켜 표현되어 있습니다.
클림트는 여성을 그리는 것을 너무나 좋아했기 때문에 이미 〈물뱀〉에서 묘사한 동생애적 요소처럼 여성끼리의 사랑을 표현하는 것도 주저하지 않았다. 하지만 남성을 그릴 때는 단지 필요한 경우에만 마지못해 그린 듯한 느낌을 주고 있다.
Leda. 1917
Leda (30" x 30") / FRAMED (33" x 33") Original 1917, Destroyed in 1945 fire at IMMENDORF PALACE
Leda (Unpainted Giclee)
Baby, 1917-1918
Baby, 1917-1918
1918년 제1차 세계대전의 종료를 한 해 앞둔 1918년 전유럽을 강타해 수백만 명의 목숨을 앗아간 스페인 독감은
바로 얼마전 뇌졸증으로 갑자기 쓰러져 신체 일부가 마비된 채 투병하던 클림트의 목숨을 거두어 갔다.
1월 11일 발작을 일으킨 후 회복되지 못하고 비엔나의 자택에서 2월 6일 사망, Hietzing의 묘지에 안장되었다.
그리고 그 뒤를 이어 건축가 오토 바그너도, '비엔나 공방'의 창설자인 디자이너 콜로만 모저,
임종의 클림트를 스케치했던 28세의 청년 에곤 실레도 갔다.
그의 작업실에는 아직 완성하지 못한 그림들이 많이 남아있었다. 미완성 유작으로 <유람>,<신부>,<아담과 이브> 등을 남겼다.
클림트 사후에 그의 재산은 클림트 자매와 에밀리 플뢰게에게 나누어졌다. 에밀리는 그에게 부친 편지들을 대다수 태워버렸다고 한다.
1938년 플뢰게의 아파트에 화재가 발생하여 클림트의 스케치북 50권이 소멸되었다.
클림트의 유작
미완성 작품은 클림트 말기 작업의 전형적인 성격을 보여주는 대표적인 예이다.
이전까지 보이던 금의 사용을, 존경했던 보나르나 마티스를 떠올리게 하는 생생한 색채로 대체했다.
한편 위에서 내려다 본 것 같은 피라미드와 만화경적 구도는 일본미술로부터 영향을 받은 것이다.
주제는 여전히 에로스와 삶의 순환을 다루고 있지만 더 이상 죽음의 어두운 그림자나 불쾌한 요소는 전혀 보이지 않는다.
부채를 든 여인
The Bride (unfinished) 1917-18 신부
〈신부〉는 에곤 실레의 영향이 드러나는 후기 작품인데 클림트의 갑작스러운 사망으로 인해 미완성으로 남았다. 장식 모티프의 범람은 이전만큼 힘이 넘치지는 않지만 캔버스를 기하학적으로 구조화했다는 점에서 중요하다. 묘사한 인물의 혼란은 추상적 요소에 의해 제어되고 있다.
이 후기작들은 분석하기가 점점 어려운데, 그 이유는 인물들의 궁극적인 목표를 간파할 수 없게 작품이 미완으로 남았기 때문이다. 〈신부〉에서 남성의 얼굴은 구성상 부차적 중요성만을 갖는다. 이 작품은 이미 다른 작품에서 표현되었던 일련의 모티프와 개념들의 총체로, 클림트의 예술적 고백이다. 그러므로 그녀의 꿈꾸는 얼굴은〈죽음과 삶〉, 〈처녀〉를 연상시킨다. 작품 왼쪽 아래의 누드는〈금붕어〉를 인용한 반면, 왼쪽 아기의 얼굴은〈요람〉의 아기 얼굴과 흡사하다.
반면 도바이에 따르면 신부 자신이 가진 몽환적 이미지의 화신인 오른쪽 인물은 참신하다. 준비 단계의 작업은 클림트가 자웅동체를 표현하려는 의도를 가지고 있었음을 보여주는 듯하다. 그러나 작업하면서 그는 오히려 자웅동체를 암시하는 남근 모티프를 치마에 남기면서도 여성성을 유지하고자 했다. 따라서 이 작품은 아직 미분화된 총체적 에로스의 초기 단계를 보여준다. 자웅동체는 프로이드의 가설에서 아동 성장의 첫 단계에서 성취한 욕망, 혹은 상반되는 양극 통합의 구현이다.
클림트의 <아담과 이브>에서 남성인 아담은 흑빛으로 질려 있고, 생기발랄한 이브 뒤에 숨어 있다. 아담이 마치 죽은 것처럼 눈을 감고 있는 반면에 이브는 마치 볼테면 맘껏 보라는 듯한 눈빛으로 정면을 응시하고 있다.
많은 평자들이 클림트의 작품을 비롯한 당대의 여러 예술작품들을 통해 당시 여성운동이 얼마나 커다란 공포를 불러 일으켰는지, 당시의 여성들이 아내이자 어머니로서의 본연의 의무를 방기하고 있는 듯한 느낌을 세상에 전하기 위해 얼마나 체계적으로 노력했는지를 살펴볼 수 있는 대목이다.
Adam and Eva (unfinished) 1917-1918 Oil on canvas, 175 x 60 cm. The Österreichische Galerie Belvedere, Vienna, Austria
클림트는 아담과 이브를 주제로 그릴 때조차 남성의 모습은 잘 드러나지 않게 표현했다. 이 작품에서는 남성을 장식물의 일종으로 취급하고 있다. 클림트는 고대 그리스의 항아리에 그려진 기법을 사용해 아담을 승리자의 모습을 한 이브보다 훨씬 어둡게 묘사했다. 이 그림의 명백한 주인공인 이브는 풍만한 육체로 세속적인 빈의 남성들을 유혹하고 있다.
“모든 예술은 에로틱하다.”
평생 예술적인 관음증 환자였고, 여성을 더없이 사랑한 에로스의 충복이었던 클림트 여인의 육체를 다양하게 표현하고자 했고 〈물뱀1, 2〉를 비롯해 죽기 직전의 작품 〈여자 친구들〉에 이르기까지 여성간의 사랑도 표현하였다. 그렇기에 클림트는 남성을 회화에 등장시키는 것은 꺼려했다.
남성을 묘사하더라도 〈아담과 이브〉라는 미완성 작품에서처럼 마치 자신이 남성을 그린 것을 후회하는 것처럼 보인다. 이 작품에서도 남성은 단순한 장식물이지 회화의 주인공은 아니다. 이 그림에서 강조한 것은 육감적인 몸매를 가진 빈의 여성을 떠올리게 만드는 풍만한 이브 쪽이다.
남성과 여성 인물은 심지어 피부색조차 다르게 표현했는데 이것은 고대 항아리의 그림에서 배운 기법이었다. 이전처럼 빽빽하게 밀집된 양식은 드러나지 않고 사진처럼 충실한 묘사는 자취를 감췄으며, 평면과 공간 표현 사이의 타협이 드러난다. 이제 팜 파탈은 손에 닿을 수 있는 존재가 되었다. 이제 그녀는 더욱 유순해졌으며 뭔가를 기다리고 있다.
"아담과 이브"는 그의 미완성작이자 대표작 중 하나입니다. 그림을 잘 보시면 느낄 수 있겠지만성경에서 나온 아담과 이브의 이미지에 화가의 이브에 대한 팜므파탈적인 상상력이 더해진 작품이라고 할 수 있을 겁니다.
어두운 배경만큼이나 어두운 아담의 표정과는 상반되게 금발의 머릿결과 아담에게는 무언가를 감추는 듯한 이브의 표정, 붉은 입술, 그리고 꽃과 표범 장식 등... 이 작품에 도덕적인 잣대를 들이댈 필요는 없습니다. 작가가 성경을 읽고 느낀 아담과 이브의 모습일 뿐이니까요.
이브는 순수와 관능의 경계를 아슬아슬하게 오갑니다. 묘하게 에로틱하고 퇴폐적인 향기를 뿜어낸다고 할까요. 어둠을 배경으로 서있는 아름다운 이브. 눈부시게 하얀 피부, 길게 늘어뜨린 매혹적인 금발, 붉게 상기된 뺨, 발그레한 입술… 터질 듯 부풀어 오른 성숙한 여인의 몸은 아네모네 꽃보다 더 매혹적입니다. 그녀는 심지어 나신인 것을 조금도 부끄러워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보란 듯이 당당하게 자신의 몸을 드러냅니다.
아직 부끄러움이 뭔지, 쾌락이 뭔지도 모르는 여인. 그런 이브를 보며 당황하는 것은 우리 자신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클림트의 이브 역시 팜므파탈의 전형입니다. 특히 우리의 시선을 피하지 않는 저 도발적인 눈동자는 그녀의 파괴적인 속성을 그대로 보여줍니다.
반면 아담은 마치 깊은 잠에 빠진 듯 눈을 감고 있습니다. 깊은 잠에 빠졌는지 눈을 감고 있는 남자, 그의 몸을 거의 다 가리며... 그는 마치 설익은 소녀의 아름다움에 매혹당해 스스로 파멸의 길을 선택한 중년의 남성처럼 보입니다. 여인의 향기에 취한 그는 완전히 이브의 포로가 되어 버렸습니다.
나신을 드러내고 서 있는 여자. 여자의 발 아래 아네모네 꽃들이 융단처럼 펼쳐져 있습니다. 꽃은 순결과 죄를 동시에 상징하죠. 이브에게 어울리는 상징입니다. 이브는 팜프파탈입니다. 남자를 타락시킬 정도로 사악하지만 매혹적인 여인이죠. 그러나 뱀을 만나기 전의 이브는 순수한 여인의 전형이었습니다. 클림트의 이브가 지닌 모습입니다.
정점과 선의 승리를 대변하는 존재였던 이스라엘의 여자 영웅 유디트를 팜므 파탈의 전형으로 만들었던 클림트가 정작 팜므파탈의 원조 격인 이브를 갓 태어난 아기처럼 순수하게 그려 놓았습니다.
《아담과 이브》는 클림트가 죽기 전 마지막으로 작업했던 작품으로 결국 미완성으로 남았습니다. 그러나 미완성에도 불구하고 순수와 퇴폐, 쾌락과 죽음, 관능과 고독의 공존과 그 긴장을 탁월하게 담아낸 작품으로 평가받고 있습니다.
Neue Galerie des Stadt Linz, Wolfgang-Gurlitt-Museum, Linz, Austria.
풍경화는 인물화와 우의화에 못지않게 클림트의 작품세계를 이해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한다. 다산을 상징하는 듯한 닭은 화면에 반부조처럼 붙어 있는데 이것은 초상화의 에로틱한 구성에 대응하는 것이다.
이 작품을 누구보다 면밀히 연구하였던 사람은 마리-호세 리히텐슈타인이다, 그의 연구에 따르면, 클림트는 작품 표면의 성질을 최대한 드러내면서 각각의 모티브들을 화면 속에 자연스럽게 조화시키는 방법을 찾은 흔적이 역력하다.
그는 세밀한 묘사 보다는 색깔 덩어리를 사용하여 표현한 닭들을 고요한 초원들 사이 사이에 배치하였다. 전경에 보이는 닭들을 뒤 편의 닭보다 더 크게 그려냈고 그러면서 동시에 구체적 표현을 최소화 시켜버리는 화법으로 화면 전체를 구성하였다. 초원의 패턴이 강조되어 있음으로 하여 닭들의 각기 다른 크기는 그저 미약한 원근 화법의 기능만을 표현하고 있는 것이다.
작품의 뒤 편에 서로 얽히고 설켜 흔들거리고 있는 과일 나무의 가지들과 화면 전체에 쓰인 같은 톤의 녹색은 작품의 깊이를 강조시키는 효과를 보여준다.
아터제 호수를 바라보면서 그린 그림으로 전체적으로 잔잔하게 그려진 색다른 느낌의 작품입니다. 아터제 호수의 풍경이 아련하게 다가오듯이 잔잔하게 그려냈는데 아터제 호수에서 늘 여름 휴가를 즐겼다는 클림트의 여유로음이 뭍어나온다고 여겨질정도로 호수를 바라보는 클림트의 따사로운 시선이 느껴집니다.
이성보다는 감성에 더 가까운 그림의 느낌이 물씬 드는 이 작품을 보면 클림트는 강렬하고 자극적이라기 보다는 오히려 부드럽고 섬세한 여성편향적 그림을 그리는 화가로 보여집니다. 아터제 호수에 애정을 가진 클림트의 따사로운 붓질이 이곳저곳에서 묻어나고 있습니다. 아마 그림을 그리면서 느꼈을 평안함과 안정도 묻어있을 것입니다. [불여우아빠]
Still Pond 1899, 74 x 74 cm
(캄머성의 고요한 호수)
The Swamp 1900
Farmhouse with Birch Trees. 1900
The Tall Poplar Trees. 1900
실제와는 다르게 비현실적인 모습으로 보입니다. 나무라기보다 길게 늘어뜨린 머리카락처럼 섬뜩해 보이기까지 합니다. 흐릿한 윤곽 처리와 밝은 색상은 꿈속의 장면처럼 몽환적이기도 합니다. 길이는 길지만 부러질 듯한 느낌보다는 유연하고 부드러워 엿가락처럼 휠 것 같습니다. 이 미루나무 또한 아름답고 에로틱한 이미지입니다. [불여우아빠]
Island in Attersee. 1901
Fruit Trees. 1901
이 그림은 '유실수'로 숲 속에 있는 과일나무를 그린 것입니다. 클림트가 '키스'같은 황금시대 그림으로 빛에 대한 효과를 연구한 후 다른 방법으로 빛의 효과를 극대화하기 위해 그린 작품이라고 합니다. 나무에 알록달록한 과일들이 매달려 있습니다. 다채로운 색상의 과일과 나뭇잎의 상쾌한 색상이 조화를 이루고 있습니다. 나무에 매달려 있는 과일들을 보니 색다른 기법으로 표현되어 있음을 알게 됩니다. 햇빛을 받아 빛나는 수면과 풀밭, 그리고 수직으로 통일되게 서 있는 과일나무들은 조용하고 아름다운 숲 속의 풍경의 진수를 보여줍니다. [불여우아빠]
Farmhouse in Kammer on Lake Attersee.
1901
Cows in a Stall. 1900-1. 75 x 76.5 cm.
Wolfgang-Gurlitt-Museum, Linz, Austria.
Pine Forest I. 1901
Pine Forest II. 1901
Beech Forest. 1902
하얀 살에 검게 상처가 아무는 듯한 자작나무는 언제 보아도 아름답습니다. 봄에는 그 꽃향기와 함께 그 생명이 더해지고 아지랑이가 피는 듯 색바랜 기억이 흐드러집니다. 가을 숲, 나무들 사이로는 낙엽 꽃이 피었습니다. 그 바스락거림이 이곳까지 전해져 외롭기도 하고, 떄로는 슬프기까지 한 마음이 느껴집니다. 신록으로 따뜻한 옷을 껴입고 있던 나무와 숲이 붉게 붉게 물들며 그 옷을 벗고, 본질을 드러내며 겨울을 맞이 합니다. [불여우아빠]
The Poplar Tree II. 1902-3 Approaching Thunderstorm(몰려오는 폭풍) 100 × 100 cm 빈, 레오폴트 미술관
'다가오는 폭풍과 거대한 미루나무'라는 다른 이름도 있습니다. 잿빛 먹구름과 폭풍이 몰려오고 있습니다. 먹구름 아래의 넓은 대지는 불안감에 휩싸이고 있습니다. 불안감의 중간에 서 있는 나무 두 그루는 위태로워 보입니다. 근경에는 낡고 작은 집 한 채와 미루나무가 있습니다. 이 미루나무 또한 위태로워 보이기도 하지만 묘한 긴장감과 함께 에로틱함도 선사해주고 있습니다.
사실 클림트에게서 '에로틱함'이란 뗄레야 뗄 수 없는 것이지요. 미루나무의 유연하고 부드러운 윤곽은 미적 아름다움이 강조되는 모습입니다. 폭풍 앞의 위태로운 나무의 이미지와는 달리 왠지 아름답고 예술적으로 느껴지는 이 작품, 클림트가 추구하던 아름다움이 풍경화에서도 빠지란 법은 없었습니다. [불여우아빠]
시인이자 에세이스트인 카를 크라우스는 ‘클림트의 작품에는 심지어는 풍경화에조차 에로티시즘이 존재한다’는 유명한 말을 남겼다.〈큰 포플라 나무 Ⅱ〉를 놓고 본다면 이 말은 정확하다.
베토벤의 교황곡 9번 마지막 악장을 마음대로 시각적으로 해석한 기념비적인 작품 〈베토벤 프리즈〉를 빈에 있는 요세프 마리아 올브리히의 빈 분리파 빌딩에 완성한지 1년 후 태어난 작품이다.〈베토벤 프리즈〉에서 클림트는 선의 관능을 장식과 성공적으로 결합하였으며, 이는 곧 이후로 제작하는 작품의 특징이 되었다.
〈큰 포플라 나무 Ⅱ〉에서는 마치 화염처럼 위로 솟구치는, 완전한 모호한 나무의 실루엣으로 표현되었다. 미세한 빨강색 점으로 가득한 이 나무는 남성과 여성 – 음경과 회음부 – 어느 쪽으로도 해석될 수 있으며 비평가인 베르너 호프만에 의하면 남성의 귀족적 고립을 대변하는, 매우 세심하게 고안한 상징물이라는 것이다.
확실이 이 작품은 클림트의 풍경화 중에서도 침울하고 불길한 작품이다. 얼룩덜룩하니 어둑한 하늘은 우울한 심리적 영향으로 무겁고, 화가의 내면은 물론 외부 세계에도 폭풍이 찾아올 것임을 암시한다. 전경에는 한 인물이 홀로 희미하게 불타는 집의 벽 앞에 서서 해골과도 같은 형태를 형성하고 있다.
클림트가 죽음과 섹슈얼리티를 하나의 이미지에 함께 집어넣은 것은 처음이 아니지만, 이토록 완벽하게 숨겨져 있는 것은 이 작품이 처음일 것이다.
Birch Trees. 1903. 110 x 110 cm. The Österreichische Galerie Belvedere, Vienna
Pear Tree. 1903
과수원의 과일 나무들입니다. 햇빛에 반짝이는 나뭇잎과 알록달록한 과일의 색이 너무 아름답습니다. 장식적이고 금빛찬연한 색으로 누드를 그렸던 그였기에 표현할 수있는 가히 빛의 교향곡입니다.
후기 인상파의 점묘화 같기도 하고 잭슨 폴록의 페인트 뿌린 추상화 같기도 합니다. 한참을 그 과일향에 취해 바라보다 아래로 시선이 내려와 조용하고 평화로운 풀밭에 시선이 다시 한동안 머뭅니다. 배나무 밑에 누워 풀내음에 흠뻑 취해보고 싶은 날입니다. [불여우아빠]
Roses under Trees. 1905
[나무 아래에 피어난 장미 나무]는 1904년에서 1905년 사이, 구스타프 클림트가 리츠버그에서 여름 휴가를 보내는동안 그렸던 픙경화들 가운데 최고의 작품입니다.
클림트의 풍경화는 전적으로 모티프에 입각한 작업을 지속했음에도 불구하고 점차 추상적으로 변화하는 특성을 보입니다. 그가 관찰한 내용들은 단지 하나의 자극으로만 활용된 것입니다. 그로 인해 작품의 진정한 주제는 그림 속에 나타나는 구조 그 자체에서 찾을 수 있습니다.
따라서 이 작품에서는 좁은 목초지에서 수평을 이루는 일군의 무리 위쪽에 드리워진 꽃무늬 장식이 전체 구성의 핵심을 이루고 있습니다. 아름다운 장미가 큰 점으로 표현되었습니다. [불여우아빠]
Garden of Flower.
1905-6
꽃으로 가득 찬 클림트의 정원을 그린 작품이다. 신비로운 힘이 깃들인 거대한 전체로서의 넓은 정원을 부분적으로 잘라내어 표현하였다. 클림트의 꽃은 모네의 수련처럼 공간을 풍부함으로 가득 채운다.
Country Garden with Sunflowers. 1905-1906. 110 x 110 cm. 벨데베레 박물관
고흐의 해바라기가 화가에게 가장 중요했던 열정을 의미하며 궁극적으로 광기와 죽음의 원인이 된 눈부신 태양을 상징한다. 그러나 클림트는 꽃을 활활 타오르는 불꽃으로 묘사하지는 않았다. 그의 해바라기는 신비스러운 영적 기운의 상징이었다. 즉 ‘사랑의 요정’이 입은 가운처럼 희미하게 반짝거리는 것이었다.
The Sunflower. Detail. 1907.
110 x 110 cm. Private collection
해바라기는 클림트의 풍경화에서 정적인 차원과 동적인 차원을 분명히 보여주는 좋은 예이다. 이 작품의 주제는 반 고흐에게서 영향을 받았으나 그 표현에 있어서는 클림트식으로 재탄생시킨 걸작이기도 하다.
작품 속 해바라기는 인물상 정도의 크기로 인간의 감정을 경험하고 있는 듯하다. 그림의 중앙에 우뚝 서 있는 해바라기가 마치 시선을 떨어뜨린 듯이 혹은 고개를 수그린 듯이 보이는 것을 발견하게 된다. 이것은 우리로 하여금 반 고흐의 해바라기와 에곤 실레의 해바라기 작품들을 연상시킨다. 그것들은 일종의 체념적 고독에 대한 풍경화이다.
형태로 보자면 꽃들을 지지대로 삼아 위로 오르는 형태는〈Fullfillment〉와〈키스(Kiss)〉등에서 보이는 남녀의 모습을 연상시키기도 한다. 또한 그가 그토록 많은 애착을 가졌던 여성들의 초상화를 연상시키기도 한다.〈해바라기〉는 클림트의 풍경화 중 가장 완벽한 상징성을 암시하는 작품이기도 하다.
'해바라기' 하면 고흐의 해바라기가 먼저 생각나기도 하지만 저는 클림트의 해바라기도 빼놓지 않습니다. 고흐의 해바라기와 클림트의 해바라기를 비교해보면 각자의 개성을 확연히 느낄 수 있습니다.
고흐는 해바라기를 꺾어 꽃병에 넣은 채 그림을 그렸습니다. 하지만 클림트의 해바라기는 정원 안에서 그대로 서 있습니다. 고흐가 해바라기 정물화를 그린 것이라면 클림트는 해바라기를 풍경 속의 한 요소로 그렸다고 할 수 있습니다.
또 고흐가 해바라기를 자신의 자화상의 의미로 그렸다면 클림트는 해바라기를 앤스로포모르픽 이미지로 그려냈습니다. 앤스로포모르픽 이미지로 그려냈다는 것은 해바라기를 의인화했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해바라기 주변으로 만발한 꽃밭은 환상적인 분위기를 자아냅니다. 그림을 감상하는 동안에도 이 꽃들은 더욱더 풍성해져 아름다운 정원을 만들어 낼 것 같다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해바라기 그림을 보면 생각이 나는 그림이 또 있습니다. '키스'의 두 연인입니다. 마치 저 해바라기는 '키스'의 두 연인과 같은 형태를 가지고 있습니다. 그렇기에 이 해바라기가 더욱더 앤스로포모르픽 이미지라는 생각도 들게 됩니다.
이 해바라기 그림은 모자이크 방식으로 구성되었으며 여인을 그리는 방식으로 꽃을 그렸다 [불여우아빠]
Poppy Field. 1907. 110 x 110 cm The Österreichische Galerie Belvedere, Vienna
클림트는 그림 전반에 걸쳐 엷은 초록에서부터 어두운 녹색에 이르기까지 이와 대조를 이루는 분홍색, 엷은 자주색, 노란색을함께 섞어가며 가볍게 두드려 그리는 붓질법으로 완성하였습니다. 이 무수한 반점들의 조합은 풍경화적인 요소를 흔적으로 남게하는 특성들로 녹아들었습니다.
나무줄기의 묘사와 다양한 형태의 잎사귀들 사이에서 나타나는 미세한 색상의 작품 속 장면을 실제 과수원으로 착각하게끔 만듭니다. 또한 하늘은 작품 최상단 좌우의 구석에서 보이는 좁은 공간을 통해서만 힐끗 보이고 있을 뿐입니다.
클림트는 인상주의 작가들과는 다르게 대기의 몽롱한 분위기가 자아내는 변화들에는 별 관심을 두지 않았습니다. 대신 그는 매우 개인적이면서 공식적인 언어를 만들고자 했던 프랑스의 회화적 지식을 사용하면서, 신인상주의자들의 창조적인 해석에서 많은 영감을 받았습니다.
결국 그의 화려한 장식적 표현들은 마치 그가 깊이 뿌리 내렸던 공허함의 전율에 압도된 것과 같이, 그의 풍경화를 무척 섬세한 화면을 통해 덮는 것으로 자리매김 되었습니다.
하지만, 클림트의 꽃밭을 바라보면서 그 벅차고 설레이는 마음만큼은 마치 꽃 밭의 한가운데 서있는 것처럼 또 직접 바라 보고있는 것처럼 느낄 수가 있습니다. 화려한 꽃밭 덕에 저 멀리 보이는 푸른 들판이 더욱 포근하게 느껴기만 합니다. [불여우아빠]
Schloss Kammer on the Attersee I. 1908
(Water Castle)
호숫가와 성을 그린 그림인데 그림의 절반은 성을, 나머지 절반은 물위에 비친 풍경을 그렸습니다.
저 멀리에는 하늘, 앞에는 나무나 초원 등의 전통적인 원근법을 배제한 작품으로 물 위에는 상아색의 벽과 녹색의 나뭇잎들이 비쳐서 잔잔하게 일렁이고 있습니다.
사람이 만든 성과 자연인 호수 즉 인공적인 것과 자연적인 풍경의 통합을 성공적으로 이루어낸 작품으로 여백없이 꽉차서 보는 이가 압도되는 듯한 클림트의 독특한 특징이 잘 살아나 있는작픔입니다.
클림트의 '모자이크 양식' 풍경화 중에서 아름다운 그림 중 하나입니다. 모자이크처럼 작은 붓질이 모여 하나의 그림을 구성하고 있으면서도 하나하나의 붓질이 전체 구성에 거슬리기는 커녕 잘 융화되어 절로 감탄사를 연발케 합니다.
그림의 형식과 기법이 하나로 녹아 있는 이 아름다운 그림 앞쪽에 펼쳐진 초원은 세심하게 장식된 융단처럼 부드럽습니다.
[불여우아빠]
1
1908년 이후 클림트는 주로 풍경화와 초상화를 많이 그렸다.
클림트는 일 년의 반은 비엔나에서 작업하고 반은 아테르의 호반에서 휴식과 명상을 즐겼다.
슐로스 캄머 공원, 아테르 호수 등을 그린 대부분의 풍경화들은 아테르 호수 주위의 풍광을 그린 것이다.
클림트의 풍경화는 점차 초기 입체파의 영향을 받은 모자이크와 태피스트리 양식으로 변화했다.
묘사하는 대상 (장소)은 건물과 호수가 결합돼 있거나 건물과 숲이 함께 있는 도회적인 풍경으로 변화했다.
캄머 성을 그리면서 클림트는 건축적 요소를 풍경 속에 통합하는, 다시 말해 자연과 인공적인 것을 통합하는 문제를 연구했다.
물에 비친 마을의 모습이 너무나 아름답습니다. 강가에 살고, 호숫가에 사는 건 누구에게나 꿈이겠지요. 거울처럼, 하늘과 마을과 사람들을 담아내는 강물은 화가에게도 큰 매력으로 다가왔을 겁니다. 잔잔한 호숫물이 만들어내는 깊은 색과 평화롭고 아름다운 마을의 풍경이 보는 이의 마음을 따뜻하게 해줍니다. 인간의 사랑과 성애에 집착했던 클림트가 사람들이 옹기종기 모여 사는 마을의 풍경을 그리며 느꼈을 또 다른 깊이있는 감정들이 그대로 전해지는 것 같습니다. [불여우아빠]
Schloss Kammer on the Attersee IV.
1910
Farmhouse in Upper Austria.
1911-12. 110 x 110 cm The Österreichische Galerie Belvedere, Vienna
Farm Garden with Crucifix, 1911-1912
Oil on Canvas, 110 x 110 cm
Private Collection (destroyed by fire, 1945)
십자가가 있는 농가의 뜰
나무들과 관목 덤불, 집은 형체가 불분명하여 신비한 느낌까지 줍니다. 그래서일까요, 전혀 사실적이지 않고 풍경이 모호하게 뒤섞인 듯한 이 그림에서 오히려 사실적인 그림이 줄 수 없는 어떤 것, 현상 배후에 있는 실제 혹은 진실이 어렴풋이 드러나 있습니다. 이처럼 실제와 진실이 환기되는 느낌을 받는 것은 이 그림이 가진 완벽한 조화 때문입니다. 그리고 이 실제와 진실은 결코 들추어서는 안 된다는 베일 뒤에 숨어 있는 이시스 여신상이 가진 의미와 통합니다.
[불여우아빠]
Orchard with Roses. 1911~12
Avenue of Schloss Kammer Park. 1912. 110 x 110cm 벨데베레 박물관
햇살을 가득 머금은 싱싱한 푸른 나무들은 하늘을 향해 힘차게 뻗어있고, 녹음 속에서 지저귀는 새소리가 귓가에 들리는 듯합니다. 고흐에게 영향을 받은 듯한 붓질과 밝고 화사한 색채가 충만합니다.
환희로 가득한 이 그림은 클림트가 말년에 사돈지간인 열두 살 연하의 에밀리 플뢰게와 정신적 동반자로 지내면서 그린 작품입니다. 그는 플뢰게와 번잡한 빈을 벗어나 아터제 호수에서 휴가를 보내며 평온한 시간을 보내곤 했습니다. [불여우아빠]
Apple Tree I. ca 1912. 110 x 110 cm Private collection.
아테제 호수 근처의 다양한 자연의 요소를 다루었지만, 이 작품에서 클림트는 단 한그루의 사과나무를 표현하였습니다. 실제 사과나무의 모습과 달리 나무의 줄기를 상세하게 표현하지는 않았습니다.
하지만 붉은 점처럼 표현되어 있는 사과와 이에 대비되는 청록색의 색점들, 즉 잎사귀의 대조가 두드러집니다. 그리고 사과 나무의 앞에는 흰색과, 보라색, 그리고 분홍샛 등 비슷한 계열의 정체모를 꽃들이 앞 다투어 피어 있습니다.
짧은 붓터치로 화면 전체가 표현되어 있다는 점에서 흡사 신인상주의 점묘기법과도 유사해 보입니다. 하지만 클림트가 인상주의의 빛에 대한 연구에 관심을 두지않았듯이, 신인상주의의 과학적 원리에도 의미를 두지 않았습니다.
이에 비해 클림트는 그저신인상주의의 표현방식, 즉 작은 붓 터치를 사용하여 만들어지는 다양한 질감에관심을 두었습니다. 이를 통하여 그의 작품속 터치들은 마치 장식적인 색점처럼 보입니다. [불여우아빠]
The Church in Cassone. 1913 110 x 110 cm Private Collection
클림트는 죽기 전에 풍경화에 몰두했습니다. 클림트의 풍경화는 우리가 아는 풍경화와 다른 파격적인 구도로 신선한 충격을 가져다줍니다.
잔잔한 수면과 수평으로 가지란히 배열된 주택들과 수직으로 솟아있는 사이프러스의 풍경은 넓고 안정된 느낌이며 조용하고 평화로운 느낌을 줍니다.
이 그림에서도 클림트의 특징인 빈틈없는 공간 활용이 보입니다. 빈틈없이 캔버스에 가득 찬 아름다운 풍경은 시선을 압도합니다.
이 그림은 압도적인 아름다움에 비례하게 압도적인 낙찰가를 자랑합니다. 2010년에 있었던 소더비 경매에서 이 그림은 505억 원에 낙찰되었습니다. [불여우아빠]
Malcesine on Lake Garda. 1913
110 x 110 cm Private Collection
클림트의 풍경화는 추상화와 사실화 사이의 외줄타기와도 같습니다. 화면의 윗 부분 3/4은 그것만으로는 무엇인지 알 수 없습니다.
하지만, 아래의 사실적인 묘사를 접하게 되면, 아! 추상화가 아니라 풍경이구나 하고 알게 됩니다. 그 순간, 납작하게만 보였던 면이 공간으로 환원되면서 아름답고 이국적인 유럽의 풍경을 즐길 수 있지요.
너무나 아름다운 그림들입니다. 사실 그의 인물화에서도 같은 기분을 느낄 수가 있습니다. "키스"그림에서도 문양과 화려한 장식으로만 보였던 면이 사람의 옷이 되고 또 공간으로 환원하는 것을 쉽게 볼 수가 있지요. [불여우아빠]
1914-1916년 풍경화가로서 클림트가 만년에 제작한 작품들에는 두 가지 중요한 요소가 등장한다.
〈Unterach on the Attersee〉(1914),〈The Litzlbergerkeller on the Attersee〉(1916), 〈Schönbrunner Park〉(1916)들을 통해 볼 수 있는
한 가지 중요한 특징은 이들이 공통적으로 단색화라고 할 수 있는 맑게 바래버린 윤기 없는 녹색을 담고 있다는 것이다.
이 작품들은 초기의 잔잔한 정취가 담겨진 그림과는 약간 다른 차이점을 가지고 있는데 녹색은 눌려진 것이 아닌 부드러운 것이며
칙칙하기는 하지만 투명한 것으로 보인다. 마치 자연 그 자체가 정신적인 현상이 되어버린 것 같다.
이 시기의 클림트는 1차 세계대전의 발발과 곧 이은 어머니의 죽음으로 인해 정신적 방황을 겪었을 것이다.
Unterach on the Attersee. 1915. 110 x 110 cm Rupertinum, Salzburg, Austria
아테제 호숫가에 위치한 릿츨베르크는 클림트가 종종 휴식을 취하러 가던 곳이었습니다.
이 그림 또한 하늘 풍경은 아주 조금 묘사되어 있습니다. 기존의 풍경화의 틀을 의도적으로 파괴하려는 듯 클림트 특유의 여백이 없는 구도로 그려졌는데 이렇게 화면을 가득 채우는 구도의 그림은 압도적이면서도 자꾸만 빠져들게 하는 매력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림의 대다수를 차지하는 나무 경사지에서 보여지는 작은 붓 터치는 클림트 특유의 점묘기법의 효과를 나타내며 다양한 색채들이 시각적으로 혼합되는 아름다운 조합을 보여 주고 있습니다.
작품 하단의 작은 부분을 차지하고 있는 아터제 호수와 집들 그리고 그 뒤로 가파르게 올라가는 초록으로 물들은 숲의 행렬, 코너에 보이는 하늘들은 한여름 호숫가의 호젓한 풍경을 녹색 주조의 아름다운 모습으로 표현하고 있습니다. [불여우아빠]
Litzlbergerkeller on Lake Attersee 1915-16
110 x 110 cm Private Collection
아터제 호수는 오스트리아의 휴양 도시로 유명합니다. 클림트는 여름휴가 때마다 에밀리 플뢰게와 함께 이곳에서 휴양을 하며 그림을 그렸습니다.
클림트가 이곳에서 아름다운 풍경화를 그리게 된 것은 당연했을 것입니다. 도시 생활에 염증을 느끼고 있었을 클림트에게 아터제는 그의 중요한 돌파구였습니다. 아터제에서 그림을 그리면서 그는 힘을 얻게 됩니다.
그림을 보면 한 가지 발견할 수 있는 점이 또 있지요. 클림트는 풍경화에 인물을 그리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인물 없이 자연의 풍경만을 그려냄으로 자연의 순수성을 표현하고 있습니다. [불여우아빠]
Schönbrunner Park. 1916
Apple Tree II. 1916 (?). 80 x 80
벨베데레박물관
Church in Unterach on Lake Attersee 1916
110 x 110 cm Private Collection
클림트가 그린 대부분의 풍경화들은 그가 1900년에서 1916년까지 플뢰게 자매들과 함께 여름을 보냈던 오스트리아 북부의 아터제 호숫가의 풍경을 담고 있습니다. 클림트는 성격이 까다로워서 작업할 때 누가 방해하는 것을 상당히 싫어했다고 합니다.
그는이 곳에서 휴식을 취하면서 아무런 방해없이 다양한 풍경화를 그렸습니다. 세상사에 부대낀 마음을 어루만져주는 클림트 풍경화들은 천국같이 평온했던 사랑의 추억에서 길어 올린 수확입니다.
밝고 화사한 색채로 충만한 작품들, 클림트의 풍경화에서는 자연의 긍정적 에너지가 흘러 넘칩니다. 나도 모르게 하늘 향해 팔 뻗은 나무 사이로 걸어들어 가고 싶을 정도지요. [불여우아빠]
Unterach on Lake Attersee. 1916
110 x 110 cm Private Collection
아터제 호수와 그 주변의 경관은 복잡한 도시 생활에 지친 클림트에게 작품에 집중할 수 있게 해준 활력소가 되어 주었으며, 그렇기에 그가 그린 대부분의 풍경화는 이곳의 경관을 모티브로 하고 있습니다.
작품 속에서는 전통적인 원근법이 철저히 배제된 채, 호숫가의 집들과 나무, 그리고 들판의 모습이 평면젹으로 표현되어 있습니다. 또한 풍경 속에는 인물을 단 한명도 찾아볼 수 없는데, 이 점은 클림트가 풍경을 그림으로 표현할 때는 감정적이거나 인간적인 표현을 사용하지 않고 순수한 자연의 풍경만 묘사하려 했다는 것을 말해줍니다.
입체감이 전혀 없는색과 면의 구성, 그 사이에 어우러져 있는 짧은터치의 나무 표현 등에서 클림트 특유의 태피스트리와 같이 장식적으로 표현하고 있는 작품입니다. [불여우아빠]
Garden Landscape with Hilltop. 1916
Garden Path with Chickens.
1916. 110 x 110 cm
Destroyed by fire at Immendorf Palace, 1945
다양한 색감이 사용되었는데도 불구하고 정돈되고 일관성있는 느낌이 드는 그림입니다.
다양하면서도 전체적인 윤곽이 곡선으로 표현되어있습니다. 그래서인지 매력적이게 온화하면서도 화려한 작품입니다. 자연에서 보이는 것들 계산적으로 배열하고 세부적인 즐거움들을 많이 장치해 둔 작품입니다.
이 작품을 보면 그림자가 표현되어있지 않아요. 실풍경화라고하기엔 그림의 형태가 약간 추상적인데 어떤 꽃을 표현했는지 배경이 어떤 구도에서 바라보고 그렸는 지는 모두 가늠할 수 있죠. 세밀하게 표현된 것이 아닌듯하면서도 각각의 사물에대한 윤곽과 색감으로 특징 들을 잘 살려내주었어요.
하지만 아쉽게도 오스트리아 임멘도르프 성의 화재로 인해 소실되었다고 합니다. 안타깝게도 소실된 작품이지만 이렇게 사진으로나마 남아있어서 이런 작품도 있었는지도 알게되었고 이렇게 감상도 할 수 있네요.
〈Garden Path with Chickens〉에서는 두 번째 중요한 특징을 알 수 있다. 클림트는 풍경 속 꽃 뭉치들의 표현에서 거대한 세균들을 연상케하는 형태들을 보여주고 있다. 〈Orchard with Roses〉에서는 심지어 왼편에 나있는 길조차 생물인 것처럼 보인다.
이 그림에서 클림트의 생물학적 관점은 그 절정에 이른다. 이 그림의 축에 놓인 길은 마치 떠오르는 생물학적 형상처럼 보이며 그것의 좌우에는 서로 뒤엉키고 탑 모양 덩어리로 형성된 꽃들과 잎들이 자라있고 유난히 강조된 윤곽은 바로 현미경 아래에서 세포들을 관찰하는 것 같이 묘사되어 있다.
이 단계를 더욱 대조해 보면 세포들은 세포들은 2차원에서 함께 증식할 뿐 아니라 그 깊이에 있어서도 더욱 그러하다.
Forest Slope in Unterach on Lake Attersee.
1917. 110 x 110 cm Private Collection
클림트의 풍경화의 가장 큰 특징은 사람이 전혀 등장하지 않은 점이라 우리에게는 다소 생소하게 보입니다. 어떤 그림에서도 산책하는 사람이든, 밭에서 일하는 농부나 놀고있는 어린아이, 빨래하는 여인들은 보이지 않습니다. 이러한 특징 때문에 그의 풍경화는 유별나게 인상적이며 편안하고 평화롭게 보입니다. [불여우아빠]
클림트는 마지막으로 산을 주제로 삼아 풍경화를 제작하였다. 그는 다른 범위에서의 자연현상에 관해 시도하고, 시험했었던 감상을 그림 속에 적용했다. 〈Garden Landscape with Hilltop〉, 〈Mountain Slope at Unterach on the Attersee〉(1917) 속에서 반 고흐와 뭉크와 같은 동시대 미술가들의 풍경화에서 찾아볼 수 있는 근대 범신론적 관점이 나타나고 있는 것이다.
클림트가 그의 풍경화를 돋보이게 해주는 요소로는 풍경의 주제를 보석이나 불꽃놀이처럼 만들었거나 생명의 기초적인 생물학적 에너지로 해석하는 방식을 사용한 것도 하나의 요소이기도 하다.
그러나 클림트의 풍경화에 담겨 있는 근원적인 요소는 본질적인 풍경화에 담겨져 있는 평온과 정적 그리고 비애에 있다고 생각한다.
그는 초상화작업도 매우 열심이었다.
여러 파문에도 클림트를 오스트리아가 낳은 가장 위대하고 혁신적인 화가로 보는 사람들이 점점 더 많아졌다.
오스트리아의 많은 여인들이 그의 손으로 그려진 초상화를 원했고, 클림트 역시 기꺼이 이에 응했다.
그는 장식성을 '진보할 수 없고, 지진아적'이라고 말했지만
초상화에는 그 현란한 장식성과 색채를 통해 비엔나의 상류층 부녀자들을 즐겁게 해주었다.
특히 환상적이며 섬세한 디테일을 돋보이게 하는 금박을 입힌 초상화는 부르주아 층의 높은 지지를 받았다.
그것은 이태리 성당의 화려한 모자이크에서 영감을 받았는데, 비잔틴 예술에서는 신비적 금욕을 유도하려던 것에 반해
클림트는 관능적 황홀감으로 변화시켰는데 이는 금 세공사의 아들로 자라난 것과 무관하지 않을 것이다.